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정직한 공무원으로 산다는 것 (3)
순간 사무실에 침묵이 흘렀다.
생각보다 일이 심각하게 흘러가자 조사과 직원들은 눈알을 데록 굴렸다.
박원형이 무언가 절실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과장과 1팀장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들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심지어 이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안배종 팀장의 눈길을 무심하게 뿌리쳤다.
대놓고 고발하진 못했어도 평소 행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하실 말씀 없으시죠?”
시간을 줄 테니 어디 한 번 지껄여 봐라.
신재현은 아예 팔짱을 끼고 그런 눈빛으로 안 팀장을 바라보았다.
안 팀장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마른침만 꿀떡 삼키던 안 팀장의 귓가에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조사과는 아니었다.
다들 돌이라도 된 것처럼 눈동자만 굴릴 뿐이었으니까.
소란스러운 것은 밖이었다.
일을 팽개치고 구경하러 나온 직원들이 복도에서 안을 들여다보겠답시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거기에 서장까지 등장했다.
다급하게 재킷을 걸친 듯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휘날리며 달려온 서장은 조사과 유리문을 톡톡 두드렸다.
신재현이 눈짓하자 가까이 있던 황민우가 문을 열어주었다.
서장은 한 발짝 딛자마자 신재현의 얼굴을 보고 주춤했다.
그리고 조사과의 분위기를 본 뒤 이마를 짚었다.
“보아하니 조사과 업무 협력 요청은 아닌 것 같네요. 뭡니까? 누가 신 팀장의 레이더에 걸린 겁니까?”
아예 신재현이 엎으러 나온 것을 전제한 말투였다.
조사과 직원들의 눈동자가 말없이 안 팀장을 향했다.
“내, 내가 잘못했어요. 신재현 씨, 같은 공무원이고 같은 팀장 아닙니까. 좀 넘어갈 순 없는 겁니까?”
안 팀장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신재현이 아니었다.
서장이 깊게 탄식했다.
“우리 서에서 이런 대참사가 일어나다니.”
안 팀장의 변명 단 한 마디만으로도 서장은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선 자리에서 한숨만 다섯 번을 연달아 쉰 서장은 굉장히 힘들게 운을 뗐다.
“내가 어떻게 해결하면 되겠습니까?”
“서장님…….”
안 팀장이 구원자를 만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서장은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닥치고 있어 봐요. 한 마디만 더 하면 못 참을 것 같으니까.”
안 팀장은 불안한 표정으로 조용히 물러났다.
“서장님께서 무언가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감사관실에서 움직이는 중입니다.”
“청장님한테까지 올라갔단 소리군요. 허어…….”
“서장님께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신재현은 달래듯 말했다.
“제가 치고 싶은 것은 항상 단 하나입니다. 위법 행위. 어차피 공무원은 여러 발령지를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여기 소속이라고 해서 서장님께 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과장님도 마찬가지구요.”
신재현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꼬집었다.
더불어 이들이 그 두려워하는 것을 조용히 덮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
여기서 서장과 과장의 관리감독 책임까지 들추면 사람들은 앞으로 더더욱 부하들의 허물을 감추려 들 것이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도 아니에요. 아시잖습니까.”
서장은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직원 둘을 지명해 불렀다.
“내 눈앞에서 저 쓰레기를 치워 주세요. 세무서 안으로 한 발짝도 못 들이게.”
“서, 서장님! 저한테 5분만 주십시오!”
“저 쓰레기가 책상에 절대 가까이 못 가게 하시고.”
“아악! 서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봐달라고 탄원해 주세요! 제가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얼른요!”
서장의 단호한 태도에 망설이던 두 직원이 안 팀장을 끌고 조사과 밖으로 나갔다.
이제 안 팀장이 무언가 증거를 인멸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서장으로서 내 손으로 쳐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입니다. 앞으로 신경 쓰겠다고 청장님께 전해 주세요.”
“청장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서장은 마지막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사무실을 나갔다.
서장의 태도에서 신재현을 적대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술술 묻어났다.
“그럼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남았네요.”
복도와 사무실의 시선이 신재현에게 쏠렸다.
그는 시선을 한데 모으듯 천천히 걸어 박원형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까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지켜보던 박원형의 눈이 벌게져 있었다.
눈물은 아니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원형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신재현과 마주했다.
희열과 뿌듯함이 가득 찬 눈이었다.
“제가 조사관님께 뭘 해 드릴 순 없습니다. 아시죠? 예를 들어 제게 한 제보로 함께 서울로 갈 거라든가요.”
“그런 건 생각도 안 했습니다!”
박원형은 불같이 화를 냈다.
자신의 진심이 모욕당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 박원형을 뚫어져라 관찰하던 신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갑에서 자신의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제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어딘지 아련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운을 뗀 신재현은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서울청 명함 위에 하나의 전화번호를 더 적었다.
“서울청장실 직통 번호입니다. 제게 바로 전화를 주셔도 되지만, 제 윗선이 필요할 경우 여기로 전화하셔도 됩니다.”
신재현은 과거 잠수교에서 이선균 과장이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박원형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서울청장이라는 말을 들은 모든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이 안에 없었다.
다음 국세청장으로 가장 유력한 민치호의 전화번호라니.
심지어 그것을 준 것은 그의 왼팔이자 칼이나 불리는 신재현이다.
이들에게는 지금 신재현이 아주 튼튼한 동아줄 하나를 내려주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재현이 의도한 것이었다.
박원형이 정의감을 가졌다는 건 안다.
그러나 다짜고짜 서울청으로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다.
신재현이 그러했듯 그 역시 스스로 능력을 증명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팀장을 쳐낸 내부 고발자를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알게 모르게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지금 박원형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고.
박원형이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받아들자 신재현이 그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악용하면 안 됩니다.”
“예, 예! 어떤 의도로 주셨는지 이해했습니다.”
박원형이 홀린 듯한 얼굴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중한 무언가도 되는 듯 명함을 어루만졌다.
“박원형 조사관님, 한번 바꿔 보세요. 청렴하고 깨끗한 곳으로. 이곳 세무서부터 시작해 보세요.”
박원형은 맹세하듯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
신재현이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세종시의 본청 조사과는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거기 조사 어떻게 됐습니까?”
“자료 요청했는데 이미 신재현이 털었답니다!”
“그럼 제가 오늘 아침에 드린 건은요?”
“그것도 반 이상 신재현이 이미 끝낸 것 같습니다.”
“아이 씨, 미친!”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상대는 겨우 팀 하나예요. 지금 과 하나가 들러붙어서 그쪽 꽁무니만 쫓아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한 직원이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미 며칠간 야근에 야근을 거듭해 얼굴은 푸석푸석하고 걷어 올린 소매에는 커피 얼룩이 묻어 있었다.
나이 지긋한 팀장이 서류철을 훑다가 책상에 철썩 내던졌다.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아무리 많은 일이어도 언젠가 끝은 나게 되어 있는 법이다.
처리해놓은 서류철을 보면 보람도 느끼고 뿌듯한 마음도 든다.
책상에 쌓여 가는 종이 다발을 보며 ‘그래도 많이 했구나, 곧 끝나겠네.’ 하는 마음으로 버티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책상에 서류가 쌓일 틈이 없었다.
인력도 들어가고 시간도 들어가는데 결과가 나오는 것이 없다.
이쪽에서 조사할라치면 이미 저쪽에서 손대고 있으니 물러나라는 연락이 오는 것이다.
“벌써 2주가 다 되어 갑니다. 진작 업체 수십 군데는 조사가 마무리되었어야 해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들인 공에 비해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의욕도 나질 않았다.
“조금만 더 힘내 봅시다. 저쪽 팀은 그래 봤자 다섯 명이에요. 우리가 앞지를 수 있습니다.”
“다섯 명이 하는 규모가 아닙니다. 부산청, 대구청이 다 달라붙은 거 아닐까요?”
직원의 의구심은 정당했다.
절대 한 팀이 소화 가능한 규모가 아니었으니까.
실제로는 신재현 팀이 자체적으로 검토를 마친 후 우선순위를 정해 각 청과 세무서에 조사대상을 배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 본청 조사과에서 하는 일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본청 입장에서 보기에 절대 팀 하나가 진두지휘해서 낼 수 있는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식으로 항의해야 합니다. 대구청과 부산청이 신재현과 손잡은 게 분명해요. 우리를 엿 먹이고 있는 겁니다.”
직원들의 성토에 과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일을 못 하고 있어요. 관할 텃세라도 부리는 겁니다. 저희가 아무리 명단 짜 봐야 뭐합니까? 저쪽에서 이미 조사 중이라고 하면 다 파기해야 하는데.”
참을 만큼 참았다.
직원들은 기회라는 듯 저마다 쌓인 감정을 토로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제가 전화해 보겠습니다.”
과장이 못 이긴 척 전화기를 들자 직원들이 소리 없는 환호를 내질렀다.
지금까지는 그저 본청에서 자존심 싸움을 했을 뿐이다.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서로 자료 공유도 없었고.
그러니 과장을 설득해 그가 일단 전화를 걸기만 하면 알아서 그쪽에서 협상을 받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방청이 본청에 반기를 들리는 없으니까.
그래서 과장이 먼저 전화를 걸게 만드는 것이 문제였는데, 2주간 조사과의 꼴을 본 과장도 도저히 참지 못한 것이다.
“아, 부산청 조사과 맞으십니까. 저는 본청 조사과장입니다만.”
-잠시만요. 저희 과장님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상대가 과장이기 때문인지 부산청 직원 역시 곧바로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곧이어 들린 부산청 조사과장의 목소리는 꽤 퉁명스러웠다.
-부산청 조사1과장입니다. 전화 주신 분은 본청이시라고요?
“예. 이번에 국세청장님이 특별히 지시 내리신 건에 대해 서로 협력이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본청의 과장은 ‘특별히’라는 말에 일부러 강세를 두었다.
그러나 상대는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저희가 자료도 다 드렸는데, 무슨 협력이 더 필요합니까?
“본청 쪽에서 조사요청 드리면 이미 다 신재현 팀장 권한으로 넘어갔다고 하잖습니까. 저희는 일하는 족족 다 헛수고가 되고 있는데.”
-그건 그쪽에서 업무 공유를 안 해서 그런 걸 저희한테 따지시면 어떡합니까.
분명 부산청에서 신재현을 돕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 시치미를 떼니 본청 과장은 열불이 터졌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죠. 어느 한쪽에 붙고서 우리를 의도적으로 따돌리는 건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이게 뭔 소리예요? 우리가 뭘 어쨌다고요?
“그쪽에서 적극적으로 돕고 있지 않습니까! 자료 분류며 조사까지 전부 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재현 그 팀이 이렇게 앞서 나갈 리가 없죠!”
-대단한 착각을 하시는데요. 뭐 솔직히 말해서 직접 찾아와 주신 신재현 팀장한테 호감이 있는 건 맞지만, 본청에서 생각하시는 그런 도움은 없었습니다. 그냥 신재현 팀은 지휘부에요. 본청에서 검토하고 직접 조사 나가시거나 저희한테 조사 요청하시잖아요? 그거랑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걸 지금 저한테 믿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못 믿겠으면 직접 와 보세요. 어느 팀은 진작 내려와서 현장 뛰는데 본청은 아직도 거기서 자료 검토하고 있어요?
본청 과장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리고 저희도 바쁩니다. 자꾸 이렇게 전화하지 마시고 신재현 팀장한테 직접 얘기하세요. 저희는 어디까지는 양쪽을 공평하게 대하고 있어요. 둘의 관할 싸움이 남의 청 끼우지 마시란 얘깁니다. 그럼 끊습니다.
“아니, 저……!”
본청 과장은 씩씩거리며 전화를 내려놓았다.
과장이 전화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던 직원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과장은 벌게진 얼굴로 서류를 탁 내려치더니 직원들에게 말했다.
“안 되겠다. 우리도 내려갑시다! 오라는데 가 줘야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부산청의 기만을 따질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본청 조사과를 물 먹인 건방진 신재현 팀의 콧대를 눌러 주리라.
과장과 직원들은 한 마음으로 짐을 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