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03화 (203/500)

203화. 성실납세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

모범 납세자 표창식은 약 서른 명의 사람들에게 일일이 증명서를 수여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신재현은 모든 대상자에게 고개 숙여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증명서를 전달했다.

그러고 나면 바로 옆에 서 있던 서울청장이 납세자의 손을 붙잡고 또 인사했다.

시간이 걸려도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덕분에 증명서를 받은 모범 납세자들은 올 때와는 다르게 한결 뿌듯한 얼굴이 되어 기념사진을 찍었다.

행사가 모두 끝나고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지만 다민은 쉽사리 발을 떼지 못 했다.

그걸 본 서울청장은 슬그머니 다민에게 말을 걸었다.

“바쁘신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를 빛내 주셨으니 괜찮으시면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겠습니까?”

이런 행사는 서로 이미지에 도움되는 윈윈 전략이다.

끝나고 가벼운 인사 정도는 흔히 있는 일이었고.

그러니 이런 제의가 오면 평소라면 늙다리 고위 공무원과 차를 마시는 건 바쁘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오늘은 대답하기 전에 흘끔 옆을 쳐다보았다.

“허허, 저랑 둘이 마시자는 건 아니고 거기 매니저 분이랑 여기 신 팀장님도 함께요.”

“그럼 갈게요!”

누가 봐도 속내가 딱 보이는 반응이었다.

신재현과 매니저가 뜨악한 얼굴로 청장과 다민을 바라보았다.

***

다민의 매니저는 청장실을 두리번거렸다.

상석에 앉은 청장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흐뭇하게 웃고 있었고, 신재현은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옆에 앉은 다민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아이고 누나…….’

매니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연예인도 사람이니 물론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

그 대상은 동종 업계의 선배일 수도 있고 스포츠 선수일 수도 있고 아예 다른 분야의 종사자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재현을 존경한다는 건 밝혀져도 흠이 아니다.

이 이상 엮일 경우 문제지.

그러나 다행히 걱정의 대상인 공무원 쪽에서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그럼 우리 누나가 별로라는 거야? 남자라면 누나가 쳐다보기만 해도 헤벌쭉해야지!’

매니저는 아까와는 반대의 의미로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청장이었다.

“바쁜 시간을 빼앗았으니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할게요. 국세청 홍보대사로 다민 씨가 활동해 줬으면 하는데 이런 부탁 해도 괜찮겠습니까?”

모범 납세자로 선정된 여자 아이돌 가수라면 이미지 마케팅도 괜찮다.

청장으로서도 다민으로서도 좋은 제안이었다.

매니저가 괜찮다는 뜻으로 다민에게 사인을 줬지만, 다민은 그 전에 냅다 대답해 버렸다.

“당연히 괜찮죠! 영광입니다!”

놀란 매니저가 다민의 옆모습을 보았다.

저건 분명히 깊은 생각을 하고 수락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정면의 신재현에게 눈길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매니저가 머리를 짚으려 할 때 다민이 가만히 차를 마시던 신재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제가 제대로 못 들어서 그런데, 모범 납세자 되면 혜택이 뭐뭐 있어요?”

이건 신재현으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질문이다.

누가 뭐래도 이 시대에 귀하디 귀한 모범 납세자님 아닌가.

“명예이긴 합니다만 국세청에서도 최대한 혜택을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일단 공공주차장을 무료로 쓸 수 있고, 세무서 민원실에서 전용 창구도 사용하실 수 있구요. 철도 10% 할인도 있고, 인천공항에서 전용 비즈니스 센터도 이용 가능합니다. 향후 2년간 세무조사도 유예되구요.”

“와아!”

순수하게 혜택에 감동해서 놀라워한 건 아니었다.

신재현과 대화가 성립했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누가 모범 납세자가 되는지 어떻게 고르는 거예요?”

“3년 이상 사업을 하신 분 중에서 소득세는 5백만 원 이상 납부하신 분입니다. 법인의 경우엔 5천만 원 이상 납부하신 분 중에서 선정하는데 추천제예요.”

“어? 그럼 저는 누가 추천하신 거예요?”

“주소지 관할서의 서장님께서 저희 청장님께 추천하셨습니다. 원래 매년 모범 납세자 표창 때 유명인을 한두 분씩 넣으려고 노력합니다.”

“그건 왜요?”

“이미지 때문이죠. 공인이나 유명인이 성실하게 납세하시는 모습을 보면 다른 납세자께서도 세금에 대한 저항이 줄어드니까요. 좋은 이미지를 널리 알리는 것만 해도 국세청 입장에서는 큰 이득입니다.”

“그럼 도움이 됐다는 거네요!”

다민은 입을 막으며 좋아했다.

시간상이든 분위기상이든 이 이상은 무리다.

매니저가 슬슬 다민에게 다음 스케줄을 상기시켰다.

“누나, 이제 가야 해요.”

“벌써?”

다민의 표정이 단숨에 흐려졌다.

아쉬워하며 고개를 갸웃하던 다민이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아! 혹시 예능 하나 나오실래요?”

“예에에? 누나?”

“네?”

매니저와 신재현이 둘 다 경악했다.

“오래 걸리고 그런 건 아니에요. 거기 피디님이 전문가분 섭외에 열 올리고 있거든요. 다음에 제가 나가기로 한 건데…….”

다민의 설명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다.

주절주절 이야기하던 다민은 어리둥절한 신재현의 표정을 보고는 아차 했다.

그리고 드디어 프로그램의 제목을 말했다.

“오퀴즈라고 소방관도 나오고 뉴튜버도 나오고 의사도 나오고 그래요. 신재현 씨 섭외할 수 있다고 하면 피디님이 한걸음에 달려올걸요!”

“그 프로그램은 가끔 봤습니다. 그래도 제가 TV에 나가는 건 조금…….”

“괜찮겠네!”

내내 가만히 듣고 있던 청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좋아, 진행시켜!”

“……청장님.”

신재현이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청장은 이미 머릿속에서 과정과 결과, 영향까지 계산을 끝낸 후였다.

대기업을 친 후 아직까지도 공격받는 중부청장으로 인해 이미지가 하락한 것도 사실이었다.

국세청의 공무원이 전부 깨끗한 건 아니다, 개중엔 더러운 놈도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서울청장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생겼다.

중부청장과 다르다는 것, 깨끗하고 청렴한 국세청을 만들겠다는 것을 서울청장은 보여줘야 했다.

물론 이건 청문회에서 서울청장 혼자서 해내야 할 숙제였지만, 그 전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 두고 싶은 것이다.

서울청장은 가만히 신재현을 응시했다.

“나에게만 좋은 일은 아니야. 신 팀장도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을 것 아니야. 오늘 납세자에게 감사하다고 했던 것처럼.”

뉴스와 기사로 접하는 것과 예능에서 만나는 것은 다르다.

아는 기자를 통해 언론에 정보를 푸는 타이밍을 잘 써먹는 건 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기회였다.

딱딱한 면만 보여 주는 게 아니라 인간 신재현도 보여 줄 기회.

가뜩이나 형제 싸움으로 일이 아닌 개인사도 전국에 까발려진 형국이다.

서울청장은 이 건을 이용해 신재현이 수습할 기회를 얻기를 바랐다.

“그래도 저는…….”

“할 말 다 하고 와도 돼. 내가 언제 또 이런 허락을 할지 나도 모르는 일이다.”

연신 고사하던 신재현이었지만 청장이 아예 판을 깔아 주다시피 하자 고민에 빠졌다.

할 말 다 하라는 데서 솔깃한 것이다.

“할 말이 있긴 합니다만, 국세청에서 피해 가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얘기하고 오겠습니다.”

신재현이 말하는 조심스럽게는 기준이 좀 다르지만 서울청장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의 국세청을 생각하면 없던 기회도 만들어서 밀어줘야 할 판이다.

신재현이 막 나가긴 해도 국세청의 기둥을 뽑아 버릴 정도로 위태로운 짓은 하지 않으니.

“그럼 제가 피디님한테 연락해 볼게요!”

다민은 신나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렇게 신재현의 예능 데뷔가 성사되었다.

***

“뭐야? 신재현? 진짜 내가 아는 그 신재현이 맞아?”

오퀴즈의 피디는 다민의 전화를 듣고 입을 떡 벌렸다.

웬만하면 당황하는 일 없던 피디였지만 다민의 전화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냥 예의상 대답한 거 아냐? 그 왜 한국인은 ‘언제 밥 한번 먹자’ 이런 게 인사잖아. ‘나중에 한번 갈게요.’가 아니라 진짜 우리 프로에 나온다고 확실하게 얘기했어?”

오죽하면 두 번 세 번 확인하겠는가.

다민에게서 맞다는 대답을 대여섯 번 들은 후에야 피디는 멍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신재현이 우리 프로에 나와요?”

아이디어 회의를 하느라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던 프로그램의 MC, 오재석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네요. 저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피디 역시 꿈이라도 꾼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다 아차, 하는 얼굴로 테이블을 탁 쳤다.

“아, 섭외 과정 방송감인데. 전화 받을 때부터 카메라를 돌렸어야 했는데.”

매사를 방송 위주로 생각하는 피디다운 생각이었다.

그 반응 때문인지 함께 회의 중이던 두 남녀는 이것이 진짜라는 것을 실감했다.

장난이 아닌 것이다.

“누가 섭외한 거예요? 작가님이?”

셋 중 유일한 여성인 공민화가 물었다.

프로그램의 고정 출연자이자 보조 진행을 맡은 여자였다.

“다민이 전화였어. 오늘 모범 납세자 표창 받으러 국세청 갔잖아. 거기서 신재현 만났나 봐. 흔쾌히 승낙했대.”

공민화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호시탐탐 다민이 이 프로그램의 보조진행자 자리를 노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와, 다민 씨가 모범 납세자 표창 받았어요? 진짜 존경스럽다. 나도 받고 싶네.”

오재석이 감탄하자 공민화의 얼굴이 더욱더 구겨졌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세금 내봤자 정치인들 뱃속에 쏙 들어가는데! 아니, 다민이 얘는 호구짓 좀 하지 말라니까 왜 그런 걸 받으러 가?’

공민화가 씩씩거리는 것도 모르고, 남자 둘은 다민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신재현이면 말 한마디만 잡아내도 뉴스거리 된다는 바로 그 사람인데! 다민이가 대체 어떻게 설득했을까?”

“다민 씨가 착하잖아요. 성실하게 세금 내서 모범 납세자 상 받은 것만 해도 그렇고. 진심을 알아준 거겠죠.”

“그래도 그런 사람들은 웬만하면 방송 안 타려고 하거든. 뉴스도 아니고 우린 특히나 예능이잖아. 시간이 짧다고 해도 지금처럼 뜨거운 감자 취급받을 땐 나오고 싶지 않을 텐데.”

“다민이는 법 없이도 살 애니까요.”

오재석은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험한 연예계에서 호구 취급 받던 다민이 안타까웠던 참이다.

지금 이 프로의 보조진행자 역할도 원래는 다민에게 제의가 갔던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경쟁에 밀려나게 되었고.

그런데 다민이 결국 해낸 것이다.

아마 신재현을 방송국에 불러낸 것만으로도 다민의 입지는 크게 올라갈 것이다.

방송국이란 결국 시청률이 권력인 곳이었으니까.

시청률이 나온다고 하면 뭘 해도 용서되는 것이다.

“다민이가 성실하게 산 게 보답 받는 것 같아서 저는 그게 기쁘네요.”

아이돌 판이 얼마나 치열한지 아는 오재석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청률이 얼마나 나올까? 대규모로 특집 편성하면……!”

피디는 흥분으로 몸을 떨며 계획을 늘어놓았지만 오재석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냉정함을 되찾은 후였다.

“그런 분은 나와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너무 부담 주지 말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몰라도 이번에 뽕을 뽑겠다, 그런 생각으로 접근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오재석은 진지했다.

방송인으로서 시청률을 생각하는 마음 역시 같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피디는 감탄한 듯 끄덕였다.

“역시 국민 MC답네요. 시청률만을 쫓은 자극적인 방송은 해악이라는 걸 잊을 뻔했습니다. 그럼요. 나와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죠. 다민 씨가 만들어준 기회인데!”

두 남자가 신나서 으쌰으쌰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공민화는 쉽사리 끼어들지 못했다.

내내 무시하고 다니던 호구, 다민에게 밀렸다는 것에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공민화는 조용히 다짐했다.

‘꼬셔서 친해진다. 그리고 1시간짜리 프로에 같이 나가는 거야! 시청률 20% 찍어보는 거지!’

공민화의 머릿속에는 다민을 이겨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나도 세금 잘 낸다고 기름 좀 치고 시작하면 되겠지.’

다민을 호구 취급한 공민화가 세금을 잘 냈을 리는 없다.

얼굴을 마주한 자리에서 검증할 방법은 없을 테니 거짓말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민이가 신재현을 물었으면 나도 할 수 있어!’

피디와 오재석, 그리고 공민화.

각각의 부푼 꿈과 함께 회의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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