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연예계의 뒷모습 (1)
단합대회의 효과는 알게 모르게 조용한 곳에서 나타났다.
내가 복도를 걷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이 눈인사를 하기도 하고, 속은 좀 괜찮냐고 안부를 묻기도 했다.
“저번 주 풀로 연차 쓰셨다면서요! 부럽다!”
“연차 쓰긴 했는데 마음껏 놀지는 못했습니다. 월요일은 누워서 하루 종일 꼼짝도 못했어요.”
“아, 술병 나셨구나! 오늘은 괜찮으세요?”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어? 신 팀장님! 뒤풀이 자리에서 춤췄다면서요! 아, 그걸 단합대회에서 하시면 어떻게 해요! 다음에 회식 때 꼭 갈 갈게요! 기대합니다!”
“아악! 아닙니다! 상상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대체 누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전에 일하던 세무서 과장님이요. 아주 재밌었다면서요.”
이런 인사는 사절이다!
대체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뒤풀이에 오지도 않은 사람들이 그날 있었던 일을 아주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가긴 했었다.
그날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시다 보니 취기가 빨리 올랐다.
천천히 마시면 2병 반에서 3병까지는 버티는데 뒤풀이 때는 2병 정도 마신 시점에서 맛이 갔다.
어느 서장님이 술에 취해 트로트를 부르던 테이블을 지날 때였다.
얼큰하게 취한 서장에게 붙잡혀서 반강제로 춤추기 시작했는데 추다 보니 이게 또 재밌는 것이다.
결국 흥에 취한 다른 서장들까지 합류해서 식당 앞마당에서 한바탕 춤사위가 벌어지고 말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어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아,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풉, 안녕하세요. 팀장님.”
방금 지나가던 직원도 소문을 들었나 보다.
웃음을 참으며 인사를 건네는 이름 모를 직원을 향해 나는 쓰게 웃으며 묵례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아니면 그날 참석자를 모조리 모아서 최면이라도 걸고 싶다.
진심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회의실에 들어섰다.
먼저 와 있던 권현아 팀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서열상으로 따지자면 우리의 자리는 말석 중에서도 말석이다.
아마 오늘 회의 참석자 중에서 나보다 더 말석은 없을 것이다.
신임 서울청장 민치호가 여는 국장급 대회의.
원래라면 우리는 발도 들일 수 없는 곳이었지만 청장 직속 TF팀의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이다.
“신 팀장님이 그렇게 술을 잘 드시는지 몰랐습니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입니다. 제가 너무 추태를 부렸죠.”
“그럴 리가요. 다들 즐거워하시던데요.”
권현아는 위로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망했다.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게 분명하다.
국장급 회의에서 어떻게 상급자들 얼굴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
방법은 하나다.
없는 사람인 척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고 앉아 있자 참석자가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민치호가 상석에 앉음과 동시에 회의가 시작되었다.
오늘 회의는 민치호가 청장이 된 후 내가 처음으로 참가하는 회의였다.
민치호는 서울청의 모든 것을 파악하겠다는 기세로 각국의 현 상황을 자세하게 캐물었다.
말로 떠들기 곤란한 건은 청장에게 보고서가 전달되었고 공개 가능한 건은 즉석에서 청장의 방침이 내려졌다.
“재산과에 큰 건 하나 있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납세국장님.”
“두 건입니다. 하나는 마무리했고 나머지 하나가 문젠데 법인세과와 연관되는 건입니다.”
“대기업 총수가 사망했나요? 그런 뉴스는 못 본 것 같은데요.”
“상속을 대비해 주식 지분 변동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대비는 해야겠군요. 법인세과에서 해당 기업을 주시해 주십시오. 혹여라도 지분 이전 과정에서 이익의 증여가 있는지 봐 주십시오.”
“네.”
전임 청장인 오낙현과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오산이었다.
민치호는 세심하게 하나하나 챙겼다.
청장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그런 것인지, 민치호의 성격인지는 잘 모르겠다.
“저희 조사 4국에서도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음?”
4국장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처음이기에 민치호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조사 4국이라면 원래 염라대왕 타이틀을 갖고 있던 유서 깊은 부서다.
지금이야 언론에서 나를 국세청의 저승사자네 뭐네 하면서 추켜올려 주지만, 원래는 4국이 바로 그런 취급을 받던 부서였다.
일명 기획세무조사라 불리는 특별 세무조사를 취급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온갖 관심이 다 쏠리는 바람에 조금 묻히는 경향은 있지만 조사 4국은 조용히 그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보고서를 봐 주십시오.”
국장 중에서는 젊은 축에 속하는 4국장이 민치호 앞에 놓인 보고서를 가리켰다.
민치호는 조용히 종이를 넘기더니 흐음, 하고 침음성을 내뱉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조사 대상 중에 민감한 사람이 있군요.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청장님의 고견을 듣기 위해 올린 것입니다.”
“좋습니다.”
원래도 근엄한 인상이었던 얼굴이 더더욱 험악하게 보였다.
민치호에 대해 잘 모르는 권현아가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저 정도면 그냥 생각에 잠긴 것에 불과하다.
진짜로 화를 내면 이선균마저 그 앞에서 웃지 못할 정도라고 하니까.
“제가 대부분은 커버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내가 판도라의 상자나 다름없는 높으신 분들의 탈세 명단을 수집했을 때와 비슷한 대사였다.
민치호는 자신이 감당 가능한 선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그 앞에 놓인 종이에 빠른 속도로 체크 표시가 생겼다.
“지금 제가 표시한 것들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건입니다. 무슨 뜻인지는 아실 겁니다.”
민치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조사 4국장에게 향했다.
그러나 4국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중에서 제가 포기해야 할 사람은 없는 겁니까?”
국장들의 시선이 쏠렸다.
나름 돌려 말한다고 하긴 했지만 저건 한마디로 ‘손대면 안 되는 성역이 있느냐’는 질문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보면 청장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자 성역이라는 민감한 부분을 찌르는 것이기도 했다.
민치호는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못 칠 사람은 없습니다. 다 치세요. 다만 알죠? 신중하게, 절대 밖에 새어나가지 않게.”
“……알겠습니다.”
4국장이 민치호를 바라보는 눈빛이 바뀌었다.
별 관심 없어 보이던 무심한 눈빛에서 놀라움과 존경이 섞인 것으로.
대체 어떤 이름이 실려 있길래 저러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심 반성했다.
우리 팀이 워낙에 거물을 때려 와서 다른 조사국은 몸을 사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그들도 우리 팀 못지않게 일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조사 2국.”
“넵, 청장님.”
국장 대신 참가한 조사 2국의 과장이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대답했다.
올해 조사 2국장이 내부정보 유출 혐의로 보직 해임된 후 마땅히 데려올 사람이 없어 과장이 대리하던 참이었다.
“지금 기획하는 건, 감당할 수 있습니까?”
민치호가 날카롭게 물었다.
저렇게 말한다는 건 현재 2국이 손대고 있는 건 또한 민감한 건이라는 뜻이다.
과장은 민치호의 질문에 흠칫하더니 슬금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특수조사팀 중 하나에 협력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둘 중 하나라고는 했지만 현재 손이 비는 것은 우리 팀뿐이다.
부산청의 출장 후 아직 큰 건을 맡지 않았으니까.
1팀은 내가 알기로 어느 공기업체 하나를 조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 팀, 정확히는 나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확실히 까다로운 건이 맞는가 보다.
“이걸 말입니까?”
민치호는 2국에서 올린 보고서를 집어 들더니 나와 권현아에게 동시에 손가락을 까딱했다.
와 보라는 뜻이다.
서둘러 상석으로 가자 민치호는 우리 둘이 잘 볼 수 있게 서류를 펼쳐 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검토하십시오.”
공적인 자리라 그런지 민치호는 우리 둘에게도 경어를 썼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보고 결정할 것을 독촉했다.
조사국에서 진행 중인 건이니 복사하거나 가지고 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저, 청장님. 저는 사실 조사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요. 여당 국회의원의 아들…….”
나는 목소리를 낮춰 청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지난 9월에 지역 조사를 하면서 만난 공무원, 박원형이 부당하게 지역 서로 좌천된 이유가 바로 그 아들이기도 했다.
그 이름 석 자를 말하자 청장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됩니다. 호랑이를 잡는데 몽둥이 하나만 들고 나갈 순 없잖습니까. 만반의 준비가 필요해요. 신 팀장이 덜 다치기 위함입니다. 나중에 판을 깔아 줄 테니 그걸 기다려요.”
민치호의 약속이라면 믿을 수 있다.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
국회의원 아들놈은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나는 청장이 시키는 대로 테이블 위의 기획서를 훑었다.
슬쩍 살펴보니 뭔가 익숙하고도 특이한 이름이 많았다.
정치인?
아니, 이건 연예인 이름이다.
내가 고개를 들어 민치호를 바라보자 민치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확실히 눈앞이 지직거리며 레이어가 겹쳐지듯 미세한 숫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세한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닌지라 숫자가 선명하지는 않다.
그래도 분명히 탈세액이었다.
확실히 상대가 연예인이라면 부담이 느껴질 것이다.
물론 이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2국이 처리하기에 벅차서 나를 끌어들이는 것이니까.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국장의 궐위로 2국의 체제가 불안정해진 데는 내 책임도 있고 서로 돕고 사는데 이런 것쯤은 해줄 수 있으니까.
오히려 내 이름값을 이용해서라도 탈세범을 치겠다는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어떻습니까?”
민치호의 질문에 권현아는 살짝 난감한 얼굴을 했다.
아마 현재 진행 중인 건이 있으니 그럴 것이다.
2국 과장의 표정도 그렇고 분위기 상 어차피 내가 맡아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기획서를 들어 올렸다.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권현아가 살짝 옆으로 비켜 주었고 민치호 또한 가만히 내가 살펴볼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한 부분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음?”
“뭔가 이상한 게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회의실의 모든 국장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2국장 대리로 참석한 과장의 얼굴에는 불안한 빛이 서렸다.
겨우 팀장급에 불과한 내 말 한마디가 큰 파급력을 가지게 된 것을 새삼 실감했다.
나는 대답 대신 2국 과장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세 번째 장 말입니다. 이 대상은 어떤 경위로 조사하게 되신 겁니까? 수시조사에서 걸렸나요?”
“음, 아닙니다. 사실 제보가 들어왔어요.”
“제보요?”
“네. 내부자의 탈세 제보였습니다. 바로 저희 2국으로 넘어와서 조사에 착수했죠.”
“……제게 이걸 맡겨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제보 건을요? 혹시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과장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는 서둘러 그를 안심시켰다.
“아닙니다. 다만 여기 조사 목록에 오른 연예기획사가 좀 마음에 걸려서요.”
“세븐스타 엔터테인먼트 말입니까? 그게 왜…… 아!”
과장이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세븐스타는 다민 양의 기획사기도 하군요. 저는 그 뒷장의 배우들을 맡아주셨으면 했는데요.”
응? 다민이 세븐스타 소속이었나?
나는 연예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서 과장의 말에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뒷장을 다 맡기엔 조금 부담스럽고 세븐스타랑 뒤에 두 명만 맡겠습니다.”
“위에서 두 명이요?”
“네. 그 두 명.”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과장이 원하는 두 명이란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유명 배우였다.
뭐 그 밑에 있는 이름도 거의 유명인이긴 했지만.
내가 맡는다고 하면 언론에서도 국세청을 괴롭히지는 않겠지.
그런 과장의 계산이 보였다.
“그럼 분담은 끝난 것 같군요. 조사 2국과 특조 2팀은 이후 나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합니다.”
“네, 청장님.”
“네.”
나는 청장이 내준 기획서를 들고 다시 권현아와 함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왜 그리 크지도 않은 세븐스타를 골랐는가, 하는 국장 몇의 의아한 눈빛이 내게 꽂혔다.
2국 과장은 다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실상은 다르다.
세븐스타 엔터테인먼트.
내게 보이는 숫자는 억 단위.
그리고 탈세 제보를 받아 조사에 착수했다는 대상자의 이름에는 기껏해야 수십만 원의 적은 금액이 스칠 뿐이었다.
탈세 제보까지 들어왔는데 혐의자가 깨끗하다?
어쩐지 냄새가 풍겼다.
뭐, 2국도 조사하다 보면 탈세 혐의자가 사실은 무고하다는 것을 밝혀내겠지.
그래도 생각하긴 싫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다.
더불어 나는 딱 보면 아니까 조사도 빠르고.
억울하게 몰리는 사람은 하루하루 몰리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을 테니까.
하루라도 빨리 조사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흐흠.”
절대 다 알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과장의 말처럼 다민 때문에 고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해명하자니 모양새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나는 헛기침과 함께 기획서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