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200화 (200/500)

200화. 용서는

-끼릭.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리자 연식이 오래된 차답게 짧게 톱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멀미로 새파래진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아이구야, 그래도 오늘은 길이 안 막혀서 그런가 괜찮았다.”

어머니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먼저 운을 뗐다.

원래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는데 몸이 약해진 후로는 1시간 정도 타면 멀미를 한다.

나는 조용히 어머니의 등을 문질렀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어머니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잠깐만.”

어머니가 잠시 벤치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차 뒷좌석에서 준비해 온 것들을 꺼냈다.

“가자.”

나는 한 손에 쇼핑백을 들고 다른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는 납골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어서 오세요. 여기 서명하시면 됩니다.”

이미 전화를 해 둔 터라 내 이름을 말하자 직원은 바로 서류를 내밀었다.

제사상을 차리기 위해 지하 재례단을 빌리기 위한 것이다.

내가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직원은 흘끔흘끔 내 얼굴을 엿보았다.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길래 내가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왔을 땐 죄송했습니다. 많이 시끄러웠죠?”

“아, 아니에요! 볼일 끝나고 나가신 후에 그 여자분께서 미안하다면서 좀 쥐여 주고 가셨거든요.”

나도 신경 쓰이긴 했다.

그 난리를 피웠는데 정신이 없어서 집에 도착하고 보니 생각이 났던 것이다.

이건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했는데 지서연이 수습을 하고 갔나 보다.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 이야기는 온 국민이 아는 막장 드라마가 되었다.

뒷얘기 어떻게 됐냐고 묻는 댓글이 많은 판국에 며칠 전 납골당에서 직관까지 했으니 궁금할 만도 하지.

“그 후에 별일은 없었죠?”

지서연이 알아서 잘 처리했겠지만 혹시나 싶어 물었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서 계속 여자분한테 들러붙으려고 했는데 여자분이 매몰차게 떠났거든요? 한동안 저어기 벤치에 앉아 있더라고요. 어느 순간 보니까 없어졌길래 갔구나 했는데 바로 여자분이 돌아와서 미안하다고 수습하고 가셨어요. 어디서 지켜보고 계셨나 봐요.”

“……그렇군요.”

사랑해서 결혼까지 했는데 마음을 쉽게 떼어내진 못했겠지.

그래도 마무리하고 간 걸 보면 알아서 잘 일어설 것 같다.

그쪽은 신경 꺼도 될 것 같고.

“여깄습니다. 그리고 유골함 자리를 옮기고 싶은데요.”

“아!”

작성한 서류를 넘기며 묻자 직원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입을 막았다.

“안 됩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그 여자분이 자기가 돈 낼 테니 자리 옮기고 싶다고 하셔서…….”

“저희 아버지를요? 설마 옮겼어요?”

동정인지 호의인지는 몰라도 지서연에게 뭘 받고 싶지는 않다.

어찌되었건 지서연의 가정을 깬 건 나니까.

게다가 유골함 자릿값이면 못해도 300은 든다.

공무원이 재벌집 딸내미에게 그런 호의를 받는다?

게다가 내가?

당장 기사감이다.

“설마 그걸 받으신 건 아니죠?”

내가 다급하게 묻자 직원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에이, 제가 설마 옮겨드렸겠어요? 신재현 씨 얘기는 기사로도 매일 보는데요. 절대 그런 거 안 받으실 분인 건 알고 있어요.”

뿌듯한 얼굴로 호호 웃는 직원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도움이 되었나요?”

“절 살려 주신 겁니다. 만약 받았으면 그 돈 돌려주러 가야 해요.”

“다행이네요.”

이건 뿌듯할 만하다.

순간 진짜 아찔했으니까.

“봉안 자리는 어디로 옮겨드릴까요? 여기 자리표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이쪽 라인 추천드려요.”

직원이 코팅된 배치표를 내밀었다.

눈높이에 위치한 층은 역시 시작가격부터가 확 달랐다.

그래도 내내 남의 발에 치이는 자리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벼르고 벼르며 모아온 것이니 좋은 자리로 해야지.

“여기 가운데 번호요.”

“아, 거기 좋죠. 그럼 신청서 드릴게요.”

드디어 옮기는구나.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형편이 안 되어 좋은 자리에 모시지 못한 것.

그래도 당시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여윳돈이 생기면 어머니 병원비부터 해결해야 했으니까.

아버지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살아계시는 어머니가 더 중요했다.

그것이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 마음 한쪽을 짓누르고 있었는데 이제야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오후쯤 옮길 수 있을 거예요. 괜찮으실까요?”

“네. 괜찮습니다.”

“그럼 정확한 시간은 확인해 보고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사진 앞에 섰다.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유리장을 쓰다듬었다.

“……당신 잘 있었어? 나는 너무 잘 있어서 당신한테 미안할 정도야.”

어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점점 물기에 젖었다.

“이제 애들은 걱정하지 마. 재현이는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해졌어. 우리가 어릴 때 못 준 사랑, 많은 사람들한테서 받고 있어.”

어릴 때 형에게 모든 지원을 몰아줬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뭐라 입을 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어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한 놈은 제 앞길 스스로 망쳐 버렸어. 모두 우리 탓이지. 잘못 가르쳤으니까. 그래서 내가 유독 미련이 있었는지도 몰라. 그게 잘못된 거였는데.”

“엄마…….”

“이젠 나도 안다. 무작정 감싸주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걸.”

“……부모잖아. 자식은 부모를 버려도 부모는 자식을 못 버린다고 하더라.”

“그래도 미련을 놨어야 해. 너도 내 자식이니까.”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동안 겉으로는 밝은 척, 신경 쓰지 않는다고는 그래도 부모 마음이 어디 그렇게 쉽겠는가.

가끔 밤에 몰래 형을 생각하며 운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금 완전히 형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놈은 제 업보 돌려받는 거다. 남들에게 온갖 민폐 다 끼치고 하던 대로 받는 것뿐이야. 나는 부모로서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이젠 나도 그놈은 용서하지 못하겠구나…… 재현아.”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내 아들은 너 하나다. 없는 놈일랑 잊어버리고 둘이서 행복해져 보자꾸나.”

아버지 유골함 앞이기 때문일까.

며칠 전 그 감정이 아직 추슬러지지 않아서일까.

괜히 울컥해서 눈물이 나왔다.

“자, 네 아빠 기다린다. 얼른 상 차리러 가자.”

어머니가 앞장서서 지하로 나를 이끌었다.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 어머니 앞에서 자식은 애인가 보다.

나는 속절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단으로 향했다.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것들을 눈물에 담아 떨쳐냈다.

발목을 잡고 있던 무언가가 풀린 느낌이 들었다.

상을 차리고 절을 하고 음식을 나눠 먹고 소각장으로 향했다.

쇼핑백에는 이제 딱 하나의 물건만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그놈 결혼식에 가려고 밤잠까지 줄여 가며 돈을 모았던 원인.

정장이다.

물론 이것도 그렇게 고가는 아니다.

시장통에서 파는 일이십만 원짜리 저가는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비싼 걸 살 수도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아버지가 골라둔 브랜드였다.

결국 아버지가 사지 못하고 돌아가신 그 정장을 꺼내어 어머니에게 건넸다.

어머니는 정장을 한 번 손으로 쓸어보더니 소각로에 넣었다.

관리자가 흰 장갑을 낀 채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불을 붙였다.

섬유가 타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소각로에서 피어올랐다.

“으이구, 이 양반. 저세상 가서 호강하네.”

어머니가 연기를 올려다보며 괜히 면박을 주었다.

***

-지산 엔지니어링의 신우현 이사가 잠적한 지 닷새가 지났습니다. 바로 구속했어야 한다는 정재계의 비판에 검찰은 주소지가 확실하며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하여 구속 수사하지 않았을 뿐이라며, 도주의 의사가 확인된 이상 즉시 구속영장을 신청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검찰은 수배를 내려 사라진 신우현 이사를 쫓는 한편, 지산 엔지니어링에 본격적인 압수수색을 진행했습니다.

-형제의 난, 동생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형제의 난이라고 보기엔 이번 경우는 좀 다릅니다. 어찌 보면 형의 잘못을 동생이 징치한 것이라고 봐야 하겠죠. 힘들었을 결정을 내린 신재현 팀장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지산 그룹에 대한 대규모 세무조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국세청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세금 고지서를 보내는 한편, 위법 사항이 확인된 건은 검찰에 고발 조치 한다고 밝혔습니다.

-지산 엔지니어링의 신우현 이사가 경기도 용인의 한 모텔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당시 그는 일주일 전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모습 그대로였으며 즉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지산 그룹의 지창태 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낡은 모습을 벗어 버리고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는 기업이 되어 국민 여러분께 갚아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른 방침으로 지창태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부회장인 장남 지도석이 그룹 경영을 도맡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도석 부회장은 그간 후계자로…….

회장 지창태는 한옥처럼 꾸며진 찻집으로 들어서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연일 뉴스에서는 지산 그룹과 신우현 이사의 일로 시끄러웠지만 정작 그 누구도 둘째 딸 지홍연은 언급하지 않았다.

가장 기사화하기 좋은 직계가족인데 말이다.

덕분에 지홍연은 조용히 검찰 조사를 받는 중이었다.

태도도 성실하고 협조적이니 구속 수사도 되지 않았다.

재판에서는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 군단을 선임할 예정이니 그리 큰 걱정도 없었다.

이 기회에 자연스럽게 장남에게 그룹 경영도 물려줬겠다, 지산의 이미지와 주가가 하락한 것만 빼면 꽤 선방이었다.

물론 지창태는 가만히 당하고 있을 사람은 아니다.

둘째 딸을 건드린 중부청장은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드르륵.

찻집은 방음 처리된 벽으로 나뉜 개별 룸이 있는 구조였다.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최적인 자리다.

보통은 무언가 얘기할 것이 있으면 술자리를 잡는데 상대가 술은 싫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나라에 지창태의 술 약속을 싫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신재현처럼 아예 겁을 상실한 놈이거나 지금 만날 사람처럼 힘이 있는 사람이거나.

“어서와요, 지 회장.”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동문 의원님.”

먼저 자리에 앉아 차향을 즐기던 대선 후보는 침착하게 지창태를 맞았다.

지창태는 먼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하동문이 내미는 찻잔을 받았다.

“목련꽃 차입니다. 여름엔 속이 냉해지기 쉬우니 따뜻한 성질을 가진 목련꽃 차가 제격이지요.”

“하하, 저같이 나이 먹은 사람에게는 아주 제격입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둘은 가벼운 인사를 섞으며 한 잔의 차를 비웠다.

본격적인 용건을 꺼낸 것은 막 잔이 새로 채워졌을 때였다.

“국세청장 임기가 곧 끝난다지요?”

“한 달 내로 청문회가 열릴 거라고 합디다.”

“의원님, 국세청장으로 누가 나올지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그쪽은 워낙에 그들만의 세상이라서.”

게다가 요즘엔 더더욱 건드리기가 어렵다며 하동문이 한탄을 했다.

“청장엔 왜 관심을 가지십니까? 지 회장이 미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반대입니다, 의원님. 절대 국세청장이 되선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굽니까?”

“중부청장 손경진입니다. 다른 그 누가 되어도 상관없지만 그 작자만큼은 절대 청장 자리에 앉는 걸 볼 수 없습니다.”

“이번에 많이 쌓이셨구만.”

하동문은 천천히 찻잔을 만졌다.

지창태가 재촉했다.

“이번에 정계에 뿌린 것은 많은데 이렇다 하게 건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걸 이번 공작에 사용했으면 합니다.”

일대의 세무조사를 앞두고 지창태는 많은 돈을 뿌렸다.

오로지 세무조사의 목적과 뒷내용을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땅히 유익한 정보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 대가를 중부청장 죽이기로 받겠다는 뜻이다.

찻잔을 어루만지던 하동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것이 있었는데 가는 것이 없으면 도리가 아니지요. 지 회장의 근심을 덜어드리겠습니다. 중부청장, 그는 절대 수장이 되지 못할 겁니다.”

제1야당의 중진 의원이 약속했다.

설령 후보로 지명된다 해도 청문회를 버티지 못하리라.

지창태는 흡족하게 웃었다.

물론 국세청장 후보는 이미 서울청장 오낙현으로 내정된 상태였으니 그의 청탁은 소용없는 것이었다.

지창태가 뿌린 수십억은 의미 없이 날아갔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 모든 일이 하나의 판 위에서 짜여 있었음을.

원하는 사람을 청장으로 세우고, 대기업을 쳤음에도 무사히 살아남은 승리자가 있었음을.

민치호와 신재현, 진정으로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그 둘이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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