238화. 다시 시작 (2)
민치호의 말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국세공무원교육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세무직은 모두 교육원에서 연수를 받는다.
나도 거기를 거쳐 왔고 지금쯤 새내기들을 받을 준비로 한창일 것이다.
그 이후 찾아가는 일은 딱 하나, 교육자로 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내가 교육원으로?
-판, 깔아줄까 하는데.
-제한 시간은 내년까지야.
이틀 전 분명 둘은 거물을 치자고 했다.
시간도 촉박하고 준비도 필요할 텐데 교육원 얘기는 너무 생뚱맞지 않나?
“너무 결론부터 말했나 보군요. 처음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이선균은 푸근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이번에는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타격 없이 지나갈 수는 없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상대는 돈과 권력, 모두를 쥔 자들이다.
그것도 두 명.
곧바로 그 둘을 칠 수는 없으니 손발을 잘라내야 할 것이고, 지금 올해가 가기 전에 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손발이 과연 한두 개로 끝날까?
공격하면 가만히 맞아 주기만 할까?
우리는 겨우 손발을 잡는 데만도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자진해서 타격을 받을 겁니다. 민치호 국장님은 도로 지방청 국장으로 내려가실 거고 저 역시 지방 세무서로 갈 거예요. 신 팀장은 서울에서 가장 멀고 조용한 곳에 피해 있으십시오.”
이선균의 말에 나는 깨달았다.
좌천인 척하면서 몸을 피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배, 그러나 우리는 돌아올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내려간다.
상대가 뼈를 취한 것처럼 보이도록.
그리고 나를 교육원이 있는 제주도는 이선균의 말대로 서울에서 가장 먼 곳.
정쟁과는 거리가 멀고 그야말로 자라나는 새싹들을 키우기 위해 모여든 교육자들이 있는 곳이다.
“한 가지 더. 우리는 중부청장님을 교육원장으로 보낼 겁니다. 이 경우엔 유배라고 봐도 되겠군요.”
“그분이 거기에서 쥐죽은 듯 계실까요?”
이빨 빠진 호랑이지만 경력과 직함은 무섭다.
솔직히 옷을 벗는 그날까지 안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 역시 둘은 이미 생각해 둔 듯했다.
“그러니까 네가 가는 거야, 신재현. 중부청장이 허튼짓 못 하게 잘 봐둬. 거긴 정쟁하고 거리가 먼 순진한 교육자들이 많아서 입바른 말에 금방 넘어간다고.”
“청장님, 저는 오히려 교육자들이라 안심하고 보내자는 뜻이었습니다만.”
“이 과장, 걱정은 사전에 하는 거야.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 해.”
민치호의 얼굴은 진중했다.
저 어깨에 책임져야 할 사람이 많으니 이해한다.
나야 판 깔아 주면 좋다고 날뛰면 그만이지만 뒷수습하는 건 민치호니까.
“저야 쉬고 온다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저희 어머니 몸이 안 좋으시거든요. 이 기회에 요양하면 되겠네요.”
걱정 어린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일부러 괜찮은 척 가볍게 말한 것을 둘은 금방 알아챈 듯하다.
그래도 내 말은 진심이었다.
까짓 거 계획만 있다면 좀 쉬다 오는 것도 나쁘진 않지.
특히 한 번도 제주도에 가 본 적 없는 어머니는 좋아하실 거다.
다만 그걸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다시 돌아올 수 있어야 성립되는 이야깁니다. 청장님도, 과장님도요.”
나야 여기까지 오는 데는 앞에서 끌어주는 상사들의 힘이 컸다.
어디로 가든 민치호와 이선균이 있다면 또 믿고 달릴 수 있다.
그런데 이 둘은 지방으로 갔다가 다시 원래 궤도로 돌아올 수 있을까?
보통 한 번 레일에서 떨어지면 끝인데?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놈들이 많은 이 공무원 사회에서?
“그렇지.”
평온한 얼굴에 비해 뭔가를 망설이는 기색이다.
저런 얼굴이라면 답은 하나다.
돌아올 방법은 있지만 그걸 내게 말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경우.
“말씀하기 곤란한 거라면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눈치껏 발을 뺐다.
이런 감각은 꽤 늘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의외로 민치호가 먼저 붙잡았다.
“아니, 말할 수 있는 만큼 말해 주지. 이유 없이 희생하라고만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 확신을 가져야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법이야.”
민치호를 쳐다보는 이선균의 눈동자가 벌어졌다.
그리고 곧 차분한 얼굴로 돌아갔다.
“신재현, 네가 국세청에 입성하는 날. 모든 걸 말해 주겠다고 한 말, 기억하지?”
이들의 뒤에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눈치챈 걸 알면서도 이들은 묵인했을 뿐더러 내가 국세청에 입성하는 날, 즉 내가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추었을 때 그 정체를 알려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즉, 우리 라인의 꼭대기는 민치호가 아니다.
“내 위, 장막 너머에 있는 사람은 그만한 힘이 있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복권시켜 줄 만큼의 힘이 있다는 것도요.”
“그럼 걱정하는 건 다른 거군.”
이 말을 해도 될까.
나는 주저했다.
내가 입을 달싹이고 있자 민치호가 먼저 내던졌다.
“그 사람이 우리 전부를 잘라내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지?”
“……죄송하지만. 네,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신임을 얻고 있냐는 뜻.
워낙에 무례한 질문인지라 말을 꺼낸 나부터가 긴장했다.
그러나 둘은 불쾌한 기색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직접 만나서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한 적은 없으니까.”
“외람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 물어야 하는 게 맞고 알아야 하는 게 맞아.”
민치호는 고민하며 턱을 쓸었다.
“흠, 어디까지 설명할까. 내가 소싯적에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던 때가 있었거든.”
언제를 말하는 지는 바로 알았다.
이선균이 술자리에서 말해 준 적이 있다.
국세대라는 학연으로 묶여 있던 거대 파벌의 힘을 죽여 놓았던 그때다.
“그때 원래는 나도 끝장났어야 맞아. 그땐 지금보다 더 폐쇄적이었으니까. 내가 살아 돌아온 게 용하지.”
“아!”
나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공무원이 철밥통이고 젊은 나이에 엘리트 가도를 달리던 전 국세청장 정상훈이 함께했다고 해도 파벌 구도를 견제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완전히 와해시키지는 못했다지만 굳건하게 자리 잡은 세력을 약화시키긴 어려우니까.
그때 민치호를 비호하고 국세청 내부의 파벌 싸움을 정리하도록 힘을 실어 준 게 그 사람이구나.
“이해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우리 셋과 비슷하다.
당시엔 민치호가 내 위치에서 칼질을 도맡았을 것이다.
“언제고 약속하지. 우리는 법을 우습게 아는 놈들을 쳐낼 때까지 달릴 거야.”
“확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그럴 겁니다.”
민치호와 이선균이 순간 짙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안도해야 할 건 내가 아닌가?
아무리 큰일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상사를 떠본 무례함을 저지른 건 난데.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자 이선균이 가볍게 웃었다.
“우리 역시 목을 내놓고 하는 일이니까요. 우리끼리 믿지 못하면 시작도 못 할 겁니다. 그러니 신 팀장의 믿음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요.”
내게 각오를 물었듯 둘 역시 그만한 각오를 다진 모양이다.
안심이 들자 의욕이 불타올랐다.
“그럼 이왕 깔아 주신 판, 크게 날뛰어도 되겠습니까? 물론 말씀하신 대로 손발은 쳐낼 겁니다.”
“응? 상관은 없는데 누구 치려고.”
어차피 좌천당하는 모양새를 취할 거라면 화려하게 불태우고 떠나고 싶었다.
내가 떠나 있어도 저들이 내 이름을 잊지 못하도록.
돌아오는 그날, 내 복귀 뉴스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지도록.
그렇게 각인해주고 싶었다.
“일전에 말씀드린 자식들, 치겠습니다.”
나는 믿음직스러운 두 상사와 눈을 마주쳤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법 앞에 모두 평등하다는 걸 보여 주자고!”
***
나는 벼르고 벼르던 명단을 강혜원에게 맡겼다.
강혜원은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게 파일을 열어 보더니 진심이냐는 듯 되물었다.
“치는 건 상관없는데요, 이거 조사를 소득재산세과에 맡긴다고요? 우리가 몰래몰래 조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강혜원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처음이라 다른 팀원들도 주섬주섬 몰려들었다.
그리고 신상명세를 보자마자 강혜원과 똑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충 해석하자면 ‘너 미쳤나?’ 하는 표정이다.
“이건 강혜원 말이 맞는데? 백번 양보해서 조사과에 맡긴다면 이해하겠는데, 납세국에다 맡긴다고? 보안은?”
장세훈은 말해놓고 아차 했다.
내가 맡기려는 곳의 과장이 이선균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쪽 과를 못 믿는다는 건 아냐. 나도 같은 공무원들 믿고 싶지. 그래도 이 일이 새어 나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기자들 레퍼토리가 그거잖아. 익명의 관계자에 따르면.”
조사 대상의 정보를 유출하는 건 금기다.
그래도 내가 넘긴 명단을 보고 유혹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은 겁을 먹거나.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이름이었다.
“에이, 아니죠. 이선균 과장님이 믿을만한 사람한테 맡길 텐데요. 콕 집어서 맡겼는데 새어 나가면 누가 발설했는지 들키잖아요. 그걸 알고도 발설할 만큼 멍청한 사람이 이 건물에 있을까요?”
“아, 하긴 그렇겠네. 새어 나가면 누가 발설했는지 체크 되니까.”
안길진의 설명에 장세훈이 안심한 얼굴로 끄덕였지만 나는 단호하게 잘랐다.
“아뇨, 이번 일은 새어 나가야 합니다.”
“네?”
강혜원이 입을 떡 벌렸다.
웬만하면 군말 없이 따라와 주는 황민우 역시 동공이 커져 있었다.
장세훈이 펄쩍 뛰었다.
“야! 미쳤냐?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겨도 시원찮을 판국에 이게 무슨 소리야? 제정신이야? 죽으려고 작정했어?”
장세훈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자 황민우가 다급히 말렸다.
“팀장님이 불도저처럼 달려들긴 해도 생각 없는 분은 아닙니다. 아시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더 이해가 안 가는 거야. 일부러 새어 나가게 한다고? 상대가 누군지 알잖아!”
장세훈은 그 이름을 입에 담기도 꺼려 했다.
누가 들을까 두려워하는 듯.
그야 그럴 만도 하다.
내가 이번에 타깃으로 잡은 것은 여야 권력자들의 자식들이었으니까.
그 안에는 여야 대권 주자의 아들과 딸도 포함되어 있다.
“그 이상으로 큰 것을 잘라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건으로 우리 팀은 해산할 거예요. 마지막 불꽃, 화려하게 태울 겁니다.”
“자, 잠시만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강혜원이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 설명 순서가 틀렸나.
“팀장님. 저희는 팀장님을 믿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결과가 해산이라면 따를 겁니다. 그러니 설명해 주세요.”
황민우의 말에 팀원들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었다.
“당연합니다. 무작정 제 말을 따라달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린 같은 팀 아닙니까.”
나만 보고 따라온 사람들이다.
아무리 복귀 가능하다고 해도 선택지는 줄 생각이었다.
“혜원 씨는 일단 이 파일을 납세국 소득재산세과에 넘기고 오세요. 평소처럼 하시면 됩니다. 그쪽에서 이선균 과장님이 알아서 해 주실 거예요.”
강혜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된 얼굴로 파일을 꾹 쥐었다.
“저는 지금 바로 검찰청으로 갈 겁니다. 알아봐야 할 게 있어서요. 그 사이에 여러분은…….”
나는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건 자진해서 해야 한다.
팀에서 빠진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온다고 하면 더 좋다.
본인 스스로 선택했으면 싶었다.
“그 후 즉시 청장실로 올라가세요. 네 분 다. 청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청장 직속 팀이긴 했지만 이들이 청장실에 들어간 적은 없다.
이제까지 나 혼자 올라가 회의하고 명령을 받아 왔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의 의사 역시 중요했다.
그래서 미리 청장과는 합의를 끝냈다.
라인이 어쩌구, 하는 모든 것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 뭘 어떻게 칠지, 그 후 우리는 어떻게 될지 계획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승승장구하는 멋진 미래를 생각해 따라온 사람이 있다면 내려야 할 때다.
물론 팀에서 빠진다고 해도 불이익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공적을 생각해서 적당히 원하는 곳으로 보내 줄 것이다.
“좋아요. 우릴 얼마나 얕봤는지는 몰라도 갔다 와서 봐요.”
뭔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반응이긴 한데.
강혜원은 기세등등하게 사무실을 나갔다.
“다녀오세요. 어차피 자세한 브리핑을 갔다 와서 해야 할 것 같네요.”
황민우가 등을 떠밀었다.
어쩐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검찰청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