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01화 (201/500)

201화. 성실납세 해주셔서 감사합니다(1)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는 서울청장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지산을 치고 난 후니 뭔가 특별한 동향이 있어서 부른 건가 했는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느긋하게 비서를 시켜서 녹차까지 내오게 했다.

나야 비싼 걸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이 차가 티백인지 비싼 차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차를 마시는 내내 서울청장의 눈빛이 콕콕 찔릴 정도로 날카로워서 나는 어색하게 감상을 말해 보았다.

“……향이 좋네요.”

감상이라고 해 봤자 향에 대한 것뿐이지만.

맛을 품평하자니 떫은 건 매한가지라 뭐라 말을 못 하겠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듯 서울청장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요즘 들어 계속 저런다.

물론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중부청장은 계속해서 공격을 받고 있고, 이제는 사돈의 팔촌뿐 아니라 그의 부하들까지 언론에 끌려 나와 뭇매를 맞고 있으니.

이쪽에 관심 있는 기자들이라면 현 국세청장이 오래 해먹은 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곧 다음 국세청장 자리에 앉을 확률이 높은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을 법도 하다.

그것이 아예 대놓고 총알받이로 내세운 사람이라면 더더욱.

서울청장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지창태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티끌만 한 관심조차 사라졌다.

정확히는 중부청장에게 그 모든 공격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산 회장의 작품일 것이다.

민치호 국장과 서울청장이 의도한 그대로였고.

서울청장은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요즘 불편한 건 없어? 기자들이 쫓아다닌다거나.”

나는 놀라서 차를 마시던 자세 그대로 굳어 서울청장을 바라보았다.

꿈에 그리던 자리가 성큼 다가와서 그런지 서울청장은 눈에 띄게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찌 보면 붕 뜬 것 같기도 했다.

무표정으로 자신의 속내를 가리던 사람이 맞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출퇴근할 때 몇 명이 질문하는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기자들이 아직도 달라붙나? 한 소리 해 줄까?”

서울청장의 배려가 듬뿍 든 목소리가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나는 바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익숙해졌고, 이제 들러붙는 것도 거의 끝물 아닙니까. 곧 다른 화제가 생기면 그쪽으로 가겠죠.”

내가 말하는 다른 화제란 국세청장 청문회, 그리고 국정감사다.

청문회든 국정감사든 국회에서 청장을 불러다 앉혀 놓고 하는 짓이니 나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국정감사 준비하면서 의원실 보좌관이 서류 요청하면 골치 아프지만.

특히 관청 길들이기 한답시고 쓸데없이 많은 자료를 요청하는 의원실도 꽤 있다.

작년까지는 세무서라 괜찮았는데 올해는 어떠려나.

국세청장 후보 청문회가 먼저 끝날 것 같긴 한데, 청문회를 깔끔하게 끝내지 못하면 아마 국정감사 때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국정감사는 국민 눈에 각인될 기회니까.

어찌 되었든 이건 나중 문제고, 청문회 역시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내가 궁금한 건 서울청장이 왜 날 불렀나 하는 것이다.

평소라면 적당한 선에서 본론을 꺼냈을 텐데 오늘은 이야기를 진전시킬 기미를 안 보였다.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다.

“청장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지산을 물어뜯었으니 국세청은 잡은 먹이를 소화하는데 바빴다.

서울청도 마찬가지였는데 나만 유일하게 한가했다.

지산 엔지니어링과 신우현을 공략하는데 너무 열중한 탓이다.

탈세액이 보이는 내 눈도 한몫했고.

그렇다고 다른 팀에 가서 도와주겠다는 소리도 할 수 없었다.

다른 경력자라면 몰라도 나에게서 도움받는 건 꽤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잠깐, 설마 나 한가한 줄 알고 부른 건가?

단순히 차 한잔 마시자고?

“있긴 하지.”

그럼 그렇지.

서울청장이 들뜨긴 했어도 나와 느긋하게 차나 마실 사이는 아니다.

자기 사람인 권 팀장하고 그럴 사람도 아니고.

-달각.

찻잔을 내려놓고 경청하는 자세를 하자 서울청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신 팀장,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나?”

“……예?”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 나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가 나왔다.

내 눈앞에 있는 게 바로 그 무표정하고 냉철한 서울청장 맞나?

내가 경계하듯 주춤하자 서울청장이 피식 웃었다.

“표정 관리 좀 해. 그렇게 헛소리 아니니까.”

“아, 죄송합니다.”

내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는 대충 상상이 간다.

그런데 헛소리 아니라는 말은 대체 뭐지?

내가 보기엔 헛소리가 맞는데.

“신 팀장 일하는 거 나도 지켜봐서 알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그건 그렇다.

급여명세서에서 추가수당이 한계치까지 적힐 정도로 나는 야근을 많이 했다.

바쁘면 밤을 새는 일도 허다했다.

시간적으로 누굴 만나는 것도 불가능했고, 애초에 나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신우현을 잡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왔고, 앞으로는 더한 놈들을 잡겠다는 목표로 달릴 것이다.

“나한테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들어와. 신 팀장이 민치호 국장 사람인 건 국세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밖에서 보면 내 직속처럼 보이거든. 그래서 다리를 놔달라는 얘기가 나한테 와.”

“다리라고요?”

나는 질겁했다.

여기서 나올 얘기는 하나다.

“눈독 들이는 사람이 아주 많아. 우리 청에서는 대전청장이 먼저 전화 왔어. 민 국장한테 연락했더니 대번에 끊어 버렸다는군. 국세청 외부에서는 조달청 차장, 고용노동부 기획조절실장,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수원지검 차장검사…….”

서울청장은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박자라도 맞추듯 직책을 내뱉었다.

하나하나가 다 고위공무원단의 실권직이라 나는 기겁했다.

“그 사람들이 연락 왔다구요?”

“그래. 다들 적령기의 딸 가진 아빠들이지.”

“다들 제정신이랍니까?”

내 반응에 서울청장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당연한 요청이야.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 이 양반들, 신 팀장 급수가 낮으니까 승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채가려고 가만히 있었던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제 행적을 보고도 선보자는 얘기가 들어옵니까? 그게 더 신기한데요.”

나 스스로 말하긴 뭐하지만 나는 훌륭한 신랑감은 아니다.

앞에 뭐가 있든 들이받고 가는 곳마다 태풍을 일으킨다.

고위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가장 싫어할 부류의 하급자일 텐데.

“그런 면에 반한 거야. 우리나라 고위공무원이 다 무사안일주의에 자기 보신만 신경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나는 뜨끔했다.

위에 앉은 사람은 잃을 것이 많다.

잃을 것이 많으면 자동적으로 자기 안위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나랑은 상극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분들이 왜 저를……?”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실적도 있겠다 경력만 채우면 6급 승진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고, 서서히 쌓아온 명성이 이제 확고하게 굳어졌고. 더 시간이 지나 몸값이 확 뛰기 전에 잡겠다는 거지.”

서울청장은 가차 없이 그들을 평가하며 코웃음을 쳤다.

“민치호 국장님은 그런 말씀 없으셨습니다.”

“신 팀장 선까지 가기도 전에 잘라 버리니까. 다른 데에 정신 팔리지 않게 하려는 건 알겠는데 민 국장은 쓸데없이 오지랖을 너무 부려. 어디까지나 신 팀장이 선택할 일 아닌가. 아직 젊고 오를 곳은 많으니 인생의 동반자를 일찌감치 고를 수도 있는 거고.”

서울청장은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는 턱을 괴었다.

“아, 참고로 재계에서도 연락이 왔었어. 10대 재벌 안에 드는 곳.”

“아니, 재벌이 저를 왜요? 지산 터는 거 못 봤답니까?”

“금양 그룹. 지산을 적대하는 그룹이잖나. 옛날부터 사업체가 겹쳐서 시장 다툼도 많이 했고. 지산이 휘청거리니 신 팀장에게 호감이 생겼고, 가만 보니 인척 관계가 되면 유리하겠다 싶은 거지.”

“그건 꿍꿍이잖습니까. 어떻게 결혼에 그런 속셈을…… 아.”

나는 질문을 삼켰다.

그쪽 동네는 이런 결혼이 흔했었지.

서로 이득이 되면 동맹을 맺듯 결혼을 하는 관계.

“신 팀장에게 직접 접촉하지 않은 건 칭찬해줄 만해. 그랬다간 바로 신 팀장 눈에 띄어서 다음 타겟이 되었겠지.”

“재벌 다음에 바로 재벌을 칠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엔 윗분들께서 많이 무리한 걸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야 탈세범이 보이면 탈탈 털어 버릴 예정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번 지산 건만 해도 온갖 이해관계를 적절히 이용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역시 신 팀장은 그 판단력이 마음에 들어. 눈먼 칼이 아니라서.”

서울청장은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울 줄 몰랐다.

“그래서, 생각이 있나? 누군가 찔러봤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점점 연락이 많이 오거든. 자리라도 마련해 줘?”

피곤함이 몰려오는 느낌이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직은 할 일이 많습니다.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할 거고, 지금은 일에만 신경을 쓰고 싶습니다. 절 높게 봐주시는 거야 감사하지만 어떤 제안이 들어와도 지금은 다 거절할 겁니다.”

서울청장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짐작했다는 투다.

“그럼 싹 거절해 두지. 소문이 퍼지면 당분간은 맞선 제안은 없을 거야. 몸값을 더 올리고 결혼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러니까 상대 집안을 보고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 신우현의 사례가 있어서인지 너무 잘난 집안은 내가 거부감이 들었다.

“그럼 결혼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맞선이 본론 아니었습니까?”

“시킬 게 있다고 했잖아. 맞선을 내가 강제로 시킬 순 없지. 결혼 얘기는 나한테 자꾸 연락이 오니까 언젠가 한 번 할 필요는 있었어. 신 팀장한테 온 제안을 내가 마음대로 거절할 수는 없잖아.”

“그런 거라면 마음껏 거절하셔도 됩니다.”

머리만 심란하게 하는 맞선 얘기보다는 일 얘기가 훨씬 낫다.

그런데 서울청장의 표정이 이상했다.

세무 조사 같은 평범한 일을 시키려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불안한 마음에 발을 빼려는 순간 서울청장이 장난기 도는 눈빛을 했다.

“이번에 모범납세자 표창식 있거든? 그거 표창 좀 해 줘.”

“아, 청장님!”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건 원래 청장님이 하시는 연례행사 아닙니까! 제가 나갔다가 무슨 소릴 들으려구요!”

고액 체납자는 명단을 공개해 개망신을 준다면, 반대로 성실하게 세금을 내는 사람은 표창장을 준다.

특별한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고 그저 명예뿐이지만 의외로 받는 사람은 좋아했다.

본성이 선한 사람들이어서 그런가.

각 관할서의 세무서장과 청장이 모범납세자를 초대해 사진도 찍고 표창장도 주는데 일개 팀장인 내가 자격이 될 리가 없다.

비웃음만 안 사면 다행이지.

그러나 서울청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좋아할걸? 그 왜 가끔 연예인 초대해서 일일 청장 시켜주고 표창장도 대신 주고 그런 이벤트 하잖아.”

“그건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하는 거죠.”

“마찬가지야. 지금 국세청의 이미지는 다 신 팀장이 만든 거나 다름없으니까.”

서울청장은 웃음기를 지우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긴 하다.

“직급이 문젠가? 나 같은 사람한테 받는 것보단 신 팀장한테 받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은데. 납세자들은 내 이름이 뭔지도 모를걸. 근데 신 팀장한테 받으면 자랑하고 다닐 수도 있잖아.”

“……청장님.”

아무리 그래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청장이 공석이거나 바쁘면 그 밑의 차장이나 국장 같은 실권자가 대리할 수야 있지만 팀장인 내가 가당키나 한가.

설득을 위해 운을 뗐으나 청장은 아예 한술 더 떴다.

“아예 말 나온 김에 일일 청장 하겠나?”

“안 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받아쳤다.

“그럼 일일 청장 하든가 표창장 주든가 둘 중 하나 선택해. 어찌 되었든 언론 앞에는 내세워야겠으니.”

“그게 그거 아닙니까…….”

내가 앓는 소리를 내자 청장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신 팀장과 민 국장에게 주는 선물이야. 밀어줄 때 받아. 본청 가면 얼굴 보기 힘들 것 아닌가.”

이렇게까지 말하면 거절하기가 난감하다.

청장 나름대로 고마움의 표현인 것 같고.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다.

나는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표창장만 주겠습니다. 식순은 청장님께서 주도하십시오.”

“잘 생각했어.”

이 정도만 해도 괜찮다 이건가.

서울청장은 어쩐지 들떠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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