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29화 (229/500)

229화.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장의 발광은 황민우와 안길진의 노력으로 금방 진정되었다.

그는 사장실 의자에 힘없이 앉아 공무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절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건 세븐스타 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도 눈치챘다.

그들은 공무원을 도와 장부를 열어주고 컴퓨터를 조작하면서 슬쩍 눈짓을 했다.

‘이럴 줄 알았어. 사장도 저 꼴인데 거짓말하면 바로 들키지 않을까?’

‘어떡하지? 시킨 대로 해야 되나? 아, 사장 개새끼. 저러고 앉아 있으면 어떡해! 우리한테만 떠넘기고!’

직원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슬금슬금 눈치를 보자 신재현이 턱하니 사무실 중앙에 섰다.

직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아마 사장에게서 이런 지시를 받았을 겁니다. 민도연 씨가 평소 회사 통장에서 현금을 출금했으며 여러분은 그것을 목격했다고 말하라구요.”

세븐스타의 직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역시 다 알고 왔잖아!’

‘아니, 세상에 신재현을 속여먹을 생각을 하는 멍청이가 어딨냐고.’

‘망했다!’

그러나 신재현은 사실 여부를 직원들에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직원들이 예, 아니오로 대답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사장님 눈치 보느라 여기서 뭐라 대답할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저희 일을 도와주세요. 아시겠죠?”

“네, 네에.”

정당한 세무조사를 돕는 건 어차피 직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이미 사장의 지시도 다 알고 있는 마당에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직원들은 한층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무원들이 요청한 서류를 갖다 날랐다.

신재현이 슬쩍 눈짓했고, 그 사이를 붙임성 좋은 강혜원이 끼어들었다.

“마음고생 많으셨죠? 에휴, 저희가 조사하면 다 나오는데 생각이 짧으셨나 봐요.”

직원들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저 조용히 자료를 건넸다.

강혜원은 꾸준히 말을 걸며 동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원래 윗사람은 실무자의 고생을 몰라요. 그냥 말하면 다 되는 줄 알죠. 저희가 대충 통장 열어보니까 완전 개판이던데요. 어디 보자, 법인카드도 마찬가지네. 이거 직원들더러 알아서 장부 처리하라고 그랬죠?”

실무자끼리는 통하는 것이 많은 것이다.

특히 같은 주제다 보니 이야기할 것은 많았다.

“제가 조사 나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이런 거 보면 통장에서 막 대표가 천만 원씩 가져가잖아요. 그러면 어떻게든 가지급금 안 잡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여요. 어, 여기 현금조정까지 하셨구나.”

현금조정이란 경리 직원들이 마지막에 쓰는 최후의 수단 비슷한 것이었다.

통장과 정규 증빙을 맞추다 보면 통장에서 일단 돈은 나갔는데 원인은 모르는 돈이 있다.

[예금 인출 : 5,000,000]

-증빙 : 없음.

십중팔구 대표가 가져간 돈이다.

없는 영수증을 위조해낼 수도 없으니 실무자는 일단 통장에서 빼낸 돈이 사무실에 현금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장부를 꾸민다.

[현금 5,000,000 / 예금 5,000,000]

그러다 보면 장부에 현금으로 1억, 2억이 넘어가는 사태가 생긴다.

요즘 세상에 은행에 안 맡기고 현금을 뭉칫돈으로 들고 있는 회사는 거의 없다.

일용직 대금을 주느라 현금이 많이 필요한 건설사조차도 천만 원을 넘기는 일이 없다.

만약 장부에 현금이 억 단위로 남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세무서 : 장부에 손댔구나! 네이놈, 조사를 나가야겠다!

바로 세무서가 튀어나온다.

그러니 장부에 현금을 남겨 둬선 안 된다.

“프로그램에서 현금 예금 조정 버튼 누르면 가지급금하고 알아서 상계해 가면서 마이너스 안 나오게 분개 때려준다면서요. 이거 요즘에는 잘 안 쓰는 방법이라고 들었는데.”

프로그램 조작을 지켜보던 직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실제로 경리로 일하며 장부 결산까지 해 보아야 나올 수 있는 실무자의 말이었다.

“어, 어떻게 아세요? 요즘엔 공무원도 세무 프로그램 배워요?”

“저도 직접 다뤄 본 건 아니고 저희 팀장님한테 배웠어요.”

“팀장님이라면…… 아!”

직원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팀장님이 예전에 일반 회사 총무부에 계셨잖아요. 웬만한 꼼수는 다 알고 계세요. 그래서 숨겨도 소용없다는 말을 듣는 거예요.”

“아…….”

“대신에 실무자들의 고충을 잘 알고 계시죠. 장부만 딱 봐도 느낌을 잡더라니까요?”

“신재현한테 걸리면 그냥 자진납세 하는 게 가장 이득이라는 소문이 괜히 나온 게 아닌가보네요.”

직원들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장부에도 이상한 게 보인다고 하시던데요.”

“그야 이상한 게 많겠죠.”

직원들은 이제 술술 입을 열었다.

대놓고 회사에 불리한 것을 말하진 못해도 눈빛으로 알려 주는 식이었다.

어느 정도 직원들과 말이 트였다고 느낀 강혜원이 신재현에게 손짓했다.

신재현이 다가오자 직원들이 움찔했다.

“그렇게 겁먹으실 것 없습니다. 여러분이야 위에서 까라는 대로 까는 건데 설마 제가 여러분께 책임을 물을까요?”

“그렇죠. 저희도 정말 미칠 지경이에요.”

신재현이 앞장서서 회사를 욕했다.

“개인도 아니라 법인인데 자기 회사처럼 여기고 마음대로 돈 뽑아가고 그렇죠? 그래놓고 뒤처리는 할 생각도 안 해서 해마다 가지급금이 늘어만 가고.”

“맞아요, 맞아요!”

“가지급금 좀 줄여보려고 어떻게든 소액으로 쪼개보는데 영수증 없으니까 언제 조사 들어오면 법인세 터지겠구나, 걱정스럽고.”

“와, 역시 잘 아신다!”

직원들이 박수까지 쳐 가며 맞장구 쳤다.

이제 적어도 눈치는 보지 않을 정도로 텐션이 오른 상태였다.

신재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제게 무슨 말을 해 주셔도 회사를 배신하는 건 아닐 겁니다. 어차피 짐작은 하는데, 저희가 덜 헤매도록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힌트만 주셔도 돼요. 여기 이 부분.”

신재현이 통장의 어느 한 면을 내밀었다.

“매달 천만 원씩 정기적으로 뽑고 있네요. 그런데 방금 대충 계산해보니까 좀 안 맞아요. 금액이 꽤 큰데 뭘 샀다기에는 재산 현황이랑 들어맞질 않거든요. 이렇게 매달 뽑아 가는 건 딱 한 가지예요.”

신재현은 고개를 들어 직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말했다.

“누군가에게 돈을 갖다 주고 있다는 거죠. 누굽니까?”

앞서 대화의 물꼬를 트긴 했지만 그렇다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직원들이 머뭇거리자 신재현이 덧붙였다.

“차라리 부모님이나 애인이면 다행인데요. 관계자 자금 흐름 조사하면 나오거든요. 근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뇌물? 돈세탁? 페이퍼컴퍼니?”

직원들이 흘끔 사장실을 응시했다.

“말씀 안 해 주셔도 저희가 찾아낼 수 있어요. 다만 고생할 뿐이죠. 예를 들어 사장님 통화 내역을 뽑은 후에 그 명의자 통장을 일일이 훑는 거예요. 그중에 한 명은 매달 천만 원씩 공돈이 생기는 사람이 있겠죠? 하지만 행정력 낭비잖아요. 저희는 여러분 세금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인데. 조금만 도와주세요.”

신재현이 애처롭게 말하자 직원들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크, 큰일 났어요! 지금 건물 옥상에 민도연 선배님이 올라가 있어요!”

연습생 하나가 다급히 뛰어 들어오다 신재현을 발견하고는 흠칫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 신재현이다. 아니, 그게 아니고. 선배님이 뛰어내리려고 하고 있다고요! 다민 선배가 말리고 있어요!”

패닉에 빠진 사무실에서 가장 먼저 회복한 것은 신재현이었다.

“뭐해요! 빨리 119 신고하세요!”

“네!”

다음으로 정신을 차린 황민우가 핸드폰을 꺼냈고, 신재현은 곧바로 사무실을 뛰쳐 나갔다.

“이 회사 소속 연습생이죠? 옥상 안내해주세요. 그리고 장세훈 조사관님은 저 사장 새끼 좀 데려와 주세요.”

사장이라는 말 뒤에 욕설이 붙었지만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재현의 일갈에 멍하니 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선배님, 제발 이쪽으로 오세요.”

“다민 씨. 나 끝났어. 끝났다고…….”

옥상 난간 너머에 올라간 민도연을 보며 다민은 엉엉 울었다.

눈이 퉁퉁 붓고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소리를 지르고 또 질렀다.

“선배님! 제발요. 이런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잖아요!”

“오늘 뜬 기사 봤죠? 요즘 탈세하면 죄인이에요. 바로 드라마 감독님한테 전화 오더라고요. 기사 사실이냐고.”

“누명이라고 말하면 되잖아요!”

“이미 기사는 떴고 화제가 됐는데! 나중에 아니었다고 밝혀져도 그때는 늦어요. 이제 겨우 나도 빛을 보는구나 생각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민도연은 오히려 울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난간 너머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신 다민이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죽으면 끝이에요. 아무것도 없단 말이에요!”

“살면 고통이겠지만 죽으면 편해지겠죠.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사장한테서도 해방될 테고.”

“선배님 죽어도 그 나쁜 놈은 조금도 피해가 없을 거예요. 그냥 개죽음이에요! 선배니이임!”

“모르겠어요. 이제는 다 싫어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것뿐인데.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댓글을 읽는 순간 민도연은 마음이 찢기는 것을 느꼈다.

죽어라, 살 가치도 없다, 뻔뻔하다, 역겹다…….

진상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지는 추락했고 앞길은 막혔다.

도저히 헤쳐 나갈 자신이 없었다.

“선배님, 이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단 말이에요!”

“글쎄요. 권선징악?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말 아닌가요?”

민도연은 이제 다민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이제 여기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그때였다.

“그래도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음의 목소리였다.

사장의 것이라기엔 젊었고 힘이 있었으며 총기와 자신감이 넘쳤다.

민도연은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만 얼굴은 익숙한 청년은 굳은 얼굴로 다민 옆에 우뚝 서 있었다.

“조금이라도 살 만하게 만들기 위해서, 민도연 씨 같은 분이 억울한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민도연이 멍하니 신재현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 끌어 올리는 사람이라서일까.

아니면 목소리에 사람의 이목을 사로잡는 마법이라고 있는 것일까.

도저히 그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민도연이 멈추자 신재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다민을 일으켜 세웠다.

“걱정하는 사람이 있으니 죽지 말라는 식의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죽고 싶은 사람에게 그런 말은 위안이 되지 않겠죠. 그러니 약속드리겠습니다.”

신재현은 뒤를 가리켰다.

장세훈의 손에 반쯤 이끌려 옥상에 올라온 사장이 난간 너머의 민도연을 보고 흠칫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독기를 느낀 것이다.

“제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악하게 살아서 그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본인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신재현의 굳은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다민이 눈물 젖은 목소리로 애절하게 외쳤다.

“선배님,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신재현 팀장님은 믿을 수 있잖아요. 지금까지 나쁜 놈들은 다 때려잡은 사람이에요. 직접 조사하신댔어요.”

“신재현 씨가 직접……?”

민도연의 눈에 희망이 맴돌았다.

“제 눈앞에서 잘못 없는 사람이 죽는 건 못 보겠습니다. 민도연 씨는 그런 대우 받을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신재현이 한 손을 내밀었다.

“오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민도연이 홀린 듯 뒤를 돌며 난간을 붙잡았다.

다민이 눈물방울을 떨구며 총총총 달려가 민도연의 팔을 붙잡았다.

“흐어엉. 선배님, 진짜 무서웠단 말이에요.”

“미안해요…….”

민도연은 다민의 도움으로 난간 안쪽으로 넘어왔다.

급한 불을 끄자 신재현 뒤에서 깊은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따라 올라온 세븐스타 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사장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그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장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다급히 자리를 피했다.

“개새끼. 나쁜 새끼.”

“저런 새끼가 떨어져 죽어야 하는데.”

민도연이 비척거리며 다가오자 신재현이 다민에게 눈짓했다.

“다민 씨가 잘 돌봐 주세요. 사장 놈은 제가 철저하게 털 테니까.”

“팀장님만 믿습니다!”

다민은 퉁퉁 부은 얼굴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민의 부축과 함께 민도연이 계단 너머로 사라지자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아까 물어보신 건이요. 지금 말씀드릴게요.”

민도연의 소동이 심경의 변화를 가져온 걸까.

직원들은 앞다퉈 입을 열었다.

“매달 천만 원씩 빠져나간 거, 짐작하신 게 맞아요.”

“연예인이라는 게 결국 방송에 나가고 활동을 해야 뜨잖아요.”

“그래서 뒷돈 좀 찔러주는 게 있어요.”

“아마 방송국 PD한테 찔러줬을 거예요.”

직원들이 한 마디 한 마디 뱉을수록 신재현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 갔다.

“그러니까, 뇌물 챙겨 먹는 관계자가 있다는 거네요.”

“네네!”

“가만두면 안 되겠네. 모두 감사드립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신재현의 인사에 직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직원들이 내려간 후에 특수조사 2팀의 팀원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신재현의 분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신재현은 차분하게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았다.

지금은 발산할 때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세븐스타는 봐주기 없습니다. 먼지 한 톨까지 탈탈 텁니다. 그리고 방금 들으셨죠? 조사 과정에서 뒷돈 받은 방송국 관계자 흔적이 있는지 꼼꼼히 살펴 주세요.”

“넵!”

목표를 잡은 다섯 명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