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저 아시죠? (1)
-국세청이 대규모 세무조사를 예고했습니다. 다만 어느 업종이나 어느 계열사를 특정한 것은 아닙니다. 국세청의 표현을 빌리자면 ‘건강한 시장 경제를 해치는 부당 이익 주도자’를 주요 대상으로 삼을 것이라고 합니다. 표현이 특이한데요, 국세청의 의도가 뭐라고 보십니까, 교수님?
-국세청의 표현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시장 경제를 해치는, 부당 이익, 주도자. 지금 지진이 일어난 후에 일부 지역에서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정상이라 생각할 수 없는 가격 폭등 사태를 잡겠다, 그러나 이걸 다 잡으면 안 그래도 어려운 경제가 위축될 수 있거든요. 생산, 유통, 소비가 위축되면 지역 경제 재활에 어려움을 겪어요. 그러니 부당 이익을 얻은 사람만 잡겠다는 거죠.
-점점 대상을 좁혀 가는군요.
-부당 이익도 다 잡는 건 아닙니다. 그중에서 주도자, 즉 이번 사태를 아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만 잡겠다는 거예요. 이 말은 무엇이냐.
-전체적으로 봤을 땐 아주 극소수가 대상이 될 것 같은데요.
-바로 그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모든 업주를 다 잡을 필요는 없어요. 대다수의 업자는 선량합니다. 지금 상황이 너무 돈 벌기 좋다 보니까, 한 마디로 판이 깔려 있는 거나 다름없거든요? 조금만 눈을 감으면 아주 떼돈을 벌 수 있는 거예요.
-평소에 선량하던 분들이라도 유혹을 느낄 만큼이라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면 선량하게 돈 버시는 분들이 바보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얼른 이런 분위기를 일신해 줘야 해요. 그렇다고 다 때리면 아까 말씀드렸듯 잠깐의 유혹에 넘어간 분들도 있을 수 있어요.
-남들 다 하니까 같이 끼어들었다가 정부의 철퇴에 맞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과열된 분위기만 진정시키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주도적으로 부당 이익을 취하는 사람만 골라서 때리겠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본보기죠. 몇 명이 거하게 때려 맞는 걸 보면, 나도 해 볼까? 하던 사람도 슬그머니 발을 빼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진정시키겠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찾아보기도 힘든 뚱뚱한 사각 TV가 지직거리며 뉴스를 토해냈다.
사무실에서 후루룩 컵라면을 먹으며 뉴스를 보던 세 남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뉴스에 나오는 내용이 딱 그들의 사장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세 남자는 하나밖에 없는 책상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에는 사장이 앉아 열심히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아, 강 사장! 우리 쪽에 물량 있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응? 얼마 있는지 얘기하기 전에 가격부터 말해 봐.”
사장은 자신이 가진 정보는 단 하나도 풀지 않으면서 거래 상대를 애태웠다.
이 거래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자신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화법이었다.
“우리도 밀린 주문이 많아서 많이는 못 줘. 나도 강 사장은 신경 써주고 싶지. 그래서 물량 들어오자마자 강 사장한테 전화한 거잖아. 아이 씨, 허풍 아니야! 강 사장이 직접 와서 봐! 물량 보여 줄게! 대신에 오늘 지나면 나도 다른 데다 넘길 거야. 하루만 지나도 가격이 차이 난다고! 오려면 얼른 와!”
사장은 전화를 끊고는 직원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치켜떴다.
“뭐야, 무슨 일인데?”
“국세청에서 세무조사 나온다는데요?”
“정부에서 칼 빼들었다고 지금 온 뉴스에 난리인데.”
“걱정 안 돼요, 사장님? 우리 너무 많이 올려 먹은 것 같아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잠깐 남는 시간에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꿍쳐둔 생수와 휴지, 통조림 등을 도소매상이 트럭으로 가져가고, 대가로 박스에 현금을 그득 담아 줄 정도로 성황이었다.
그때마다 사장이 돈 뭉치 하나씩을 챙겨줬고 직원들도 뛸 듯이 기뻤다.
군소리 없이 밤낮으로 일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뉴스에서 세무조사네 뭐네 무서운 얘기를 하자 겁을 먹은 것이다.
“사장님, 이익 꽤 많이 남지 않았어요? 이쯤하고 발 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직원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사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따 둔 거래만 해도 10억 어치야! 오늘 강 사장이 올 거고 내일은 임 사장이 올 거란 말이야. 지금이 타이밍이야!”
“돈도 좋지만 이제 슬슬 위험하지 않아요? 벌 만큼 벌었으면…….”
“어허! 돈에 적당히가 어딨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는 말 몰라? 지금 돈을 상자 째 들고 와서 물건을 떼 가는데 이걸 놓치면 사람이 아니지! 너희들도 금일봉 두둑하게 받고 싶지 않아?”
“저희야 돈만 잘 챙겨 주신다면…….”
사실 세무조사를 받든 말든 직원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사장이 계속 팔겠다는데 어쩔 것인가.
상여금만 주면 밤새워서라도 일할 수 있다.
“이런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야. 준비된 자만이 기류를 탈 수 있는 거라고! 나처럼!”
사장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그는 요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흥분 상태였다.
그 역시 지진으로 집을 잃은 이재민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아내와 아들은 집 근처 초등학교 강당으로 피신해 기부받은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처음엔 땅을 치고 울며 하늘을 원망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창고에 그득 쌓인 것은 올해가 지나기 전에 다 팔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악성 재고였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두 배, 세 배를 불러도 날개 돋친 듯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재고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자 각지의 소매상들의 전화가 쉴 틈 없이 빗발쳤다.
당장 며칠 동안 번 돈이 3년 치 수익과 맞먹을 정도였다.
게다가 마음 급한 중간 상인들은 대금을 현금으로 가져온다.
카드나 세금계산서도 끊어 주지 않았다.
국세청에서도 모르는 돈이었다.
“국세청 놈들은 절대 몰라. 현금 박치기 했는데 걔들이 어떻게 알아? 세무조사는 원래 재수 없는 놈들이 받는 거거든. 나중에 걸리면 뭐 까짓 거 좀 내면 되지.”
현금은 숨겨 두면 된다.
사장은 의기양양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또 다른 소매상의 전화번호가 액정에서 반짝거렸다.
“아이고, 송 사장님! 물건 드린 지 얼마 안 됐는데 어쩐 일로 전화 주셨습니까? 물건이 벌써 동났나요? 아이쿠, 이걸 어쩐다. 저희도 물건이 없어서 예전 가격에는 드리기 힘들어요. 예, 저희도 먹고 살아야 하잖습니까.”
오랜 기간 함께했던 거래처마저 이제는 돈다발로 보였다.
사장은 선심 쓴다는 듯 가격을 불렀다.
잃어버린 집, 그 이상으로 뽕을 뽑을 생각이었다.
“송 사장님은 아는 분이니까 2배에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제가 큰 손해 보는 겁니다.”
거래처의 타는 마음도 모르고 사장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
본청 조사국 조사팀은 의욕이 넘쳐나고 있었다.
“저쪽은 어쩌고 있으려나.”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이들의 머리 한구석엔 서울청의 특수조사팀이 존재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어느 한 직원이 지나가듯 말을 꺼내면 어느새 다른 직원이 화제를 받았다.
“아직 서울청에 틀어박혀서 끙끙대고 있을 겁니다.”
“나름 잘나가는 팀이던데 이대로 가만히 있을까?”
“잘나가면 뭐하겠습니까. 아무리 유능해도 손발 묶어 놓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더군다나 그 팀은 청장 직속으로 독립 활동 보장받은 팀이잖아요. 대우받으며 살던 온실 속 화초는 이런 상황에 대처 못 해요.”
“역시 그렇지?”
냉정한 태도로 말하는 젊은 직원의 말에 약간이나마 맴돌던 불안감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오낙현 청장님하고 민치호 국, 아니 청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이번엔 우리가 앞서야지.”
“저번에 지산 건은 솔직히 너무하셨습니다. 큼직한 건 저희가 다 했는데.”
조사팀의 불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자자, 이번에 우리가 실력으로 만회하면 돼. 일단 후보는 다 뽑았지? 추가 자료 요청하고 세무조사 들어갈 건데 어떡할래, 직접 갈 거야?”
“아뇨, 현금 누락이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간단한 건입니다. 현지에 맡기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협조 요청 넣어 보죠.”
본청이 직접 나갈 것까지는 없다고 판단한 직원이 전화기를 들었다.
-예, 부산지방국세청 조사과 최상진입니다.
“안녕하세요, 국세청 조사1과입니다.”
-아, 본청 조사과요?
부산청 젊은 직원의 목소리가 떨떠름해졌다.
전화 받기 싫다는 투가 역력했다.
그 반응에 순간 본청 직원이 당황했다.
‘왜 적대적이지? 혹시 서울청 쪽에 붙기로 했나?’
혹시라도 서울청 쪽과 협력하기로 한 거라면 문제다.
이번 건에서 본청 조사팀은 서울청 특수조사팀의 콧대를 완전히 눌러 버리길 원했으니까.
그래서 본청 직원은 본론을 꺼내기 전에 그것부터 물었다.
“혹시 서울청에 자료 보내셨습니까?”
-아닌데요.
여전히 툴툴거리는 말투였지만 본청 직원은 일단 안심했다.
‘그럼 뭐야, 왜 말투가 저런 건데. 본청에서 시키는 게 싫다 이건가?’
사투리를 쓰거나 억양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완벽한 표준어였기에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적대감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본청 직원이 긴가 민가 하는데 부산청의 최상진이 툭, 하니 한 마디를 던졌다.
-자료 보내고 할 것도 없어요. 여기 와 있으니까.
“……누가 어디를요?”
-여기에 와 있다고요. 서울청 특조팀.
“뭐라고요?”
본청 직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최상진의 말투가 차분해졌다.
-조사의 기본이 된 사람들이던데요? 직접 와서 겪어 보고 현장도 뛰고 있어요.
한마디로 너희 본청 놈들은 기본이 안 되어있다고 돌려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상진의 말투에 화를 낼 기분이 들지도 않았다.
그만큼 신재현 팀의 행보가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뭘 보고 간 겁니까? 아무 준비도 안 되어있을 텐데.”
-담판 지었죠. 직원들 다 몰려가서 난리가 났었는데. 엄청나게 각오하고 내려왔더만.
“잠깐, 현장 뛰었다는 말은 무슨 얘깁니까?”
-말 그대로 현장 조사 돌고 있다고요.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서울청 얘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면 끊겠습니다.
“잠깐, 잠깐만요!”
당혹스럽긴 했지만 지금은 일단 협력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방금 팩스 한 통 갔을 겁니다. 저희가 추린 건데 지청이나 지서에서 세무조사 진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전자 팩스를 확인하는지 잠시 딸각거리는 소리가 난 후, 전화 너머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안 되겠는데요.
“업무 협조를 안 하시겠다는 겁니까?”
본청 직원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는 순간, 부산청의 최상진이 말했다.
-이중 반은 이미 저희 쪽에서 조사 중인 건이에요.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자체적으로 진행 중이셨던 겁니까? 그렇게 일을 비효율적으로 하시면 어떡합니까?”
본청 조사팀이 시간을 들여 추려낸 명단이 쓸모없어지지 않았는가.
심지어 지금 이 시간에도 조사과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중에도 무의미한 조사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본청 직원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아마 전화를 듣고 있을 부산청 직원은 귀가 따가울 것이다.
“저희 쪽에 얘기는 해 주셨어야죠!”
잠시 전화 너머에서 말이 없었다.
좀 더 화를 낼까 말까 고민하던 때, 전화에서 달각 소리가 났다.
-아, 죄송합니다. 전화 바꿨습니다. 여기 조사관님이 이런 말씀 들을 필요가 없어서요.
“뭡니까?”
-그쪽 본청에서 원한 거 아닙니까? 자료 제공 않겠다. 알아서 해라. 간섭도 하지 않겠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지금까지 통화했던 직원과 비슷할 정도로 젊은 남자의 목소리다.
그러나 냉정함과 자신감이 깃든 목소리였다.
수화기를 붙잡고 있던 본청 직원이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지금 전화 받는 분, 소속과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서울청 특수조사 2팀장 신재현입니다. 저희는 분명 본청에서 알아서 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보고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본청 직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원하시는 대로, 이번 조사에서 저희가 무언가를 요청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그 대신 상황 보고도 없을 겁니다.
“그, 그렇지만 저희 일과 겹치지 않습니까.”
-조사 범위가 겹쳐 일이 비효율적이 되는 건 저도 안타깝지만, 본청에서 원하신 일이니 잘 처리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결국 본청 직원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전화가 끊기고 말았다.
어느새 주위에 다른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열을 내?”
수화기를 내려놓은 직원은 멍하니 대답했다.
“우리 큰일 났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