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부산청을 떠나며
-탁.
나는 부산청에서 우리에게 마련해 준 사무실 문을 열고 슬그머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겨우 4일 만에 돌아온 부산청이었는데도 어쩐지 감회가 남달랐다.
이러면 서울청에 돌아갈 땐 더 느낌이 묘하겠는데.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닫고 숨을 죽였다.
남은 팀원들이 잘해 주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일말의 걱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걱정은 걱정일 뿐이었다.
우리 팀과 본청은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쩐지 서운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커다란 테이블 너머, 벽면에 달린 TV 화면을 힐끔힐끔 곁눈질해 가며 직원들은 손에 침을 묻혀 종이를 넘겼다.
오늘도 이어지고 있는 국정감사를 보고 있는 것이다.
화면으로 보니 국세청장은 마음고생을 한 것처럼 핼쑥해 보였다.
민치호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고.
이렇게 보니 오히려 민치호가 국세청장 같아 보여서 신기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들어갈까.
처음엔 그냥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얼마나 열심히 집중했는지 아직도 날 발견하지 못한 걸 보니 놀래켜 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갈까? 하고 한 발짝 떼는 순간에 내 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놀란 것은 오히려 나였다.
“으악!”
“푸흡!”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팀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핫! 너 안 들켰다고 생각했지?”
장세훈이 의자를 빙글 돌리며 가장 크게 웃어댔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내가 떠났을 때와 비슷한 광경에 비슷한 서류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파티션 뒤에 있었는데.”
“저기 보세요. 뒤에.”
안길진이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내 뒤를 가리켰다.
내가 모르는 젊은 직원 하나가 엄지를 들어 보이고 있었다.
반대쪽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다.
“아, 몰래 들어오려고 했는데.”
“그런 건 팀장님보다는 혜원 씨가 잘해요. 저번에 밥 먹고 없어져서 한참 찾았더니 먼저 와서 떡하니 앉아 있더라고요.”
황민우가 반갑게 대답하자 강혜원이 팔짱을 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한테 배우셔야겠네요.”
오랜만에 보니 더욱 반가운 얼굴들이다.
한바탕 웃고 나자 내 뒤를 이어받아 지휘권을 잡은 본청의 소민국 과장이 일어섰다.
“드디어 왔네요. 어휴, 힘들었습니다.”
본청 과장이나 되는 사람이 엄살은.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과장은 언제 날 견제했냐는 듯 바로 빈 의자를 내게 내밀었다.
“좋은 팀입니다. 같이 일해 보니 알겠어요.”
“제가 많이 굴렸다는 뜻이죠?”
“아, 들켰나요?”
과장은 하하 웃으며 인수인계서를 내밀었다.
내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준비해 둔 것이다.
“과장님께서 계속 지휘 잡으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과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미 체계가 다 잡혀 있던데요, 뭐. 신 팀장님이 자리 잡은 데 제가 숟가락 얹은 셈입니다. 원래 자리 안 돌려주면 공로 빼앗아 먹는다고 욕먹을 겁니다.”
소민국 과장은 어서 앉으라는 듯 의자에 턱짓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자 과장이 테이블에 한쪽 팔을 짚으며 세세하게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정확히 내가 해 줬던 방식 그대로다.
“내 욕심 같아서는 신 팀장 오기 전에 다 끝내놓고 놀래켜 주고 싶었는데 물리적 여건상 그렇게는 못 했네요.”
남아 있던 조사 건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끝낸단 말인가.
물론 농담이겠지만 과장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진척이 많지 않아서 이거 참 민망하네요.”
“어후, 4일이었는데요. 그 안에 다 끝내 두셨으면 제가 오히려 민망했을 겁니다.”
“그럼 제가 그동안 게으르게 일한 게 아니라는 걸 이쪽 팀원들이 잘 설명해줄 겁니다.”
나머지 자세한 설명은 팀원에게 들으라는 뜻이다.
인수인계를 마친 과장이 자리를 뜨자 장세훈이 슬쩍 쌓인 서류를 들이밀었다.
오자마자 일이 시작이다.
“저 없는 동안 잘 지내셨나 봅니다.”
“의원들한테 시달린 너보다야 잘 지냈지.”
그렇게 말하는 장세훈도 피곤에 찌든 얼굴이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서류를 훑기 시작하자 황민우가 짧게 보고를 시작했다.
“과장님이 저희 쪽 방식에 맞춰 주셨습니다. 딱 팀장님 빠진 자리에 과장님이 대체하셔서 진행했어요.”
“며칠 안 지나서 올 거니까 굳이 체계를 바꿀 필요도 없었던 거지.”
“그래도 과장님이 편의를 봐 주신 건 맞습니다. 누가 과장급이 저렇게 현장에서 구를 거라 상상하겠습니까.”
황민우는 장세훈을 타이르듯 말했다.
내 생각에도 황민우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단 며칠이라 해도 자기만의 방식이 편한 건 당연하고, 과장씩이나 되면 그간 손에 익은 방식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우리 팀에게 맞춰줬다면 과장으로서는 굉장한 양보일 것이다.
“그럼 과장님과 본청에 감사하면서 얼른 끝냅시다. 슬슬 서울청이 그리워지고 있거든요.”
“난 우리 집이 그립다. 며칠 전엔 나 빼고 피자 시켜 먹는다고 문자 보냈더라.”
장세훈이 투덜거렸다.
“누가 보냈는데요? 어머니요?”
“동생 놈.”
“저런, 무슨 피잔데요.”
“파인애플 피자.”
“아…….”
순간 나를 포함해 4명의 탄식이 흘렀다.
“아, 왜! 파인애플 피자가 뭐 어때서!”
선 넘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장세훈이 눈을 부릅떴지만 강혜원이 옆에서 새로운 업체 건을 하나 들어다 턱 내려놓으며 그의 입을 막았다.
잠시 침묵과 함께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사락.
“아니, 자꾸 먹는 걸로 사람 무시할 거야? 자꾸 그러면 오늘 간식으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사 온다?”
“한 번 해 보세요. 남은 서류를 다 누가 검토하게 될까요?”
“아오…….”
장세훈은 이번에야말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용히 강혜원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강혜원은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옆의 안길진이 질린다는 얼굴로 강혜원을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후로는 여느 때와 같은 정신없는 서류 지옥이었다.
나는 남은 작업물을 보고 추가로 약 1주에서 열흘을 예상했다.
그리고 딱 내 예상대로 9일 만에 우리는 조사를 마무리했다.
지역 유착된 것으로 의심했던 업체들도 다시 재조사를 거쳤고, 박원형이 그쪽 세무서를 뒤엎고 있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애초에 조사의 목적은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었고, 이때를 노려 바가지를 씌우던 악덕 업주는 대부분 명단에 올랐다.
이 이상 했다간 정말 권력 남용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종이로 검토한 자료를 모두 스캐너에 넣고 전자문서화했다.
종이 문서는 차곡차곡 정리해서 상자에 넣고 봉했다.
회의실 한쪽에 가득 쌓인 상자를 보니 이제야 끝났다는 현실감과 함께 뿌듯함이 느껴졌다.
뒤를 도니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리를 끝낸 본청 조사과 사람들이 서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걸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앞에 서 있던 과장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과장님의 배려 덕에 분에 넘치게도 제가 지휘권을 맡았네요.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을 텐데 이래저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그런 말씀을. 오랜만에 현장 뛰니까 오히려 몸이 안 따라 주더라고요. 이런 걸 생각하면 오히려 요즘 대세인 신 팀장에게 맡기는 게 낫지요. 나도 많이 배워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몇 주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재밌었습니다.”
“그래요?”
과장은 눈이 가늘어질 정도로 기분 좋게 웃었다.
“나중에 또 같이 일할 기회가 오면 좋겠네요. 아, 머잖아 일하게 되려나?”
뒤는 과장의 혼잣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부정했다.
이미 서울청에서 팀장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혜택이다.
여기서 바로 국세청으로 올라간다?
이건 아무리 민치호 청장이라도 힘들 것 같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나중에 국세청 가게 되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먼 훗날을 얘기한 것이었지만 과장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승진 시험 볼 거잖아요? 제 느낌상 요건 갖추자마자 6급 될 테고, 그러면 윗분들이 가만히 놔둘까요?”
과장은 실실 웃었지만 나는 김칫국은 사절이다.
“뭐, 제 예상입니다. 어찌 되었든 나중에 만나면 나 잊어버리지 말고 아는 척하깁니다. 알겠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과장은 다시 한번 내 손을 꾹 쥐더니 아쉬운 듯 손을 떼었다.
그리고 가볍게 덧붙였다.
“민치호 청장님 보필 잘하시고, 안부 전해 주세요. 그러면 먼저 가겠습니다.”
“네. 먼 길 조심히 올라가십시오.”
나와 팀원들이 깍듯이 인사하며 본청 직원들을 보냈다.
그새 친해졌는지 우리 팀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후련한 표정이다.
본청 사람들이 사무실을 빠져나간 후 우리도 근 한 달을 근무했던 사무실을 나섰다.
“이야, 시원섭섭하네요.”
“어우, 그래도 저는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침대에 누워서 밀린 드라마나 봐야지.”
산뜻한 잡담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가자 문득 ‘왔다!’ 하는 외침이 들렸다.
누가 기다리고 있었나?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개찰구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함께 일했던 부산청 조사과 직원들이 내려와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내려간 본청 직원들과는 작별 인사를 나눴는지 눈시울을 붉힌 사람도 보였다.
겨우 한 달 남짓인데, 그새 정이 들었나 보다.
조사과 직원들은 아쉬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가운데를 비웠다.
우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든 길이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공무원은 매년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세무 공무원이라는 하나의 직렬로 묶인 단체다.
여기서 본 사람을 내년에 같은 과에서 만나게 될 수도 있는 법이고, 같이 일했다 헤어진 직원을 10년 후에 청에서 만날 수도 있다.
굉장히 많은 사람과 만났다 헤어지다 보니 친해질 만하면 이별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공무원끼리의 결속은 강했다.
그런 유대감이 지금 짙게 느껴졌다.
선두에 서 있던 조사과 과장과 팀장이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 손을 붙잡자 그는 가볍게 위아래로 한차례 흔든 뒤 찡긋했다.
“한 달간 고생 많았습니다. 나중에 또 봐요.”
그는 손을 놓더니 자그마한 병 하나를 꺼내 건넸다.
손바닥만 한 작은 유리병이다.
“저희 청장님이 술을 좋아하셔서요.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면 술을 먹이는 버릇이 있거든요. 이번 조사 기간에 한 번쯤 불러서 먹이려고 벼르고 계셨어요. 근데 계속 바빠서 기회가 안 나니 이걸로 갈음하신답니다.”
과장은 갈색 빛 도는 작은 병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정말 한 잔 따르면 텅 빌 것 같은 양이다.
“이 정도면 부담 없죠?”
나는 청장의 배려를 느꼈다.
그리고 어떻게든 술 한 잔은 먹여 보내겠다는 의지도.
“감사히 잘 마시겠다고 전해 주세요.”
과장은 찡긋하더니 이어서 내 뒤에 있던 팀원들과도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여러분은 술 없다고 서운해 하지 마세요. 다음에 만나면 한잔합시다.”
“한 달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팀원들도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눴다.
“그럼 이제 정말 작별이네요. 나중에 함께 일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과장이 자리를 비켜 주자 사람으로 만들어진 길이 보였다.
조금은 쑥스럽고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자 과장이 등을 툭 쳤다.
그제야 나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고생하셨습니다!”
“또 같이 일해요!”
“나중에 봐요!”
“잘 가고 고마워요!”
양옆에 선 직원들이 양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내 뒤에서 강혜원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나도 괜스레 뭉클했다.
부산청의 1층 출입문에 선 나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리고 정중하게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깔끔하게 조사 끝내고 갑니다!”
호응하듯 터져 나온 박수와 함께 우리는 부산청을 떠났다.
9월 26일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