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26화 (226/500)

226화. 연예계의 뒷모습 (3)

탈세.

예전엔 별 생각 없었지만 신재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후에는 세상에서 가장 경멸하는 말이 되었다.

세금을 낸다면 호구, 탈세하면 현명.

이제 자신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큰소리 쳐 줄 의욕도 있었다.

그런데 탈세를 했다니.

자진 납세 하겠다는 것인가?

‘내가 확 제보해 버려?’

다민이 의심과 경멸이 섞인 눈빛을 보내자 선배, 민도연이 재빨리 설명했다.

20대 초반에 독립영화로 데뷔해 지금은 주말 저녁 드라마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도 나오고 있는 앞길 창창한 여배우였다.

“아니에요! 나는 절대 탈세한 적이 없단 말이에요. 다민 씨도 알죠? 나는 항상 세무사가 내라는 대로 군소리 없이 다 내요.”

그러고 보니 다민이 세금에 대해 잘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조언해 준 것이 바로 눈앞의 선배였다.

애매하게 내고 나중에 탈세 소리 들으며 자숙하느니 차라리 많이 내는 게 낫다고.

그렇게 알려 준 사람이었다.

머리가 식고 차분히 생각해 보니 선배의 말도 이상했다.

-내가 탈세했대요.

자신이 했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들은 것 같은 말투였다.

“탈세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제가 잘 내는지 탈세하는지도 모르는데.”

세법을 모르는 건 자신이나 선배나 매한가지다.

공부도 못 하는데 세법을 언제 공부한단 말인가.

둘 다 세무사에게 모든 걸 맡기는 처지였다.

“저도 잘 몰라요. 근데 오늘 사장님이 그랬어요. 탈세로 신고했다고. 그동안 회사에서 횡령한 것도 다 포함해서 책임 물을 거라고.”

“선배님! 횡령했어요?”

탈세 다음으로 무서운 단어가 나왔다.

횡령.

다민이 사기와 동급으로 싫어하는 단어였다.

“내가 미쳤어요? 애초에 우리 회사 자금 결제는 사장님이 다 관리하는데 내가 무슨 수로 횡령을 하겠어요.”

“아. 맞다.”

이쯤 되자 오히려 다민이 궁금해졌다.

“대체 왜 그런 거래요? 그리고 변호사한테는 가 보셨어요? 저도 도와드리고 싶지만 이런 건 잘 몰라서…….”

선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민의 손을 잡았다.

“다민 씨, 신재현 팀장 알죠? 서울청에서 조사한다고 공문이 왔거든요. 신재현한테 좀 말해 주세요. 제가 아니라고. 저 억울해요!”

다민은 순간 움찔했다.

신재현의 일로 자신을 찾아온 건 좋았다.

겉으로 보기에 그만큼 친해 보인다는 뜻이니까.

너무 기분이 좋아서 이 맛에 사람이 인맥을 만드는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반대로 죄책감이 들었다.

안 그래도 적이 많은 사람이다.

돈과 싸우고 권력과 싸우는 사람이다.

그런 꼿꼿한 매력에 반한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잘 봐 달라는 부탁을 해 달라니.

마음 깊은 곳에서 거부감이 들었다.

“선배님. 제가 말한다고 들어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시잖아요. 아무리 좋은 조건의 부탁이어도 다 거절한다고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인데.”

“그, 그렇지. 미안해요…….”

선배는 단숨에 풀이 죽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짠해졌다.

“나도 참…… 마음이 급해서 눈에 뵈는 게 없었나 봐요. 미안해요. 다민 씨한테까지 폐를 끼쳐서. 못 들은 걸로 해 줘요.”

어깨가 축 처진 선배가 시무룩해져서 도로 차에 올라탔다.

다민이 얼른 조수석 창문을 통해 소리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신재현 실력만큼은 다들 알아 주잖아요. 선배님 억울하신 거 바로 알아볼 거예요. 신재현을 믿으세요!”

“그렇겠죠?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니까. 조사하면 제가 억울하다는 걸 알아주겠죠?”

“넵!”

조금은 홀가분한 표정이 된 선배가 떠나갔다.

멀어져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던 다민은 문득 불안해졌다.

자신은 신재현의 능력을 믿는다.

그러나 그건 신재현이 이 건에 착수했을 때의 일이다.

신재현을 제외한 다른 공무원들은, 과연 믿어도 되는 것일까?

권력자, 그리고 공무원에 대한 불신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장이 직접 탈세 제보를 했다니.

어려운 건 잘 모르는 다민이지만, 이번엔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재현한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볼 수는 없고…… 사장님한테 전화해 볼까.’

고민하던 다민이 사장에게 전화를 걸자,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민을 반겼다.

-어, 다민아. 너 지금 스케줄 없지?

“네? 네에.”

-그럼 사무실로 좀 와.

“저 내일은 새벽에 나가야 해서 좀 쉬려고 했는데요.”

-중요한 얘기야. 얼른 와.

사장의 말투는 강압적이었다.

곰곰이 생각했지만 사장에게 불려갈 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

혹시 방금 떠난 선배와 관련된 일인가 싶어 다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불안함이 맴돌았다.

***

며칠 전.

세븐스타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야! 민도연! 네가 뭔데 회사를 나가네 마네 해?”

“계약도 다 끝나가잖아요. 재계약을 안 하겠다는 것뿐인데요.”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이 그거잖아. 회사를 버리고 나간다고!”

“왜 자꾸 말을 그렇게 하세요. 저 계약 기간 다 채웠고, 그동안 열심히 일했어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없잖아요.”

사장과 소속 배우의 말다툼이었다.

나이 32살의 배우 민도연은 어느덧 10년 계약의 만료를 앞두고 있었다.

노예 계약이라 불릴 정도로 불합리한 계약이었고, 지금껏 계약이 끝나는 날만을 기다리며 참아왔다.

계약이 끝나면 옮기겠다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사장은 그것이 배신이라며 화를 냈다.

“너 무명일 때 데려와서 연습시키고 촬영장 데리고 다니면서 인사시키고. 내가 그렇게 해서 너 키웠어! 나 아니었으면 너 지금처럼 못 떴다고! 이제 좀 잘 나간다 싶으니까 단물만 쏙 빼먹고 버리겠다 이거잖아!”

“제가 언제 단물만 빼먹었어요! 저한테 오는 정산금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교육비라고 떼 가고, 연습비라고 떼 가고. 실비 명목으로 다 떼 가면 저한테 얼마나 주셨어요?”

“너한테 들어가는 돈이 그렇게 많은데 그럼 어떡하니. 너 옷 입고 이동하는 게 다 돈이야. 그렇다고 싼 옷 입고 나갈 수도 없잖아.”

“그렇다고 저한테 그 정산서 한번이라도 보여 준 적 있으세요? 제가 물어볼 때마다 항상 알아서 했다고. 그래서 믿고 맡겼잖아요.”

“알아서 했으니까!”

둘의 싸움은 격해졌다.

사장실 밖에 있는 사무실까지 목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였다.

사무실로 올라와 물을 마시던 연습생들이 깜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그래서 제가 한 번도 따진 적 없잖아요. 10억 벌면 그중 제 손에 들어오는 건 5천만 원도 안 됐어요. 그래도 참았다고요. 어차피 계약 기간 얼마 안 남았고, 사장님 말씀하신 대로 무명 때부터 함께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 일해서 갚아야지. 이제 겨우 뜨는 시점인데.”

“아뇨, 저도 바보 아니에요. 다 알아봤어요. 아무리 연예계가 더러워도 요즘 10년짜리 계약서 쓰는 곳 없어요. 전 계약 끝나면 나갈 거예요.”

“야! 민도연!”

이날의 싸움은 이렇게 끝이 났다.

민도연은 어차피 계약만 끝나면 이런 지긋지긋한 싸움도 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민도연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악랄한 사람은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지.

선한 사람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

사장은 바로 앞에 앉은 다민을 은근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사장은 인상이 워낙에 험악한지라 이렇게 말없이 노려보면 소속 연예인들은 금방 주눅이 들었다.

그렇게 기를 죽인 뒤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사장의 주 화법이었다.

다민처럼 순진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잘 먹혔다.

“사장님, 회사 분위기가 왜 그래요? 중요한 얘기는 또 뭐고요.”

“다민아. 내가 다민이 아끼는 거 알지?”

“예? 예에…….”

나왔다, 사장의 18번.

이런 말이 나올 땐 뒤에 항상 무언가 상식을 어긋나는 말이 따라붙곤 했다.

“내가 요 며칠 아주 큰 충격을 받았어. 우리 회사가 소속 연예인들한테 얼마나 잘해 주는지 알잖아. 무명 데려다가 손해 감수해 가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그런데 민도연이 배신을 했더라고.”

“선배님 나가시는 거요? 계약 끝났으니까 그런 거 아닌가요?”

“그게 아니야. 회삿돈을 사적으로 빼돌렸으니 문제지. 자, 봐 봐. 증거도 있어.”

사장은 다민 앞에 법인통장 출입금 내역을 보여주었다.

“여기 출금액은 민도연이 달라고 해서 정산해 준 거고, 이 영수증은 민도연이 실비라면서 가져온 거야. 우리가 6년 차부터는 연예인 개인이 쓴 실비는 참작해 주잖아. 근데 이 영수증이 다 가짜란 말이야.”

사장이 뭐라 설명했지만 다민은 알아듣지 못 했다.

그저 사장이 자신에게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민도연이 부당하게 회삿돈을 가져갔으니 계약 위반이고 횡령이라는 소리지.”

“그럼 탈세는 뭐예요? 왜 탈세했다고 하신 거예요?”

“횡령까지 한 애가 세금이라고 정상적으로 냈겠어? 그러니 당연히 탈세도 했겠지!”

사장이 탈세로 엮은 과정은 단순했다.

최근 공민화가 탈세로 업계에서 매장된 것을 보고 사람 인생을 조지는 데 이만한 것이 없겠다, 하고 떠올린 것이었다.

일단 세무조사가 나오기만 하면 된다.

조사하다 보면 먼지 정도는 나올 것이고, 이미지 하락은 피할 수 없다.

운 좋게 결과가 혐의없음으로 나온다 쳐도 그때까지는 죄인처럼 살아야 하니까.

“이 말씀을 저한테 해 주시는 이유가 뭐예요?”

“민도연이 조만간 찾아갈지도 몰라. 근데 다민이는 누구 잘못인지 구분할 수 있지? 괜히 민도연한테 속아 넘어가서 우리 회사가 어쩌네 하지 말고. 곧 탈세 조사도 나올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사장은 은근 눈치를 주었다.

“그러고 보니 다민이 신재현 좋아한다며? 돈도 안 되는 홍보대사 허락해준 것도 내가 다민이 생각해서 그런 거야.”

신재현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민은 움찔했다.

다행히 사장은 다민이 ‘좋아한다’는 말을 팬으로서 좋아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신재현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다민은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매일 ‘네’만 입에 달고 살던 다민이었지만, 닮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자 그에게 부끄러운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아졌다.

다민은 용기를 냈다.

“사장님, 좀 이상한데요.”

사장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지만 다민은 굴하지 않았다.

권력자들 앞에서도 당당한 신재현의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힘이 생겼다.

“통장에서 돈 나간 건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는 거잖아요. 이게 증거가 되나요? 그리고 영수증도 그래요. 우리 회사 방침이 언제부터 실비를 지원하는 걸로 바뀌었어요? 저희 총수입에서 실비 다 빼고 정산금 주시던 거 아니었어요?”

한번 입을 열자 억울함에 말이 술술 흘러 나왔다.

다민이 따박따박 따지자 사장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말싸움이라면 사장이 한 수 위였다.

“다민이 많이 컸네. 그래서 어쩌라고?”

“……네?”

사장이 당당하게 나오자 오히려 다민이 당황했다.

“내가 거짓말 했다는 거야? 민도연한테 누명 씌웠다고? 어디 나가서 그렇게 말해 봐. 다음에 횡령으로 고발당하는 건 다민이가 될 테니까. 이 회사의 모든 직원과 연습생이 네 잘못이라고 입을 모아 말할 거야.”

이미 매수가 끝났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회사의 모든 사람들은 사장 말이 사실이라고, 민도연이 회삿돈을 가져갔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사장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똑같은 불이익을 주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민은 새삼 벽을 느꼈다.

역시 그랬다.

세상은 착한 사람의 편이 아니다.

그리고 힘이 없으면 따져도 소용이 없다.

억울하다고 호소해도 그게 진짜인지 밝히는 것은 힘들다.

다민이 입을 다물자 사장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신 잘해야 해. 알지?”

***

신재현은 석양을 바라보며 주택가를 걸었다.

집으로 가는 골목에 석양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칼퇴했는데도 벌써 해가 진다.

10월에 접어들자 슬슬 해가 짧아지고 있었다.

이제 곧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달을 보며 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니, 나는 야근을 자주 하니까 별 차이가 없나?’

노을을 보니 감성적이 되었나 보다.

스스로 생각해도 쓸데없는 감상을 떨쳐내며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신재현의 집 대문간에 웬 긴 머리의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을 앞으로 내려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수정이니? 우리 집 열쇠 잃어버렸어?”

하도 자주 드나들다 보니 어머니가 아예 친척 동생 신수정에게 집 열쇠까지 맡긴 참이다.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있으니 가출 청소년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처량함이 퍼져 나왔다.

“야. 너 열쇠 잃어버렸다고 침울한 성격 아니잖아. 장난하지 말고 후딱 들어가.”

신수정의 장난인 줄 안 신재현은 앉아있는 여자의 팔을 툭툭 쳤다.

때문에 의문의 여성이 고개를 들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아악!”

아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장난을 쳤는데, 막상 그 사람이 완전히 남일 경우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신재현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 다민 씨. 안녕하세요. 여기서 뭐 하세요? 저희 집은 어떻게 아시고…….”

네가 왜?

이분이 왜?

여길 왜?

신재현의 머릿속에 혼돈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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