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단합대회 (3)
“오오! 올해의 체납세액 1위인 세무서와 징수세액 1위인 세무서의 줄다리기입니다! 신재현 팀장은 어떻게 보십니까?”
“오른쪽에 덩치 좋은 분들이 많이 포진해 계시네요. 오른쪽이 어디죠? 저는 이쪽 세무서에 한 표 드리겠습니다.”
“체납세액 1위를 응원하시겠답니다! 응? 체납세액 1위 아니라는 항의가 들려오고 있네요. 오른쪽 거기 서초 세무서 아니에요?”
“대진표 보겠습니다. 아, 오른쪽이 삼성 세무서네요. 이 대회 1년 전에 했으면 제가 저기 있었겠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지금 서초와 삼성 양쪽에서 항의가 들어오고 있네요. 어허, 알고 있어요! 그쪽에 세수가 많아서 체납도 많은 거! 내가 작년에 서초 세무서 과장이었어!”
“제가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작년에 삼성 세무서가 체납세액 징수 비율이 역대 최고치를 찍었습니다. 아주 자랑스러운 세무서죠. 응원합니다!”
“아, 신재현 팀장이 해설에 너무 적응해 버렸어요. 이런 노골적이고 편파적인 응원, 저는 좋아합니다.”
“물론 상대하시는 도봉 세무서도 좋아합니다. 조사 3국에 저희 팀 자주 도와주시는 조사관님이 한 분 계시는데 도봉 서 출신이거든요. 아주 온화하고 좋은 분들입니다. 도봉 세무서.”
“아, 이렇게 노골적인 아부 가나요! 앞으로 편안한 사회생활을 해 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응원이었습니다.”
단합대회는 경기 반, 신재현 놀리기 반으로 진행되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 오후 경기가 끝날 때쯤 되자 간식을 먹으며 잡담하는 사람, 조는 사람도 늘어났다.
집중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때 의외의 인물이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어? 다민이다!”
“뭐야! 다민이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17살에 아이돌로 데뷔하여 현재는 왕성한 솔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가수, 다민이었다.
두어 달 전, 서울청에서 표창 받은 모범 납세자이기도 했다.
“으와아아-!”
“미쳤다! 미쳤어!”
“다민 만세!”
“사랑해요, 청장님!”
순간 자던 사람도 놀라 깰 정도로 곳곳에서 우레와 같은 환성이 터져 나왔다.
반대로 나이 지긋한 직원들은 현실적인 걱정에 빠졌다.
“예산 오버 아니야?”
“감사에 걸릴 텐데.”
“이거 뉴스 뜨는 거 아닐까?”
다민은 운동회에 어울리는 편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걸어 들어왔다.
신재현을 놀리는 데 여념이 없던 해설자 과장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게 뭔가요, 청장님! 이런 말씀 없으셨는데! 깜짝 선물인가요!”
민치호는 마이크를 잡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호성이 잦아들고 열띤 눈빛이 민치호에게 꽂혔다.
“오늘 같이 좋은 날, 좋은 소식을 하나 더 발표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매우 감사하게도 여기 계신 다민 양이 저희 서울청의 모범 납세 홍보대사가 되기로 하셨습니다. 활동의 일환으로 오늘 우리 서울청 행사에 공연하러 와 주셨고요.”
민치호가 설명하는 동안 어느새 다민은 단상 위로 올라왔다.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신재현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다민이 청장에게 다가갔다.
“정말 감사하게도 오늘 공연은 재능 기부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오늘 참가하신 국세 가족 여러분께서는 내년부터 활동하실 홍보대사님을 미리 만나 뵙는 기회가 될 겁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듣기 좋게 재능 기부라고 한 거지 실상 무료 봉사나 다름없다.
설명을 들은 직원들이 저마다 함성을 내질렀다.
젊은 직원들은 그저 좋아서, 나이 지긋한 직원들은 예산 문제가 해결되어서였다.
민치호의 말이 끝나자 해설자가 신나는 얼굴로 마이크를 잡았다.
“바쁜 시간 쪼개 오신 거라 3곡 부르고 스케줄 가실 겁니다. 그러니까 한 곡 한 곡 놓치지 말고 들어주세요. 집에 가서 다민 양 뉴튜브랑 SNS에 좋아요 눌러 주는 거 잊지 마시고!”
단상 위에 자리 잡았던 민치호와 해설자가 내려가자 신재현도 얼른 따라서 단상을 내려갔다.
다민이 아쉬운 얼굴로 계단을 응시했다.
***
다민은 무료 공연임에도 온 힘을 다해 불렀다.
노래를 업으로 삼은 프로로서 페이가 없어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사실 바로 아래에서 듣고 있는 사람 때문이기도 했다.
두 달 전 모범납세자 표창식에서 처음 본 후 어떻게든 국세청으로 들어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사이 청장이 바뀌어 홍보대사 얘기가 엎어질까 노심초사했다.
그렇기에 서울청에서 단합대회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다민은 잽싸게 서울청에 연락을 넣었다.
당연히 국세청의 예산 상황으로는 다민 같은 비싼 가수는 부를 수 없다.
그래도 좋았다.
신재현을 볼 수 있다면.
다민은 열악한 마이크 환경에도 감정을 담아 열창하며 흘끔흘끔 단상 아래를 곁눈질했다.
살짝 벌어진 입, 멍하니 풀린 눈.
무대에 서다 보면 종종 보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노래에 집중하고, 또 좋아해 주는 청중의 얼굴이다.
그 얼굴이 좋아 무대에 서는 것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했다.
자신의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이 바로 신재현이었으니까.
‘내 라이브 듣는 건 처음인가?’
신재현의 놀란 듯한 얼굴에 다민은 뿌듯함을 느꼈다.
이것만으로도 오늘 온 가치가 있었다.
다민은 더욱 신나서 노래를 열창하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고음도 평소보다 편안하게 뽑혀 나왔다.
다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성공적이라고 자부할 정도의 무대였다.
그리고 단상 바로 밑에서 다민의 무대를 지켜보던 민치호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다민을 봤다가 신재현을 봤다가.
그러고서 히죽 웃었다.
민치호를 아는 사람이 봤으면 놀랄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날씨는 가을인데 봄 향기가 나는구나.”
“네?”
민치호의 혼잣말에 반응한 것은 해설자를 맡은 과장이었다.
“저 둘을 보세요. 둘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 다민 씨가 자꾸 이쪽을 보길래 마이크가 좀 이상한가 싶었습니다. 흠, 이제 알겠네요.”
과장과 민치호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다민 씨가 내년부터 홍보대사라고요?”
“네. 오낙현 청장님께서 인수인계 때 신신당부하고 가시길래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이런 사정이 있었군요.”
“예산 문제도 있고 보는 눈도 있으니 단합대회를 내년에도 할 수는 없을 테고. 기회를 만들어 주시죠, 청장님.”
다민의 노래를 배경으로 민치호와 과장이 진지하게 토론했다.
“슬슬 7급 세무직 공무원 시험 치를 때 아닙니까. 겨울엔 연수원 갈 테고. 그때 부를까 싶은데요.”
“신 팀장은 강의하라고 부르면 될 거고 다민 씨는 홍보대사 활동이요?”
“어떻습니까?”
“물론 다민 씨의 의중을 물어봐야겠지만…….”
“당연히 당사자 의향이 먼저죠. 다민 씨가 좋다고 하면 할 겁니다.”
당사자의 의향이라고 말은 했지만 신재현에게 묻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물어봤자 일하느라 바쁘다며 극구 거절할 게 뻔한 것이다.
“그럼 대찬성입니다. 재밌을 것 같아요. 저도 그때 불러 주십시오.”
민치호와 과장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여전히 노래에 빠져 있는 신재현은 생각지도 못했다.
두 상급자가 신나서 그를 위한 특별한 계획을 짜고 있다는 것을.
***
다민은 예정에 없던 곡을 두 곡 더 부르고 갔다.
단합대회는 성황리에 끝나고 직원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토요일을 신나게 놀았으니 다음 주 출근을 위해 일요일 하루는 푹 쉬어야 했다.
그리고 뒤풀이에 참가할 사람만 따로 식당으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하는 단합대회라서인지, 마지막 다민의 열정적인 무대 때문인지.
회식에 참가한 인원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200여 명이었다.
2층짜리 고깃집을 통째로 빌릴 정도였다.
“과장님, 일단 한 잔 받으시고요. 또 한 잔 더 받으세요.”
반포 세무서의 직원들은 약속한 대로 김명중 과장에게 술을 몰아주기 시작했다.
과장이 취하게 만들어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쯤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분위기 때문인지 김명중은 단 1병 만에 얼굴이 벌게졌다.
그의 주량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현이가 정기 발령이 아니었어요. 소득세과에 있었는데 느닷없이 과장하고 계장 모가지가 날아갔다는 겁니다.”
“한 과의 과장하고 계장이요? 웬만한 사건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아마 들어봤을 거예요. 2년 전 용산 세무서에서 있었던 일. 검찰에서 직접 서로 찾아와서 난리가 났었거든요. 근데 서장님 눈에 든 거죠.”
조금 풀어진 모습의 김명중이 저 멀리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신재현을 응시했다.
신재현은 한 군데 붙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한 테이블씩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새로 국장이 되는 사람도 저렇게까지는 인사하지 않는다.
이건 청장의 의지라 봐야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는 좀처럼 없다.
어떻게든 한사람이라도 더 눈도장을 찍게 하려는 청장의 의도가 느껴졌다.
물론 신재현 본인은 힘들겠지만.
김명중은 눈으로 신재현을 쫓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정기 발령이 아니라 중간에 끼어들어 오는 거니까 다들 자리 잡혀 있고, 파트너 붙여 줄 사람이 없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급하게 인원 조정하면서 혼자 일단 내보냈죠. 조사과에서의 첫 사건 때, 사무실에 발도 못 붙여 보고 현장 나갔습니다.”
“괴롭히는 줄 알고 오해했겠는데요.”
“아니, 그럼 급한데 어떡하나요.”
“잠깐만요, 과장님. 사무실 발도 못 들이고 현장 나갔으면 짐은 어떡했어요? 소득세과에서 조사과로 이동하면 개인 짐은 동료 직원이 갖다 줬나?”
“……제가 옮겼죠.”
“네?”
“조사과 사무실 문 앞에 놓고 갔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제가 옮겼어요…….”
“크하하핫! 이거 완전 과장님 스스로 무덤 파신 건데!”
김명중이 머쓱하게 웃었다.
부하 직원들이 박수까지 쳐가며 웃는 가운데 신재현이 그들의 테이블에 도착했다.
“즐겁게 대화하시는데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은 처음 뵙죠? 신재현입니다.”
“와! 우리한테도 오셨네!”
“어서 와요! 어서 와!”
뜨거운 환영에 신재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직원들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까 싶어 김명중이 먼저 말을 건넸다.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는 거야?”
“청장님 엄명입니다. 모든 테이블에 인사하고 오라시네요.”
“흐음, 그것만은 아니지?”
“……네.”
신재현은 손 밑에 숨겼던 소주잔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인사하면서 술도 주거니 받거니 하라는 뜻으로 쥐여 준 술잔이다.
“어후, 인사 한번 찐하게 시키시네요.”
한 테이블에 한 잔씩만 받아도 소주 몇 병이 아득히 넘어간다.
김명중은 다른 테이블에서 보이지 않도록 등으로 가린 뒤 맹물을 따라 잔에 채워 주었다.
신재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기도 먹고 가요.”
“아, 감사합니다!”
한 직원이 상추에 고기를 두 점 올리고 양파에 고추까지 야무지게 싸서 건넸다.
신재현은 반포 서 직원의 상추쌈을 입에 넣자마자 행복한 얼굴을 했다.
“아…… 살 것 같네요.”
그 후로도 신재현은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더 얻어먹고 자리를 떴다.
벌써 얼마나 마셨는지 빈 잔을 들고 다음 테이블로 향하는 신재현의 발걸음이 비틀거렸다.
“청장님 되게 엄하시네요.”
직원 하나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지만 김명중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청장으로 키우시려나 보죠.”
“예에? 7급으로 시작해서 청장이 가능한가요?”
“장난이죠, 과장님?”
김명중이 피식 웃으며 입을 다물자 직원들은 저들끼리 장난이라 생각하며 웃고 넘겼다.
그러나 김명중에게는 보였다.
청장이 신재현에게 시키는 오늘 이 자리가 어떻게 이어질지.
아마 과장급 이상의 직원들은 느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대기업으로 치자면 차기 총수가 될 재벌 2세를 임원에게 소개하는 자리와 흡사하다는 것을.
-휘청!
“으악!”
이동하다 발이 꼬여 양팔을 휘적거리는 신재현을 보며 화들짝 놀란 김명중이 옆 테이블에 소리쳤다.
“너무 많이 먹이지 말아요! 한 잔씩만 먹여도 5병 나오겠다!”
“아, 김 과장님. 걱정 마십쇼! 다들 알고 있습니다!”
옆 테이블 과장이 눈을 찡긋하며 사이다를 들었다.
신재현이 감사의 뜻으로 눈인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래. 너는 높이 올라가라.’
과장이 되고, 국장이 되고, 청장이 되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신재현의 풋풋한 시절을 이야기하며 즐겁게 웃고 떠들 수 있겠지.
김명중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