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단 3일 만에 (2)
내가 서울청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을 때 두 명의 여성이 찾아 왔다.
다름 아닌 민도연과 다민이다.
몇 번 만나러 오겠다고 하길래 사양했더니 아예 1층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1층으로 내려가자 두 여성이 로비 한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도도도 달려왔다.
그리고 민도연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모든 인사를 생략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누가 볼까 두려울 정도로 민도연은 연신 감사 인사를 연발했다.
“그, 그만 하세요. 그렇게까지 감사받을 일은 아닙니다.”
“아니요. 제 목숨, 인생, 모든 것을 구해주신 겁니다. 평생을 신재현 팀장님께 감사하며 살아도 부족합니다.”
다민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원래 조금 불안정한 면이 있다고 했던가.
억울함과 분노를 자살 시도라는 방법으로 풀려고 했던 사람에게 내 선의는 그 이상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 이상의 인사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성실하고 착하게 산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
범법을 저지른 사람이 업보를 돌려받는 것이 옳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호언장담한 대로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모든 사람이 다 절 손가락질했을 때 다민 씨와 팀장님만이 제게 손을 내밀어 주셨어요. 저는 그때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팀장님에게 있어 저는 그저 지나가는 한 명의 관계자일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무너져가는 세계에 색채를 돌려주신 분이에요.”
배우라 그런지 표현이 남달랐다.
민도연의 저 수식어를 어떻게 받아쳐야 할까.
고민하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그러나 민도연은 딱히 내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팀장님께서 구해준 인생, 팀장님께 당당해질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게요. 우연히 TV를 켜고 절 보시더라도 부끄럽지 않도록 항상 생각할게요.”
“그렇게…….”
……까지 열심히 살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고 말하려다 나는 생각을 고쳤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 선에 선 사람을 축하해주기로 했다.
“잘됐네요. 응원하겠습니다.”
이것이 듣고 싶었나 보다.
민도연은 환하게 웃더니 연신 고개를 숙였다.
민도연은 입에 붙은 듯 수십 번이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아무리 그래도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라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두 분 소속사는 어떻게 됐어요?”
조사 과정에서 우연히 딸려 온 계약서를 보게 되었다.
노동법이 미친놈이라고 소리 질러도 무방할 만큼 어이없는 조항이 적혀 있었다.
애초에 계약 기간이 10년이라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된다.
흔히 말하는 노예계약 아닌가.
기획사가 탈탈 털렸으니 이 기회에 둘도 벗어나면 좋을 텐데.
그런데 다민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무슨 일 있습니까?”
다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돌아서려 했지만 절대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내가 추궁하듯 바라보자 민도연이 입을 열었다.
“세븐스타 소속 인원들은 전부 자숙기간을 갖게 됩니다.”
“……예?”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풀린 건 아닌 모양이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인데.
“방송사 차원의 권고예요. 세븐스타는 믿을 수 없다고. 저야 괜찮은데 다민 씨가 걱정이네요.”
“아니에요! 저도 괜찮아요! 어딜 가든 잘 할 수 있어요!”
다민이 내 걱정을 덜려는 듯 씩씩하게 대답했다.
“정말 세상엔 남의 인생을 쉽게 짓밟는 사람이 많네요.”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명함 하나를 꺼냈다.
원래는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잠잠해지면 주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 한번 찾아가 보세요. 미리 얘기는 해 뒀어요.”
다민이 명함을 받아들더니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건 HAN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명함이잖아요. 업계에서 알아주는 곳인데.”
다민과 민도연이 동시에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신재현 팀장님 대체 인맥이 어디까지 있는 거예요?”
“와…… 제가 유일한 연예인 인맥인 줄 알았는데! 혹시 팀장님 아는 연예인 수두룩한 거 아니에요? 이럴 수가!”
나는 얼른 오해를 정정했다.
“사촌 누나가 결혼했는데 신랑이 여기 엔터테인먼트 사장이거든요.”
“앗! 그 얘기 봤는데!”
다민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저, 정말 저희가 가도 된다고요?”
“물론 직접 협상은 하셔야죠. 저는 명함만 드릴 뿐이에요. 계약하실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두 분께 달린 겁니다.”
그렇게 말은 했어도 이것이 기회라는 것은 명백했다.
둘은 양팔을 번쩍 들더니 각자 내 팔 한 짝씩을 잡고 강강술래 하듯 빙빙 돌기 시작했다.
“우와아! 감사해요!”
“사랑해요! 신재현! 우윳빛깔 신재현!”
“오해할 만한 말은 하지 마세요, 으악! 잠시만요!”
다민이 뭔가 이상한 말을 외치길래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둘이 신나서 팔을 잡고 흔드는 통에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
신재현이 왔다간 날, 방송국에서는 긴급히 본부장 및 국장 회의가 열렸다.
천 PD가 예상한 대로였다.
방송국 전체가 들썩였다.
대낮에 시작한 전체 회의는 잠시 휴식을 가졌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전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한 각 국의 PD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부서 회의를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 각 본부에 공지가 걸렸다.
PD들까지 참가한 각국 회의가 열린 것은 오후가 되어서였다.
각자 촬영 스케줄이 있다 보니 감독이나 PD, 부장 등 제작 책임자가 한데 모이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국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말도 마세요. 정호명 그 개새끼…….”
차라리 막내 작가나 새끼 PD의 짓거리면 수습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걸린 것은 무려 예능국의 밥줄이라 할 수 있는 거물급 PD였다.
PD 혼자 날아가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일단 시청률 20%짜리 예능의 위태로워진다.
멀쩡하게 알박하고 있던 동 시간대 1위 자리를 내주는 건 당연한 수순.
거기에 방송국까지 관리감독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평소 악명이 자자하던 PD인지라 그만둔 스탭들의 증언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상황이었다.
[충격보도] 2천만 원이면 게스트? 유명 PD의 꽂아주기가 사실이었다.
이런 제목의 기사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떴다.
예능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방송사 신뢰도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아이씨, 이 미친 새끼가! 도대체 얼마나 해 처먹고 다녔는지!”
예능국 국장은 PD들이 모인 자리에서 책상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정호명 이 개새끼! 대체 왜 돈을 처먹어! 처먹기는!!!”
소리로 봐서는 국장의 이마도 무사하지 않을 법 했지만 차마 아무도 말리지 못 했다.
“지 혼자 죽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면 방송국이 폭파되게 생겼는데! 돈 처먹고 꽂아주는 방송국이 웬 말이야! 개국 이래 이런 대참사는 없었어!”
국장의 포효를 보며 PD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호명이 쓰레기인 걸 알면서도 시청률 잘 뽑는다는 이유로 놔둔 건 당신이잖아.’
어차피 예능국장 역시 사직서를 쓰게 될 것이다.
지금 이들의 관심사는 향후 어떻게 일을 수습할지였다.
“수습은 가능합니까? 어떻게 하기로 결론이 났습니까?”
결국 천 PD가 총대를 맸다.
국장은 한참을 혼자 머리를 찧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마가 시뻘게져 있었다.
“수습이 가능할 것 같습니까? 오늘 저녁 9시 뉴스에서 대국민 사과가 예정되어 있고, 정호명은 이 업계에서 퇴출될 겁니다. 그래도 시청자의 분노는 잠재우지 못하겠지요.”
“저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없습니까?”
“있어요. 국세청에서 정호명만 조사한 게 아닌 건 알죠? 예능인, 가수, 배우에 기획사까지 꽤 많이 건드리고 있던데.”
“그래도 묻어가긴 힘듭니다.”
“알아요. 묻어가자는 게 아니라, 앞으로 혹시라도 생길 사건을 방지하자는 겁니다. 모두 하차시키세요. 우리 방송사는 범법자는 TV에 내보내지 않는다는 방침으로 갈 겁니다.”
용서는 없다는 단호한 태도였다.
당연한 처사인지라 PD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뒤가 문제였다.
“정호명한테 정기적으로 돈 찔러 준 기획사가 세 군데더군요. 그 소속 아티스트도 전부 하차시키라는 결론입니다.”
“예에?”
천 PD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 말인즉슨, 세븐스타의 소속 가수인 다민도 하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건 너무한 처사입니다. 사장의 잘못에 소속 연예인들 앞길까지 막는 건 연좌제 아닙니까.”
“어쩔 수 없어요. 그들이 순전히 자기 힘으로 방송하는지 소속사 사장이 돈 찔러서 방송하는지 시청자들이 어떻게 구분하겠습니까. 전부 하차하는 게 깔끔할 겁니다.”
“말도 안 됩니다. 저희가 직접 컨택했고 골랐습니다. 그건 저희를 믿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위에서 결정한 사항입니다. 더 이상의 구설수가 나와서는 안 된다, 여지 자체를 차단하라는 뜻입니다.”
미친, 하고 어느 부장이 입 밖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누가 봐도 순전히 방송사를 위한 결정이었다.
여기서 강판당했다는 것 자체가 커리어에 심각한 오점이 될 텐데,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도 받아주지 않을 공산이 컸다.
“위에서 결정된 사항이니 저한테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뭐해요? 대체할 인원 찾으려면 바쁠 텐데. 얼른 나가 보세요.”
회의실에 모인 제작 책임자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방송 사고를 내지 않으려면 이들에게 지워진 짐이 막중했다.
“우리한테 똥 치우라고 떠넘긴 거잖아. 이게 무슨 본부장 회의야!”
“부장님, 목소리 좀 줄이세요. 참으셔야 해요!”
“지금 이게 참을 상황이야? 아이씨! 그러게 누가 그런 놈 감싸고돌라고 했어?”
분위기가 험악해지며 성격 더러운 PD 몇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으르렁거렸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국장이 잘릴 것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 제작 책임자들이 뒤처리를 하게 생겼으니 터져 나온 반발이었다.
“정호명 그 자식이 개차반인 거 다 알면서 쉬쉬한 거 아닙니까! 개 같아도 시청률만 나오면 장땡이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논란의 여지 없애겠다고 꼬리 자르기 하면, 방송 짤리는 애들 인생은 어쩌고 급하게 땜빵 구하는 우리는 어쩌라고요!”
“아, 어쩌라고요! 불만 있으면 사장이나 본부장한테 가서 말하라고요!”
흥분한 사람들로 회의실이 시끄러워졌을 때,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더니 천천히 국장에게 다가갔다.
예능국장은 남자를 보더니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본부장님!”
목소리가 높아졌던 사람들도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본부장은 회의실 안의 참상을 보고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더니 국장의 옆에 가서 섰다.
“긴급 전달입니다. 국장이 전한 방침, 그러니까 혐의 없는 무고한 아티스트의 하차는 없던 일로 합니다.”
“……네? 본부장님 그게 무슨…….”
갑작스럽게 손바닥 뒤집듯 바뀐 방침에 국장 뿐 아니라 PD들도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싸우던 원인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본부장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일부러 구두 전달하는 이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한울 그룹에서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방송사에서 PD의 관리감독을 사과하고 반성하진 못할망정 무고한 방송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면 앞으로 믿고 광고를 맡길 수 없다고요.”
한마디로 물 흐린 PD와 소속사 때문에 애꿎은 소속 연예인들 피해를 보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만약 강행하겠다면 한울 그룹이라는 대기업에서 광고를 빼겠다는 것이니 방송사에서 한 수 접을 만도 했다.
다만 이제 이들의 의문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한울이 대체 이번 사태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데 이렇게 막는 겁니까? 단순한 선의는 아닐 테고.”
“멍청한 정 PD 놈한테 돈 찔러준 기획사 중에 세븐스타라고 있죠? 거기 출신 연예인 둘이 한울 막내아들 기획사로 옮겨갔답니다.”
“아…….”
국장과 PD들의 한숨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둘만 하차 못하게 막으면, 대기업이 방송사에 압박했네, 어쩌네. 말 나올 테니까 다 하차 못하게 막은 거예요. 뒷얘기는 여기 까집니다. PD, 감독님들은 걱정 마시고 촬영으로 복귀하십시오.”
“아……!”
제작 책임자들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탄성을 터뜨렸다.
“기업이 방송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정말 싫어하는데 이번엔 고맙네.”
“한울 만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책임자들을 뒤로 하고 본부장이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회의실 바로 밖 복도에는 한 남자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남자는 본부장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현명한 선택에 감사드립니다.”
본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턴 이런 식의 개입은 안 됩니다. 기업체가 방송사에 압력을 행사하는 건 좋지 않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느 분의 부탁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았을 거예요.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럼.”
한울 가의 내놓은 자식이었다가 이제는 한울의 품으로 돌아간 막내아들은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았다.
그 역시 이런 식의 압력을 좋아하지 않지만 쓸 땐 쓰겠다는 주의였다.
남겨진 본부장은 한울 가 막내아들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어느 분? 한울이라는 대기업을 움직이고 막내아들이 직접 일 처리를 할 만큼 막후의 그림자가 움직였다는 건가? 대체 왜? 우리가 그렇게 잘못했나? 뭘 건드렸지?’
본부장은 어떤 대단한 분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생각에 흠칫 몸을 떨었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오해가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