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33화 (233/500)

233화. 하루 동안 잘 생각해 봐.

-철썩.

한강에도 파도가 치는 것을 알고 있는가?

나는 지금 처음 알았다.

애초에 내 직장인 서울지방국세청은 종로에 있다 보니 용산에 사는 나는 한강에 갈 일이 없었다.

삼성 세무서에 있었을 때는 반포대교나 잠수교를 건너서 출퇴근하긴 했지만 출퇴근 해 본 사람은 안다.

발 디딜 틈도 없는 지옥버스에서 계단에 매달려 출퇴근하다 보면 한강에서 파도가 치는지 갈매기가 날아다는지 쳐다볼 여유도 없다.

-철썩철썩.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놀라고 있었다.

“한강에도 파도가 치는구나.”

강인데도 잠수교 옆에는 흙이 쌓여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었고, 바다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자그마한 물결이 모래를 밀고 왔다.

그 자그마한 흙더미에 시커먼 오리 비슷한 새들이 종종거리며 부리로 무언가를 휘젓고 있었다.

“와, 미친. 갈매기도 있네.”

푸드덕 날아다니는 비둘기 떼 너머로 바다에서나 볼 법한 회색빛 갈매기 한 마리가 강 위를 날았다.

갈매기는 하늘을 한 바퀴 돌더니 가로등 위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끼룩!

왠지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평일 대낮에 한강에 나와 앉아 있는 나를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갈매기가 날 괴롭힐 이유는 없으니 이건 내 자격지심일 것이다.

-끼룩!

영역 다툼이라도 하는 듯 갈매기가 나를 향해 한차례 더 울었다.

이번엔 꽤 길다.

“알았어. 간다고, 가!”

살다 살다 새한테 쫓겨나는 일도 다 있네.

어차피 강가에 앉아 있은 지도 오래되어서 슬슬 걸을까 생각하던 참이다.

나는 천천히 잠수교 위를 걸었다.

수면에 햇빛이 눈부시게 부서지고 바로 옆에는 자전거가 따릉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왼쪽에 이름 모를 물고기 한 마리는 펄쩍 수면 위로 뛰었다.

“아, 깜짝이야…….”

이젠 물고기한테마저 놀림 받는 기분이다.

잠수교에서 가장 높이 솟은 부분에 다다르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약 3년 전 여기서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할 뻔했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얻었다.

날 믿고 밀어주는 사람들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쳤고, 그 대상은 가리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위에서 막아주고 옆에서 끌어주며 밑에서 밀어주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나도 안다.

힘이 없으면 정의는 이론에 불과하며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일 뿐이다.

내게 힘을 실어주는 사람들의 존재는 더없이 큰 행운이었으며 덕분에 원 없이 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와서는 내 목표이자 삶의 이유라고 해도 될 것이다.

지금은 손이 닿지 않지만 언젠가는 저 높은 곳에 있는 자들도 잘못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라는 목표 말이다.

-꾸엑.

한강 위를 돌아다니던 오리 몇 마리가 울었다.

내가 괜히 평일 낮부터 연차를 써 가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닌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이다.

아침 일찍, 민치호의 부름에 청장실로 올라가니 웬일로 이선균이 함께 앉아 있었다.

둘은 내가 들어가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판, 깔아 줄까 하는데.”

아, 심각한 일이 맞구나.

이 둘이 판을 깔겠다고 하면 그건 대한민국이 뒤집힐 정도로 거물을 치려는데 네가 해 보겠냐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번엔 누굽니까?”

이젠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뭘 치려는지 대상만 알려 주면 족했다.

그러나 둘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남 앞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로 본심을 가리던 이선균조차 지금은 미소를 지우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 팀장이 치고 싶은 사람들, 남아 있잖습니까.”

“좀 멀리 있는 그분들이요?”

“바로 그들을 치기엔 어렵고, 손발을 좀 쳐내 볼까 하는데요.”

청장과 이선균이 이렇게 말하는 거라면 계획과 준비는 되어 있을 것이다.

승산도 어느 정도 있으니 말을 꺼냈겠지.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환영입니다. 제가 다 잘라내겠습니다.”

둘은 잠시 만족한 얼굴을 했다가 곧바로 표정을 고쳤다.

어쩐지 근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신재현 팀장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래선 안 돼요.”

이선균은 가만히 입을 다문 채 테이블 유리 위에 손으로 천천히 무언가를 썼다.

펜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속삭이는 것도 아닌, 전혀 흔적이 남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선균이 얼마나 조심스러워 하는지, 이번 사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들은 파쇄기조차 믿지 못하는 것이다.

-스윽, 슥.

이선균의 손가락이 천천히 테이블 유리 위를 움직였다.

그 손가락을 좇아 나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단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기에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완성된 두 개의 이름을 본 순간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깜빡이지 못해서 눈이 아팠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름을 보자마자 왜 이렇게 불편한 방식으로 내게 전달하려 했는지 이해됐다.

민치호와 이선균이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제 예상보다는 빠르네요.”

나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더도 말고 지금 드는 생각은 딱 그것뿐이었다.

언젠가 치고 싶다, 고 생각은 했지만 벌써부터 과녁을 드리울 줄은 몰랐다.

“물론 당장 치는 건 아냐. 하지만 내년이 지나면 늦는다는 결론이 나왔다.”

민치호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겠지?라고 묻는 듯했다.

“그들이 더 힘을 얻기 전에 쳐야 하기 때문이라면, 확실히 시간이 촉박하네요.”

아까의 들뜬 기분은 가라앉고 나 역시 진지한 마음이 들었다.

“제한 시간은 내년까지야. 시간이 더 흘러가면 기회는 없을 수도 있어. 우린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한편에서 아주 작은 초조감이 머리를 드밀었다.

그러나 상대를 알게 된 지금도 내 선택지는 하나였다.

“그렇다면 해야지요.”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어려운 싸움을 했다.

처음 용산 세무서에서 불의를 목격하고 이선균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전략적 우위를 점하고 싸움을 시작한 적은 없었다.

상대는 대부분 거물이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부딪혔다.

내 뒤에서 지원해 주는 상사들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피할 내가 아니다.

상대가 성역에 있는 놈이라면 성역까지 깨부술 뿐이다.

“청장님과 과장님께서는 승산이 있으니 말을 꺼내신 것 아닙니까. 저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실 듣고 싶었던 대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의 시간을 드릴 거예요.”

이미 내 대답은 다 나와 있는데 시간을 준다니.

나는 의아해서 되물었다.

“시간을 더 주신다고 해도 제 대답이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 제가 흔들릴까 봐 그러십니까?”

“아니요. 신 팀장을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 팀장을 지켜봤고 함께 일해 왔습니다.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요. 그러니 침착하게 잘 생각해 보세요.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큰 만큼, 깊게 생각해 보고 모레 오세요.”

“……모레요?”

“내일 출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급한 일은 없다지만 쉬라고 강요하는 상사는 처음 봤다.

“연차 많이 남았죠? 연차수당으로 받지 말고 하루 쓰세요. 이미 연차계 내려갔습니다.”

연차계 결재를 올린 것도 아니고 내려갔다니.

이미 결재 사인까지 다 끝났다는 뜻이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날 의심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이렇게 극구 말리는 것을 보니 오히려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둘의 의지는 확고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일은 푹 쉬어. 출근했다는 소식 들리면 바로 공무원증 빼앗아서 돌려보낼 거니까.”

“2팀한테도 말해 뒀습니다. 출근하면 바로 알려 달라고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긴 하지만 나는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네. 모레 뵙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쫓겨나듯 청장실을 나오고 말았다.

-꾸엑!

갈색의 오리 한 마리가 물에서 뛰쳐나오며 부리를 파르르 털었다.

의도치 않게 휴가를 받은 것은 좋은데 내가 대체 뭘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게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각오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보여 준 것만으로도 부족한 걸까?

집에서 누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딱히 답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바람이라도 쐴 겸 한강에 나오기로 결심한 것이다.

정확히는 내 시작이 되었던 장소로 가보고 싶었다.

그때의 심정을 떠올리면 뭔가 잡히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첨벙.

그리고 지금은 멍하니 새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솔직히 그 자리에 와도 별 생각은 안 들었다.

그냥 세월이 벌써 이렇게 지났구나.

그날의 나는 이런 미래가 올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 식의 평범한 직장인이 할법한 생각을 했다.

“저 끝에나 가 볼까.”

생각해 보니 걸어서 다리를 건넌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로 아래의 교각에서 카리스마대빵큰오리, 아니 왜가리가 내 인기척에 놀라 꿰엑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날았다.

잠시 강 위를 가르는 커다란 날개에 정신이 팔렸을 때였다.

-빠앙!

나를 스쳐간 승용차 한 대가 저 뒤에 서더니 요란하게 경적을 울렸다.

그러고서도 뭐가 다급한지 운전자가 헐레벌떡 차에서 내려 내 쪽으로 달렸다.

“어어?”

혹시 무슨 사고라도 있나?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지금 내 옆에는 지나가는 행인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볼일이 있다는 건데.

“잠깐!”

남자는 한 손을 휘저으며 달리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다시 자세를 잡고 일어서는 남자를 빤히 들여다보고서야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뭐야, 왜 그렇게 급해?”

나는 피식 웃으며 첫마디를 꺼냈다.

저 허우대만 멀쩡한 놈의 이름은 채성현.

내 고등학교 친구였다.

그 짧은 거리를 뛰어 놓고도 뭐가 힘든지 짧게 숨을 고른 채성현은 다짜고짜 물었다.

“야, 이 미친놈아. 너 출근 안 해?”

“당연히 연차지. 너는 이 시간에 왜 다리 위를 지나가냐?”

“나는 반찬데. 쪼개고 쪼개서 아주 알뜰하게 쓰고 이제 연차 3개 남았다.”

“반차보단 연차 몰아서 쓰는 게 낫지 않냐?”

“그랬다간 쉬는 날 없이 한 달 내내 출근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어. 너는 연차 몇 개나 남았는데?”

나는 손가락을 총동원했다.

상반기에 좀 썼고, 단합대회 끝나고 몰아 썼고, 오늘 또 썼으니까…….

“6개.”

“독한 놈이네. 6개나 아껴 놨어?”

“어차피 바빠서 못 쉬니까 자동으로 남아돌던데.”

“야. 너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네 생활이 무슨 평범한 직장인 생활이냐? 너 1달 28일 출근한 적도 있다며? 지금부터 몸 관리해야 돼. 안 그러면 훅 간다.”

내가 이 녀석한테 저렇게 자세한 얘기를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기사에서 본 모양이다.

“안 그래도 영양제 먹고 있어.”

“그건 또 챙겨 먹네.”

자주 만나도 어색한 친구가 있고 몇 년 만에 만나도 당장 어제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지는 친구가 있다.

내게 있어 채성현은 후자였다.

공무원 준비하던 때 가끔 집 근처로 찾아와 저녁밥을 사 주던 놈.

기사로 무슨 일이 뜨면 헐레벌떡 문자를 보내던 놈.

언제고 꼭 만나서 밥이라도 사야지, 하고 오래된 포스트잇처럼 머리 한구석에 붙어 있는 놈.

언제 봐도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친구 녀석은 말문이 막히자 그제야 피식 웃으며 손을 들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

“됐고. 너 왜 자꾸 이상한 문자 보내냐?”

“네가 대답 안 하니까 그렇잖아.”

“결혼하자, 처신 잘하라고, 뚝배기 조진다. 이런 말에 뭔 대답을 바라냐? ‘ㅋㅋ꺼져.’라고 보내 줬잖아.”

“성의가 없다고 성의가. 잠깐, 너 혹시 요즘 드립 모르냐?”

“문자 보낸 게 드립이었냐?”

채성현은 과장된 얼굴로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누군가 국세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그래. 그냥 가던 길 가라.”

내가 손을 내젓자 채성현이 아차, 하더니 뒤에 세운 차를 가리켰다.

“오늘 고등학교 축제일인 거 아냐? 반차 내고 거기 가던 길인데.”

“오늘이야?”

졸업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

이제는 같은 반 친구들도 선생님들의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가도 뭔 재미가 있을까?

내가 망설이자 채성현이 내 등을 쳤다.

“딱 봐도 잉여인간이구만. 가자. 선생님들도 너 되게 보고 싶어 하셔.”

“선생님이?”

나는 굉장히 조용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고3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집 형편 때문에 많이 신경 써 주셨지.

“그래. 가 보자.”

“고고!”

뭐가 좋은지 들뜬 친구 놈이 나를 재촉했다.

9년 만의 학교는 어떻게 변했을까.

나는 기대와 설렘을 안고 채성현의 차에 탔다.

“어, 뭐야! 차 샀어?”

“중고!”

“아, 그래.”

채성현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반짝반짝했지만 나는 절대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 주지 않았다.

차 잘 샀네, 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순 없지.

오랜만에 편한 친구를 만나서일까.

왠지 모르게 웃음이 계속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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