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단합대회 (1)
벌써 10월이다.
밥 먹고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절로 하품이 나오고 눈이 감기는 계절.
일선 세무서는 부가세 준비로 슬슬 바빠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시즌을 잘 타지 않는 서울청 역시 언제나 그랬듯 바빠 보였지만 우리 팀만은 의외로 한가했다.
사실 한 달 가까이 출장 다녀온 팀에게 곧바로 일을 맡기는 파렴치한 상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사라고 해 봤자 우리는 청장 직속 팀이니 민치호의 배려다.
덕분에 한가한 일주일과 함께 국정감사도 얼추 마무리된 무렵.
한가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면.
-짹짹.
운동장 구석에 멍하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똑같은 하늘인데도 여름과는 확연히 달랐다.
내리쬐는 햇살이 무자비하게 사람들의 등을 떠미는 계절에서 겨우 한두 달 지났을 뿐인데 태양은 눈에 띄게 온화해졌다.
구름 한 점 없는데도 등이 축축하게 젖는 불쾌함은 없었으니까.
대신 머리통이 뜨거워져서 나는 한 발짝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서자 여름에는 맛볼 수 없었던 서늘함이 땅에서 올라왔다.
구름이 없어서 그런지 하늘이 확연히 멀어 보였다.
왜 가을이 놀기 좋은 계절인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왜 단합대회를 지금 하는지도.
-부웅.
내가 앉아 있는 운동장 저 멀리 있는 입구에는 지금도 버스가 들어와 사람들을 내려주고 나갔다.
바로 서울 지역 세무서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직원이 다 모이는 건 아니고 참가하고 싶은 사람만 참가한다.
서울에 있는 세무서가 총 28개고, 한 서당 30명에서 50명 정도 참가해서 총 인원은 약 1200명 정도라고 한다.
오늘 오지 않은 사람들은 국세청 지원으로 영화나 등산을 간다고 한다.
알아서 갔다 오고 영수증이나 사진만 인증하면 되는데 솔직히 나도 영화 보러 가고 싶었다.
민치호 청장에게 붙잡혀서 문제지.
사전에 참석자를 조사할 때 나는 부산청에 있어서 따로 참석 의사를 적지 못 했다.
그랬더니 매우 자연스럽게 참석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민치호 청장은 나를 불러서 달래듯 말했다.
-신 팀장이 우리 청 얼굴인데 빠지면 안 돼.
-……그냥 영화 보러 가면 안 될까요?
-꼭 봐야 될 거 있어?
-반지의 대왕 감독판이 풀버전으로 재개봉하거든요. 10시간짜리로.
청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당분간 바쁜 일 안 시킬 테니까 단합대회 끝나면 연차 써.
-넵.
어차피 연차가 많이 남긴 했으니 쓰게만 해 준다면 불만은 없다.
연차가 남은 이유가 쓸 시간이 없어서였으니까.
그래도 강제로 불러내는 게 미안했는지 민치호는 한마디 덧붙였다.
-직급이 올라가고 권한이 커질수록 대외 행사도 자주 나가야 해. 나도 가고 싶어서 행사 나가는 건 아니거든.
그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렇다.
높으신 분이라고 무작정 단합대회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특히 예산을 써야 하는 이런 경우에는 골치가 아파진다.
쓸데없는 곳에 소중한 예산을 썼다고 국정감사에서 욕을 먹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올해엔 생략하실 줄 알았는데요. 워낙 여러 사건이 있어서.
-그래서 더더욱 이번 단합대회가 필요한 거야. 청장님이 바뀌었고 그 전에는 식구들끼리 물고 뜯고 여러 복잡한 이해관계가 있었잖아. 열기 전엔 귀찮아도 막상 열고 나면 사이가 돈독해지거든. 진짜야. 직접 보면 알 거야.
이런 일을 많이 거쳐 본 사람의 말이니 맞을 것이다.
나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주에 연차 꼭 주셔야 합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케이해 줄게.
-넵.
그렇게 나는 조건 없는 연차를 걸고 단합대회 필수 멤버가 되었다.
-부웅.
또 한 대의 전세버스가 한 무리의 사람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슬슬 운동장 곳곳에 편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나온 모양이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우리 팀원들은 오늘 불참이다.
무려 영화를 보러 가셨다.
지금쯤 늦잠을 자고 있겠지.
그렇다고 우리 팀이 다른 과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딱히 친해진 사람도 없다.
굳이 있다면 업무상 자주 왕래하면 조사과의 직원 몇과 바로 옆 사무실을 쓰는 권현아 팀장 정도.
마침 9시 방향에 권 팀장이 하품을 하며 나타났다.
그렇다고 바로 달려가 아는 척하기엔 멋쩍어서 나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내가 하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어서인지 머지않은 곳에 새 몇 마리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참새만 두어 마리 앉더니 내가 위험하지 않다고 느꼈는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참새와 비슷한 크기에 흰 털, 넥타이처럼 배에 검은 세로줄을 가진 저 동글동글한 새는 박새.
그 옆에 포르르 내려앉은 주홍빛 새는 딱새다.
가을이랍시고 얼마나 잘 주워 먹고 다녔는지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내가 지켜보는 동안 열 마리 가깝게 늘어난 새들은 총총 뛰어다니며 바쁘게 무언가를 줍더니 슬금슬금 내 발치까지 다가왔다.
“이놈들아, 나는 먹이사슬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란 말이다.”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참새가 고개를 갸웃했다.
와, 가깝다.
땡글한 검은 눈동자와 극세사보다 더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털이 바로 앞에서 통통 튀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포르르.
“뭐 하세요?”
인기척에 놀란 새들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들자 권현아 팀장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회색빛 트레이닝복을 입은 권현아는 맑게 웃더니 내 옆을 가리켰다.
“앉아도 돼요?”
“그럼요.”
가벼운 허락과 함께 권현아가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머리 위로 날아올랐던 새가 다시 내 발치에 내려앉자 권현아가 입을 열었다.
“제대로 쉬고는 계세요?”
“그럼요. 저도 일만 하고 살진 않아요.”
내가 워커홀릭인 건 이제 인정한다.
주위 사람들이 다들 내가 일하는 걸 보고 기겁하는데 눈치 못 채면 바보지.
그래도 쉴 때는 제대로 쉬려고 노력중이다.
방금까지 새를 구경하며 자연과 동화되던 것도 그래서였고, 반지의 대왕 재개봉도 미리 예매해 뒀다.
민치호의 허락까지 떨어졌으니 아무도 나를 막을 순 없다.
그런 각오였다.
“그런데 권 팀장님도 나오실 줄은 몰랐네요. 무슨 종목이에요?”
나름 단합대회다 보니 체육 행사도 있었다.
축구랑 줄다리기도 있던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나는 부르면 오라고 들었으니까.
“계주요.”
내가 놀란 눈으로 보자 권현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은근 빨라요. 세무서에 있을 때부터 엄청 뛰어다녔거든요. 같이 현장 다닌 사람들이 추천했더라고요.”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신 팀장님은요?”
“글쎄요. 종목 말씀을 안 해 주셨는데…….”
“어? 진짜요? 그럼 그거 시킨다는 얘긴데.”
“그게 뭡니까?”
내가 묻자 권현아는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장난기어린 웃음을 지었다.
“으흠, 청장님이 일부러 신 팀장님 부른 거구나. 잘 알겠네요.”
“대체 뭐예요? 말씀을 해 주세요.”
“청장님도 말씀 안 해 주셨는데 제가 알려 드릴 순 없죠.”
권현아가 히죽 웃자 괜히 더 불안해졌다.
무슨 단합대회 전통 같은 건가 보다.
족히 천 명은 넘게 모이는 곳에서 개망신 당하는 건 싫은데.
“걱정 마세요. 어려운 건 아니니까.”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지.
내가 추궁하려 하자 권현아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저기 누가 부르는데요?”
그런 거에 속는 바보가 어디 있나.
나는 권현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자 정말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신재현!”
“예?”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용산 세무서 시절 조사과 과장이었던 김명중이 한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어? 과장님!”
권현아가 시선 돌리려고 장난친 건줄 알았는데 진짜였네.
권현아는 이때를 틈타 얼른 도망갔고 나는 대형 천막이 우르르 깔린 곳으로 걸음을 떼었다.
항상 반듯한 정장 차림이던 과장은 오늘 면바지에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희미하게 감도는 미소가 놀랍게도 어색해서 나는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내 기억 속의 과장은 진중하고 항상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보네.”
그러나 업무 이외의 일로 보는 과장은 이렇게나 부드럽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란 걸 이제야 알았다.
김명중 과장은 먼저 내게 다가와 손을 벌리더니 나를 한차례 안아 주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과장님.”
“나야 똑같지. 너야말로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다. 나는 하도 네 얼굴 많이 봐서 어제 보고 또 보는 것 같네.”
“제 얼굴요? 아…… 뉴스요?”
과장은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과장님은 어느 서에서 오셨어요?”
“나? 반포 세무서 조사과. 강남 세무서랑 축구 내기 걸렸거든.”
“축구요?”
“옛날에는 큰 세무법인 근세들이랑 세무서 직원들이랑 곧잘 축구했어. 그래서 강남 쪽 직원들은 축구 동호회가 많이 발달했지.”
“예…… 예?”
뭔가 이상한 얘길 들은 것 같은데.
내가 되묻자 과장이 덧붙였다.
“김영란법 없던 시절 일이야. 내기축구 해서 일부러 세무법인이 지고 밥값 내는 식으로 호의 보여 주는 일이 있었거든.”
과장은 아무렇지 않게 폭탄 발언을 했다.
그는 내 얼굴을 흘끔 보더니 피식 웃었다.
“옛날엔 그랬다고. 지금은 그런 짓 했다간 감사과에서 가만 놔두겠어? 그만큼 유서 깊은 동호회라는 거지.”
나는 안도인지 뭔지 모를 한숨을 뱉으며 과장을 따라 걸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천막이 쳐진 곳으로 향했다.
곳곳에서 하품과 함께 멍하니 앉아 있던 직원들이 지나가는 김명중 과장을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아시는 분이 많나 보네요.”
“나 모르는 사람들인데. 너 보고 인사한 거 아냐?”
“예?”
당황해서 다시 천막 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다시 누군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허겁지겁 인사했다.
“정말 저한테 인사한다구요? 이 사람들이?”
“너 일반인한테만 유명한 거 아냐. 한번 붙어 보겠다고 벼르는 직원이 얼마나 많은데. 아, 물론 선의의 경쟁 얘기야.”
이건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다.
카메라 앞에 설 때는 별 느낌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아는 사람이 언급할 땐 왠지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천막을 지나치면 지나칠수록 내게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부담스러울 정도라서 슬금슬금 운동장 쪽으로 방향을 틀자 과장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딜 가. 재밌구만. 저쪽에 사람 많다. 저쪽으로 가 볼까?”
“과장님, 제발요!”
나와 과장이 티격태격하며 이리저리 배회하고 다니는 동안 어느새 운동장에는 어디서 이렇게 왔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너는 종목 뭐 나가냐? 축구? 줄다리기?”
“모르겠는데요. 안 알려 주셔서. 청장님이 그냥 몸만 오면 된다고 하시던데요.”
어떻게든 사람이 운집한 곳에서 멀어지려고 애쓰던 때, 과장이 덜컥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과장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이 얼굴 익숙한데.
아까 권현아 팀장도 이런 식으로 웃지 않았나?
“혹시 저 이상한 데 끌려 나가는 거 아니죠? 미리 말씀해 주시면 마음의 준비를 하겠는데요.”
“음, 아냐. 별거 아닐 거야.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지.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서 대타일 수도 있잖아.”
“과장님 표정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과장님? 과장님!”
과장이 내 어깨에서 손을 떼더니 슬금슬금 앞서나갔다.
뒤를 쫓아가는데 운동장 곳곳에 달린 스피커에서 삐이, 하고 기계음이 들렸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서울청 특수조사2팀의 신재현 팀장님! 계시면 앞쪽 천막으로 와 주세요!
과장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침 부르네. 슬슬 시작하나 보다.”
“과장님? 알려 주고 가세요!”
“고생하고, 이따 보자고!”
내 애타는 부름에도 과장은 웃음과 함께 멀어져 갔다.
-신재현 팀장님, 앞쪽 천막으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결국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털레털레 단상 밑으로 향했다.
천막 아래 의자에 앉아 있던 민치호 청장이 날 보더니 덥석 마이크를 내밀었다.
“오늘 경기 해설 잘 부탁해.”
-덜컥.
나는 마이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