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22화 (222/500)

222화. 단합대회 (2)

“과장님! 신재현하고 아는 사이라더니 진짠가 보네요.”

반포 세무서 직원들이 모여 있는 천막 아래로 김명중이 들어가자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들은 저 멀리서부터 김명중과 신재현이 나란히 걸어 올 때까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던 참이었다.

“팀장님, 두 분이 어깨동무 하고 오시는 거 못 보셨습니까? 아는 사이 정도가 아니던데요.”

“과장님이 같이 일하셨다잖아. 거짓말하실 분도 아니고.”

“아니 솔직히 안 믿기잖아요. 신재현이 어리바리하던 시절? 그런 게 과연 있을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지. 근데 나도 궁금하다. 파릇파릇한 시절의 신재현.”

직원들이 너도나도 눈을 빛내며 덤벼들자 김명중이 헛기침을 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준비나 합시다. 괜히 놀러 왔다 다쳐서 가면 손해니까 몸 잘 푸세요.”

“에이, 과장님. 어차피 개회식 하면 준비운동 하니까 그때까지 얘기나 좀 해주세요. 국세청 레전드 1년 차 얘기를 어딜 가서 듣겠어요.”

그러나 과장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이쯤 되면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직원들이 아니었다.

직원들은 저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이따 집중적으로 술 드리죠.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야겠거든요.”

“아, 풋풋한 신재현 에피소드? 이건 못 참죠. 술자리 안주로 딱이다.”

“과장님 주량 세거든요? 집중 공세 가야됩니다.”

“좋습니다. 혜민 씨가 왼쪽에서 새 병을 따시면 제가 오른쪽에서 절대 잔이 비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콜!”

남 녀 할 것 없이 직원들은 과장을 술에 담그기로 의기투합했다.

“지금 당사자를 앞에 두고 계획을 짜는 겁니까?”

“들으셔도 상관없으니 그렇죠. 이따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한 직원이 눈을 찡긋하자 과장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반드시 도망가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

-지금부터 2022년 서울지방국세청 및 서울권역 세무서의 단합대회를 시작합니다. 놀러 온 거니까 편하게 즐기시고 모두 건강하고 재밌는 하루가 됩시다.

민치호의 짧은 개회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단상에는 의자가 딱 네 개 있었는데 그중 셋은 청장, 사회자, 해설이었다.

사회자와 해설 모두 9급으로 시작해 20년 가까이 일한 직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오랜 경력으로 직원들 얼굴에 통달한 마당발 취급받는 공무원이었다.

나머지 한 자리에 누구인가, 참석자들의 시선이 쏠리는 가운데 쭈뼛거리며 한 청년이 조심스럽게 단상으로 올라섰다.

억지로 떠맡은 마이크를 꼭 쥔 신재현이 어색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오르자 와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 올해 해설 도우미는 신재현이네!”

“신재현 힘내라!”

직원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박수를 쳐주자 신재현은 사방을 향해 연식 고개를 숙였다.

단합대회에 처음 참가하는 직원 하나가 슬쩍 물었다.

“해설이면 적어도 누가 어느 서 사람인지 알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 신재현 팀장님은 관할 서 직원들 다 알려나?”

“에이, 반평생을 세무 공무원 해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신 팀장이 어떻게 알겠어요. 진짜 해설하라고 앉혀놓은 건 아니고요. 약간 희생양 느낌인데…….”

“희생양이요?”

무서운 어감의 단어에 질문한 직원이 깜짝 놀랐다.

그러자 나이 지긋한 직원이 아차하며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장난 같은 겁니다. 신입 직원 중에 재밌는 친구 앉혀 놓고 놀리는 거죠.”

“흑역사 생성이네요.”

“흑역사가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저 자리가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 올해의 신인상! 그런 자리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긴 한데, 선배들 앞에서 젊고 가망 있는 친구가 눈에 띌 기회를 주는 거예요. 나쁘게 말하면 우리 같은 늙다리한테 재롱 좀 떨고 우리는 저 친구를 응원하는 거죠.”

설명을 듣던 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기업 신입사원 장기자랑 비슷하네요.”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옛날엔 그 해 기수에서 끼 있는 친구들이 자진해서 하고 그랬는데 악습이라는 이유로 한동안 안 했습니다.”

“그게 오늘 부활한 거고요? 근데 신재현 팀장은 신입 아니지 않아요?”

“그런 관습 없어진 지 오래죠. 오늘은 딱 그겁니다. 우리 중에 신재현 씨 모르는 사람 없잖아요? 이렇게 직원들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으니까 통과의례 거치고 넘어가라는 거죠.”

“어쩐지 판을 깔아 준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데요.”

“그게 맞을 겁니다. 신재현 씨한테나 우리한테나. 모르긴 몰라도 대회 끝나고 나면 신재현 씨 고깝게 보던 사람들도 많이 사라져 있을 거예요.”

“와, 엄청난 계략인데요.”

“그러니까 실컷 놀려먹으면 됩니다.”

“그거라면 좋아요!”

직원들이 가볍게 잡담을 나누는 동안 넓은 운동장에 각 서의 축구 동호회 회원들이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축구 경기를 오전에 해치워 버리겠다는 주최 측의 심리가 엿보였다.

“자자, 여섯 경기나 해야 하니까 급합니다! 잠실 세무서랑 용산 세무서 나와 주세요! 토너먼트고 15분씩만 할 거예요!”

행색은 조기축구회였지만 긴장감은 프로 경기 못지않았다.

“야! 쟤 언제 용산 갔냐? 어렸을 때 축구 배운 놈이잖아!”

“용산이 이기겠네. 한숨 자야겠다.”

천막 아래에서 간식을 까먹던 직원들이 응원을 보냈다.

단상 위의 해설자는 안방이나 되는 것처럼 마이크를 잡더니 좌우를 슥 훑었다.

그것만으로 이미 파악은 끝났다.

“용산이랑 잠실은 인연이 있죠? 서울청 감사관실에서 세무조사 하라고 서에 보낸 것 중에 한 사업자가 주소는 잠실, 사업자는 용산이었단 말이에요.”

한숨 자겠다고 누웠던 중년인이 상체를 일으키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심판마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단상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업자가 고지서 안 받고 잠적했는데, 제척 기간 마지막 날까지 연락이 안 닿아서 결국 말일에 용산, 잠실에서 각각 한 명씩 차출해서 저녁 11시 반에 납세자 집에 쳐들어갔다면서요?”

“아…….”

“저런…….”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반쯤 드러누운 중년인은 혀를 쯧쯧 차더니 도로 누웠다.

심판은 반대로 깔끔하게 해설자를 무시하고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공이 하늘로 날았다.

“한밤중에 함께 납세자 집 문을 두드렸던 동료가 이제는 적이 되었습니다. 아, 말씀드린 순간 용산에서 슈팅합니다! 빗나가네요. 납세자 집 문도 저렇게 두드리나요?”

정신없이 읊어대는 해설에 바로 옆에서 전전긍긍하던 신재현이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느낀 해설자가 신재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사냥감을 발견했다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신재현 팀장은 용산 세무서에서 일했죠? 어디가 이기면 좋겠습니까? 당연히 용산?”

신재현은 서둘러 마이크를 들었다.

“사적인 이유로 응원해도 됩니까?”

“당연히 되죠! 그렇게 말하니까 더더욱 궁금해지는데 신 팀장은 누구 응원합니까? 용산 아니면 삼성인가요?”

“저는 반포 응원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김명중 과장님!”

신재현은 손을 들어 올려 머리 위에서 크게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부드러운 내용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잔뜩 긴장한 티가 묻어나자 해설자가 껄껄 웃으며 신재현의 등을 쳤다.

“이야, 신 팀장이 사회생활 할 줄 아네요. 김명중 과장님, 축하드립니다. 부하직원에게 인망이 아주 깊으시네요.”

반포 세무서 직원들이 있던 천막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회색 티 차림의 김명중이 천막 앞까지 걸어 나오더니 엄지를 치켜 올렸다.

그 후로도 해설자는 경기는 보는둥 마는둥 하며 신재현에게 말을 시켰다.

오죽하면 신재현이 어깨너머로 배운 해설로 경기 현황을 읊을 정도였다.

“어, 방금 용산이 한 골 넣었는데요. 저, 과장님. 해설 안 하셔도 되나요?”

“에이, 저 아재들 경기 재미없어요. 안 봐도 돼. 나중에 결승이나 보면 됩니다.”

경기 중이던 두 서의 직원들이 야유를 터뜨렸지만, 해설을 맡은 과장은 손을 흔드는 것으로 불만을 종식시켰다.

“여기 있는 직원들도 신 팀장 개인사를 더 좋아할 겁니다. 정 신경 쓰이면 신 팀장이 중간 중간 해설해 주면 돼요.”

“네에…… 말씀드리는 순간 경기가 끝났네요. 용산 세무서가 1:0으로 이겼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으잉? 한 경기 끝났어요? 축하드립니다. 다음이 어디지? 양천하고 송파 세무서 준비하세요. 저는 그동안 우리 신 팀장에 대해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관심 감사드립니다…… 근데 웬만한 건 다 알려져 있어서 뭘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순간 해설자가 딱 걸렸다는 듯이 아예 신재현을 향해 돌아앉았다.

“이야, 이것이 바로 유명인의 품격입니까? 나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인터넷을 보아라. 자신감이 넘치네요.”

“아, 아닙니다! 연예인병 그런 게 아니라!”

신재현이 기겁하며 부인했다.

“우리 국세 가족 여러분! 잘 들으셨죠? 돌아가셔서 소문 잘 내셔야 합니다.”

“으악! 아닙니다!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다 물어보세요! 다 말씀드릴게요!”

신재현의 당황한 목소리가 운동장에 울렸다.

나이 지긋한 과장 및 국장급들이 박수까지 쳐 가며 껄껄 웃었다.

언제부턴가 자려고 누웠던 사람들도 벌떡 일어나 앉아 있었다.

“허락까지 떨어졌으니 오늘 우리 국세 가족들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받을까요? 오, 바로 문자가 왔네요. 어디 읽어 보겠습니다.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경기 시작해라.’ 응?”

해설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자 발신인을 읽었다.

“아, 심판이네요. 죄송합니다, 김 과장님. 그냥 알아서 경기 시작하시면 되는데요.”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경기 준비가 끝난 심판이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심판이 투덜대며 호루라기를 불자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여전히 경기는 뒷전이었다.

“신 팀장님. 오늘 혹시 또 응원하는 사람 없어요? 저기 과장님 말고. 오늘 팀원들 같이 안 나왔나?”

“쉬는 날이라 따로 부르진 않았습니다.”

“아하, 무슨 사정인지 알겠네. 청장님한테 끌려 나왔구만. 맞죠?”

“아, 그런 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나왔습니다.”

“자발적으로?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뭐 받기로 했어요?”

신재현이 슬쩍 반대편 자리에 앉아 있는 청장의 눈치를 봤다.

“조건 없이 다음 주 원하는 때에 연차 쓰기로요…….”

신재현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이실직고하자 해설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청장님, 유능하다고 마구 부려먹으시면 안 됩니다. 이러다 도망가면 청장님 책임이에요!”

청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알겠다는 뜻이다.

운동장을 빙 둘러싼 천막 밑에서는 서장과 과장들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단상 위를 지켜보았다.

“딱 아들뻘인데. 내 아들내미가 저놈 반만 닮았으면 좋겠네.”

“우리 서에 왔으면 좋겠는데요.”

신재현을 탐내며 입맛을 다시는 사람도 있었고.

“TV에서는 저승사자네 뭐네 그러더만 막상 보니까 친근하네. 인물도 준수하고.”

“두다다다 퍼부을 줄 알았는데 말투 보니까 인성 좋은 친구로구만. 누구야? 누가 신재현 싸가지 없다고 그랬어?”

“법인세과 2팀장님이요!”

“오늘 안 나왔나? 으이그, 내가 그 양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이미 축구는 안중에도 없었다.

가을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는 아저씨들의 모습은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냥 경기 빨리 끝내고 술 먹으러 갔으면 좋겠네.”

단합대회 다음은 당연하지만 회식이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 오늘 회식자리에서 가장 바쁘게 뛰어다닐 사람은 지금 단상에서 열심히 맞장구를 치고 있는 저 젊은이일 것이다.

“인사하러 오겠지?”

“청장님이 일부러 저기 앉혔는데 당연히 소개할 겸 돌아다니겠죠. 아, 서장님! 술 막 먹이시면 안 돼요! 요즘에 그랬다간 큰일 나요!”

부하 직원의 만류에도 서장은 회식자리를 상상하며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이런 일이 운동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오싹!

해설하랴, 옆에 있는 과장의 질문에 대답하랴.

바쁘게 입을 놀리던 신재현은 순간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꽤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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