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다시 시작 (1)
“이선균 과장님 어디 가셨어요?”
성실납세국의 한 직원은 빈자리를 보며 동료 직원에게 초조하게 물었다.
“시간은 좀 됐어요. 청장실 가신다고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라고 하시던데요.”
“제길, 늦었다! 결재받을 거 있었는데!”
“저런, 오늘도 이 조사관님은 야근 확정인가요?”
“어림도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5시에는 들어오셔서 결재 처리해 주시니까요. 칼퇴의 꿈은 이루어진다!”
“그냥 저랑 같이 야근하시면 안 될까요? 혼자 밥 먹기 심심한데.”
“절대 안 됩니다. 아무도 제 칼퇴를 막을 수 없어요.”
“결재 까였으면 좋겠다.”
“뭐라고요?”
다투기 시작한 두 직원 주변으로 다른 직원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지루한 오후에 잡담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선균.
요즘 들어 부쩍 청장실에 이선균이 들락거렸다.
이선균이 민치호 사람인 거야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래도 이선균은 겉으로는 파벌의 티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중부청장 쪽과 한창 적대하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중부청장 쪽 줄을 잡은 다른 국 과장이나 팀장이 시비를 걸어도 허허 웃어넘기기 일쑤.
같은 과 직원 중에서 중부청장 사람이라고 일을 몰아준다거나 결재를 빠꾸한다거나, 그런 괴롭힘은 절대 없었다.
그야말로 상사의 귀감, 적절한 처신이었다.
부하 직원들에게는 공평하다는 평가가 있었고 납세국장의 신임도 두터웠다.
그야 민치호의 오른팔이니 그의 유능함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인성까지 좋다면?
이선균에 이어 민치호까지 주가가 나날이 올라가고 있었다.
특히 민치호는 중간에 이동한 것인데도 그랬다.
“그래도 한동안은 조용했잖아요. 요즘 따라 자주 올라가시는 게 좀 그렇지 않아요?”
민치호가 청장으로 부임한 직후에는 인수인계 때문인지 바빴다.
이선균 역시 별 움직임이 없었다.
파벌 싸움으로 어수선했던 청 내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가장 먼저 단합대회라는 행동을 취했다.
그리고 지금 이선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청장실에 들락거리는 중이었다.
과장 위에 엄연히 국장이 있으니 이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국장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국장님도 허락하신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비상사태죠. 직속으로 보고 들으셔야 할 국장님 건너뛰고 바로 청장님하고 회의 간다는 건 업무와 별개의 얘기란 뜻이잖아요. 청장님 오른팔이 과장님인데. 그런 곧…….”
“설마 잠잠하던 청에서 가지치기라도 하시려나요?”
“가능성 있습니다. 슬슬 인사이동 시기기도 하고.”
직원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자신들의 거취도 바뀔 수 있으니 결정권자의 행보에 민감한 건 당연했다.
“그래도 두 분은 자기 라인 아니라고 내치는 분 아니잖아요.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제 생각에도 그래요. 오히려 기존 중부청장님 라인을 내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일단은 이 상황에서 또 다른 정쟁을 만들어내실 것 같지는 않고.”
“정쟁이라고 해 봤자 솔직히 저는 잘 못 느꼈어요. 평소처럼 일하다 보니 어, 뭐가 끝났네? 같은 느낌이라.”
직원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위에서, 아니면 물밑에서 피 냄새 섞인 칼바람이 왔다 갔다 한 건 알겠다.
그러나 정작 직원들에게 피부로 와 닿는 건 없었다.
세 파벌 중 중부청장이 나가리 되고 서울청장이 등극했으니 무언가 싸움이 있긴 있었다는 건데.
그쪽 줄을 잡은 소식통 직원 몇에게서 전해 듣고 나서야 중부청장이 나가리 되었다는 걸 알 정도였다.
이것은 그만큼 청장급들이 신경을 썼다는 뜻이기도 했다.
“중부청장님은 그럼 어디로 가시려나.”
“아무리 싸움에서 졌어도 청장급인데 좌천되진 않을걸요? 청장으로 돌다가 은퇴하시지 않을까요?”
“지방청장이면 엄청난 실권자잖아요. 청장으로 냅두면 턱 밑에 가시가 박힌 거나 다름없는데. 원래 역사에는 승자가 패자를 놔두는 법이 없었어요.”
“지금은 21세기라 패자 모가지를 뎅겅뎅겅 날리면 승자도 무사하지 못해요, 김 조사관님.”
직원들은 향후 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추측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다 보니 한 명의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가 없었다.
“청장님 오른팔이 이선균 과장님이면 왼팔은 신재현 팀장님이잖아요. 이제 신재현 팀장님 날아오를 일만 남았네요.”
“부럽다! 등에 날개를 달겠네!”
“솔직히 전 부럽다고 생각 안 해요. 김 조사관님 그 자리에 앉혀 놓으면 잘 할 수 있겠어요? 저 같으면 심장마비로 한 다섯 번은 죽었을걸요?”
“아…….”
한 직원의 말에 다른 직원들이 다 함께 입을 다물었다.
신재현의 위치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실적까지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슬슬 연말이라 밀린 연차 쓰는 것 같던데. 새로운 일 안 맡기는 건 역시 그거겠죠? 1월에 인사이동 하니까.”
“아직 10월이라 맡으려면 충분히 맡죠. 제가 보기엔 폭풍전야입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청장님과 신재현이 또 뭘 하나 터뜨린다는데 제 칼퇴를 걸겠습니다.”
“같이 야근 안 해줄 거면서 칼퇴 걸지 마세요. 어? 2팀이다.”
대꾸하던 직원이 입구 쪽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놀려먹던 직원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우리가 2팀인데 왜 2팀을 보고 놀라요? 어? 진짜 2팀이네.”
모여서 잡담하던 소득재산세과 직원들의 시선이 한쪽에 모였다.
가끔 협력 요청 때문에 납세국에 찾아오곤 하는 익숙한 얼굴의 직원 하나가 빼꼼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혜원 씨!”
붙임성 좋은 강혜원답게 금방 누군가가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강혜원은 사무실의 불투명한 유리문 뒤에 몸을 숨기고 배시시 웃었다.
“바쁘신데 방해한 건 아니죠……?”
직원들이 모여서 심각한 얼굴로 대화하다 보니 그렇게 보였나 보다.
직원들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얼른 들어오세요.”
배시시 웃으며 들어서는 강혜원의 손에는 몇 개의 파일이 들려 있었다.
팀장을 합쳐 단 5명밖에 없는 자그마한 팀에서 시간과 품이 드는 밑 작업을 요청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미안해서라도 될 수 있으면 맡기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지금은?
여전히 미안해하지만, 사적인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진 않는다.
즉, 업무와 효율성을 위해서 미안하더라도 고개를 숙여 가며 부탁한다는 뜻이다.
덧붙여 오늘은 강혜원의 손에 붕어빵 봉지가 들려 있었다.
슬슬 날씨가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면서 길가에 있던 노점상에서 사 온 것이다.
“와, 감사합니다!”
직원들은 저마다 종이봉투에서 붕어빵 하나씩을 꺼내 물었다.
“아, 근데 어쩌죠? 저희 과장님 자리 비우셔서 결재 금방 안 날 거예요. 급하신 건인가요?”
이선균이 일단 보고 일손이 나는 팀이나 적절한 직원에게 배분하곤 했다.
그러나 강혜원은 알고 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넵. 저희 팀장님이 이선균 과장님하고 같이 청장실에 불려가셨거든요. 갔다 오셔서 맡기신 거예요. 이선균 과장님도 알고 계신 건이에요.”
“저희 과장님이요?”
“네. 방금 팀장님이 갔다 오셔서 알려주셨어요. 이선균 과장님은 아직 안 오셨구나.”
직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냄새가 났다.
“보시고 업무 분배…… 아차, 과장님 결재 필요하죠? 자꾸 저희 팀에서 하던 버릇이 나와서…… 저희는 체계가 팀장님밖에 없어서 명령 떨어지면 알아서 분배하거든요.”
강혜원이 입을 톡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 과장님 오시면 전달 부탁드릴게요. 급한 건 아닌데 좀 신중해야 해요.”
신중?
특수조사2팀이 얽힌 일 중에 신중하지 않은 건은 없었다.
그런데 특별히 신중을 언급한다는 것은 또 뭔가 사고를 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청장과 이선균 과장, 신재현 팀장.
오른팔과 왼팔이 한데 모여 회의한 후 나온 결과물이 이거다.
‘이건 백퍼 터지는 각인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나야 불똥 안 튀면 상관없지만, 저 팀은 진짜 대단하네.’
또다시 기자들이 서울청을 둘러싸는 미래가 직원들의 눈에 훤히 보였다.
***
그로부터 1시간 전.
청장실에 앉은 민치호와 이선균은 격론이 한창이었다.
“제 사견입니다만 중부청장은 완전히 힘을 죽여놓는 게 맞다고 봅니다. 언제나 적지에 나갈 땐 내정부터 정리하는 법입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내부에 적을 남겨둬선 안 됩니다.”
이선균은 굳센 어조로 말했다.
이전부터 몇 번 말한 내용이기도 했다.
세 파벌 중 지는 쪽이 힘을 온존하게 되면 이후에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민치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중부청장을 국장급으로 내릴 순 없잖아. 지방청은 어디든 중요해. 대전청이나 부산청으로 보낸다 해도 실권을 뺏는 결과는 아니지. 그렇다고 본청 국장급으로 보내겠나? 그 중요한 자리로?”
문제는 그거였다.
현재 중부청장은 대외적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두 번 다시 국세청장 후보로 이름조차 올리지도 못할 정도의 타격이다.
그러나 아직 그는 청장이었다.
인사권과 실권을 쥔 청장.
등 뒤에 남겨두기엔 위험한 것이다.
“하, 이 양반.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서도 처치 곤란이네.”
민치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같은 급인 청장을 어디로 날려 보낼지 결정한다?
누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소리였다.
“트집 잡아서 직무 정지는 어떻습니까?”
이선균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민치호와 있을 때만큼은 거짓 미소는 지워낸 지 오래였다.
그 역시 까마득히 높은 청장을 하나의 말로 취급하는, 냉철한 시선이었다.
“오낙현 국세청장님은 보신주의야. 어지간한 불법 행위 아니면 쉽게 서명 안 할걸.”
이선균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중부청장님이 눈앞에서 사라져야 그 파벌들도 포기할 텐데요.”
중부청장의 손발은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수십 년간 공무원 생활을 한 사람이다.
깊은 인맥 한둘쯤은 있을 것이다.
재기는 힘들어도 민치호의 빈틈을 찌를 인맥 정도는.
중부청장 하나만 지워내면 와해는 쉽다.
어디에 유배 보내느냐 고민하느라 청장실에 침묵이 내렸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청장님, 신재현입니다.”
“그거다!”
민치호와 이선균이 마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신재현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관이 하나 있었다.
“국세공무원교육원장!”
“그렇네요. 약간 좌천의 모양새도 나고, 실권에서 떨어진 곳이기도 하고.”
교육원장을 지내고 나면 지방청장으로 승진하거나 본청 국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반대로 지방청장이 교육원장으로 가는 일은 드물었다.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에게는 중부청장이 힘을 잃었음을 알리는 상징이 될 것이고 외부적으로 보기에도 별문제가 없다.
어찌 되었든 기관의 ‘장’을 맡긴 거니까.
“이거면 오 청장님도 받아들이시겠군.”
-똑똑.
한참 동안 들어오라는 허락이 없자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치호가 서둘러 외쳤다.
“들어와!”
청장실 안으로 들어선 신재현은 무언가 홀가분해 보였다.
하루 푹 쉬라고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재현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둘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청장님과 과장님의 깊으신 뜻을 겨우 이해했습니다. 이번 일은 단순한 각오로는 안 되는 만큼 주위를 돌아보고 마음을 다지라는 뜻이었군요. 저는 이제 잃을 것이 많아졌습니다. 주위의 기대도,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실적도. 이번에 잘못되면 그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되겠죠. 하루 동안 제가 가진 걸 둘러보고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 모든 걸 잃는다고 해도 저는 해야겠습니다.”
새삼 각오를 다진 모습이었다.
어떤 풍파가 와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민치호와 이선균은 뿌듯하게 웃었다.
“사실 그렇게 거창한 뜻은 없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면 이런저런 잡생각이 들거든요. 그러고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면 그건 진짜입니다.”
“하루 푹 쉬고 심신을 충전하는 정도면 충분했는데 거기서 또 깨달음을 얻나? 하하하, 역시 우리 걱정이 기우였군.”
민치호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좋아. 앉아 봐. 계획을 설명해 주지.”
“넵!”
의욕이 가득한 상태로 신재현이 이선균 맞은편에 앉았다.
“이번에 크게 한번 터뜨리고 국세공무원 교육원에 내려가 줘야겠어.”
“……네?”
그리고 민치호의 폭탄선언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