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32화 (232/500)

232화. 움직이는 것은 누구?

살다 보면 비슷한 직업, 업종끼리 의견 개진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국세청처럼 하나의 단체라면 상사가 부서원을 모으는 것으로 회의가 시작된다.

그러면 명확한 위아래가 없는 기업들은 회의가 필요하면 어떻게 하는가.

이들에게도 공동체가 있었다.

전국경제인협회.

말 그대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입할 수 있었다.

어떤 협회든 일정 직업인이 모인 단체는 그 직업의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전국경제인협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다른 협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단체는 주로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협회 안에서도 힘이 강한 자, 돈이 많은 자가 곧 회장이나 간부 직위를 맡게 되는데, 전국경제인협회는 그 성격상 대기업이 윗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기업과 아무 관계 없는 전문가가 회장을 맡았지만, 그들은 그저 이름만 올려둔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2022년을 결산하는 정기총회가 10월, 한 이벤트장에서 열렸다.

표면상 전국경제인협회인지라 대기업 뿐 아니라 일반 중소기업도 참가했으며, 참석자들은 각자 사업의 고충과 규제에 대해 토론했다.

어떤 중소기업은 발언권을 얻어 자기 회사의 PR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회의가 끝난 후 늦은 저녁, 외딴 지역의 별장에서 겨우 50여 명 남짓만 참가한 회의가 또 하나 열렸다.

숫자로 봐서는 협회 정기총회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작은 회의였지만, 참석자의 면면을 뜯어보면 절대 무시할 수 있는 회의가 아니었다.

흔히 재벌이라 불리는 자들, 기업집단법을 적용받는 대기업들.

그야말로 재계의 거물들만 참석할 수 있는 특별한 회의였다.

이들의 시총과 보유한 계열사, 그리고 기술력을 생각했을 때 대한민국 경제사는 이 작은 회의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중요한 회의였지만 분위기는 영 신통치 않았다.

“……우리 재계의 발전과 더 나은 기업가치 향상을 위해서 기탄없이 의견을 개진해주시기 바랍니다.”

바지사장 격으로 앉혀 놓은 협회장 역시 그 분위기에 짓눌려 평소보다 긴장한 목소리로 개회를 알렸다.

사실 이 분위기의 원인은 뻔했다.

바로 맨 앞 테이블을 차지한 채 술을 들이켜고 있는 지산의 회장, 지창태 때문이었다.

지창태는 후계자인 장남과 함께 참석했는데, 그 역시 가만히 회장 옆에서 빈 잔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원래라면 다른 재벌간 정보 교류나 인맥 관리를 위해 여러 사람과 웃고 떠들었을 그들이 한마디도 없이 술만 비우고 있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침울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재계에서 손꼽히는 지산 그룹의 총수와 후계자를 놔두고 떠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허, 지 회장님. 너무 티내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런 지창태의 테이블에 다가와 앉은 것은 다름 아닌 성화 그룹의 회장이었다.

지창태와 비슷한 나이에 지산과 비슷한 규모의 기업집단인 성화 그룹을 이끄는 그는 젊을 적부터 지창태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다.

나이를 먹은 지금, 둘은 단순한 라이벌이라기엔 악우에 가까웠다.

지창태는 제멋대로 테이블에 앉아 안주를 집어먹는 성화의 회장을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성화는 좋겠수다.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니.”

일련의 사태로 지산 그룹의 이미지는 밑바닥으로 내리꽂혔다.

딸과 사위가 저마다 범법자가 되어 검찰 조사를 받고 있으니 기업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가 또한 연일 하한가를 쳐서 시가총액이 단 몇 달 만에 20조 원 가까이 증발했다.

지산 그룹 결성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지산이 버티는 것은 장남이 무사하기 때문이었다.

후계자 싸움이고 지분 싸움이고 필요 없이 장남이 자연스럽게 경영을 물려받았으니까.

일단 주주에게는 믿음을 주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드님인 지도석 부회장이 무사하니 된 것 아닙니까.”

“약 올리려고 왔어요?”

“그럴 리가요. 미래에 대해 논하러 왔지요. 오늘의 모임에 걸맞게.”

성화의 회장, 성주림이 말을 붙이자 그제야 다른 기업의 사람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모여들었다고 해서 어중이떠중이인 것은 아니었다.

이들 또한 재벌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으며, 시총으로 따지면 10위 안에 드는 기업의 회장이나 후계들이었다.

“우리끼리 사이에 미사여구 필요 없잖아요.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봅시다. 신재현 그 새끼가 어디까지 갈 것 같습니까?”

“그 얘기는 하기 싫은데.”

“우리는 진지합니다. 언제 회사에 신재현이 쳐들어올까 몰라서 불안에 떨고 있어요. 10년 전에 이런 말 들었으면 콧방귀나 끼고 말았을 텐데, 우리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는지 모르겠네요.”

다른 기업이 당한 거라면 그저 웃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얻어맞은 것은 다름 아닌 지산 그룹이었다.

기업 규모로는 한 손가락에 꼽히는 곳.

“그동안은 신재현이란 놈이 장관을 치든 국회의원을 치든 손주 놈 재롱 보는 기분으로 지켜봤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놈이 글쎄 회장님을 콱 물지 않았습니까? 강 건너 불구경인 줄 알았더니 우리 집 앞 맹견이었다 이 말이죠.”

지창태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그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옆에 있던 장남 지도석이 선수를 쳤다.

“말씀이 심하시군요. 저희 지산이 타격을 입은 건 맞지만, 일개 7급 공무원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재벌이라는 이유로 국세청의 타깃이 되었던 것뿐이에요. 그 대상이 다른 곳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재수 없게 저희가 걸린 겁니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조곤조곤 따지는 지도석에게 성화의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국세청에게 당한 거라면 기업의 비애라고 포장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명의 공무원 때문이라면?

방만한 경영의 책임을 물어 당장 총수 일가 전체가 일선에서 물러나야 마땅한 일이다.

그만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일이었다.

“저도 솔직히 처음엔 그냥 국세청이 미쳐 날뛰는 건 줄 알았어요. 특히 그 중부청장 말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얘기가 좀 있더라고요. 저희도 조사해 봤습니다.”

성화의 회장은 다른 기업의 참석자들에게도 들려주듯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지산을 고른 이유가 다름 아닌 신재현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얘기는 꽤 많이 퍼져 있는 루머인지 다른 회장도 맞장구를 쳤다.

“저도 들었습니다. 지산에 신재현의 형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가 지산으로 장가갈 때 회장님의 실수가 있었다고요. 그래서 지산에 복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창태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실수?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겁니까? 이 늙은이가 뒷방 신세가 되었다고 해서 우습게 보이나 봅니다.”

협박에 가까운 일갈에 몇은 겁을 먹었으나 몇은 평온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

지금 지창태의 취급은 그랬다.

-장남의 힘으로 지산은 재기가 가능하겠으나 향후 몇 년간은 원래 위치를 되찾긴 힘들 것이다.

-장남 지도석에게는 지창태만 한 카리스마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평온하게 회사를 물려받았으면 모르되, 현재의 위기상황에서 지산을 반석에 올려놓을 만한 위인은 아니다.

각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분석한 보고서의 내용이었다.

다만 상처 입은 맹수에게 다가가면 물린다는 생각으로 이들은 몸을 사렸다.

“진정하세요, 지 회장님. 제가 늙어서 말실수를 했다고 칩시다. 중요한 건 그 애송이 아닙니까.”

“지금 내게 대화를 청하러 온 건지 싸움을 걸러 온 건지 모르겠군요. 내가 왜 그 애송이 얘기를 해야 합니까?”

“그야 방직으로 시작해서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지산을 대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은 지창태 회장님이시니까요. 그깟 공무원 얘기는 안줏거리로 삼을 분 아닙니까.”

오랫동안 아는 사이다 보니 성화의 회장은 지창태를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이 화제를 피한다면 말 그대로 그 애송이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 된다.

지창태는 이를 갈며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래요. 얘기나 해 봅시다. 나는 감히 우리 지산을 건드린 자를 가만 두지 않아요. 선봉에 섰던 중부청장은 내가 앞길을 막았습니다. 그가 오르려 했던 나무는 이제 영원히 그를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고, 말로는 불명예스러운 퇴직이 될 겁니다.”

국회의원에게 먹인 돈이 있으니 절대 국세청장은 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의 온갖 치부가 전국에 까발려졌으니 편히 은퇴하진 못할 것이다.

지창태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은 모두 금방 알아들었다.

“하하, 지 회장님께서 드디어 털어놓고 말할 생각이 드셨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저희 기획실에서도 그렇게 분석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지산은 딸과 사위가 비리 혐의로 검찰 조사 중이라는 아주 큰 손해를 봤지만 사실 안정적인 후계 구도를 생각하면 그 둘이 없어지는 게 이득 아니었습니까? 더군다나 그 둘이 부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니까요.”

“이미 아는 얘기 말고 다른 걸 하시죠, 성 회장님.”

“알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저희 기획실에서는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지산이 받아들일 선에서 덤벼드는 행동력, 여론을 움직이는 능력, 물어뜯을 때의 기동력. 이건 단순히 중부청장이나 국세청장의 작품이 아닙니다.”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지창태를 두고 장남 지도석이 대신 대답했다.

“저희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중부청장은 단순히 버림말이라고요.”

“크, 역시 지산의 책상물림들도 그렇게 분석했습니까?”

성화의 회장은 신난 듯 테이블을 내리쳤다.

“제 개인적인 감은 이렇습니다. 이 모든 걸 계산한 움직임이 너무 정교해요. 대놓고 판을 짠 건 확실한데, 그 판 위에서 움직이는 말이 청장급이란 말입니다.”

“……정확히는 단순히 청장급을 말로 움직인 게 아니라 국세청 자체를 다루었죠. 뜻대로.”

“잘 알고 계시네. 그럼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알겠지요, 지 부회장?”

지도석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신재현, 그 뒤에 거대한 무언가가 암약하고 있다. 그걸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겁니다! 목적은 모르지만 거물급 인사가 그와 함께하고 있어요. 비단 국세청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재현이라는 놈을 얕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산이 얻어맞은, 어이쿠 실례.”

성화 회장은 일부러 실수한 척 지산을 약 올렸다.

“국세청의 전면전을 계기로 세세하게 뜯어보면서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지요. 신재현이라는 개인에 집중하면서 그가 세무공무원이 되었을 때부터 화제가 된 모든 건을 뜯어보았습니다. 그제야 답이 나오더군요.”

신나서 추론을 늘어놓는 성화의 회장을 향해 지도석 부회장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그저 거대한 장막의 끝부분만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재현은 그 장막의 칼날이죠.”

성화 회장의 결론에 몇몇 기업인이 뒤집어지는 소리를 냈다.

“너무 앞서나가신 것 아닙니까?”

“항상 최악의 수를 염두에 두는 건 이해하지만 제가 보기엔 과대평가입니다. 국세청 내부에서 파벌싸움이 치열했던 건 알고 있잖습니까. 그 과정에서 어부지리를 취한 자가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한 것은 극히 소수였다.

지창태는 항의하는 기업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이 없는 놈들은 내 앞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어. 벼락부자일 뿐이야. 미래를 논할 가치도 없으니 꺼져.”

말도 안 된다며 항의했던 기업인들이 지창태의 일갈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야 좀 얘기가 진행되겠네. 성화에서는 뒤에 누가 있다고 계산했습니까?”

“지산은요? 저만 모든 정보를 푸는 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쯧.”

둘은 서로 시선을 마주 보았다.

“국회의원?”

“의원 중에서 이 정도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는 건 대선 주자 둘밖에 없습니다.”

“그림자만이라면 다른 가능성도 있을 수 있지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뒤에서 권력을 노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우리 정보망에 걸리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요.”

“어차피 두고 보면 압니다. 내년 4월에 총선, 12월에는 대선입니다. 늦어도 내년 1월에는 정계에 모습을 드러내겠죠.”

“만약에 그런 자가 진짜 있다면 말이죠.”

두 대기업의 회장은 서로를 떠보며 의뭉스러운 눈길을 교환했다.

둘 다 서로를 잘 알았다.

흑막으로 의심 가는 유력한 사람이 있지만 그 이름은 절대 내뱉지 않았다.

이 자리의 다른 기업인들이 맨입에 정보를 주워가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쯧, 성화에서도 주시하고 있구만. 내가 뒷방 늙은이인지 정보력 확인하려고 왔나? 아직은 정정하다!

‘저 능구렁이 영감탱이 알면서도 말 안 하는 거 봐라.’

끝까지 둘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단 하나의 이름.

그것만 빼고 기업인들이 토론하기 시작했다.

“향후 정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자세히 봐야겠군요.”

“좋은 정보 얻어갑니다.”

두 회장은 기업인들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그래. 견제할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그사이 우리는 신재현과 그 뒤를 주시한다.’

여러 속셈이 엇갈리며 전국경제인의 모임이 끝나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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