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99화 (199/500)

199화. 가해자가

지서연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아버지에게 향했다.

며칠 전 잔뜩 화가 났을 때와는 달리 지창태 화장은 한층 풀어진 얼굴로 서재에서 스카치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빠가 이미 손을 썼구나.’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지서연은 아버지가 쉽게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아빠, 우리 우현 씨 말인데…….”

“그건 이미 끝난 얘기다.”

지창태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막내딸로서는 처음 듣는 완고한 거절이라 지서연은 당황했다.

“아빠, 왜 그래? 우현 씨 저렇게 잡혀가게 놔둘 거 아니잖아.”

“…….”

막내딸의 호소에도 회장은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이번 일은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다.

억지를 부려 신우현과의 결혼을 성사시켰을 때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지서연은 덜컹하는 마음이 들었다.

둘째가 조사를 받고 경영에서 물러나면 그만큼 신우현이 영향력을 넓힐 수 있다.

그렇기에 제보한 것이었고.

신우현이 잡혀가면 이 모든 계획이 허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빠는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정치인한테 부탁하든 검찰을 구워삶든……!”

“네가 그런 얼굴로 억지를 부리면 나는 항상 너에게 져줬다. 하지만 이번엔 안 돼.”

“왜 안 된다는 건데! 내 남편이고 아빠 사위야!”

“지금까지는 네 억지를 들어줘도 회사에 지장이 없었지만, 이번엔 회사의 중대사가 걸려 있으니까.”

지서연은 울먹였다.

회장은 막내딸의 눈물을 참지 못 했으니까.

눈물 한 두 방울이면 아버지는 항상 자신의 편을 들어줬다.

그러나 회장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아예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나라도 도울 거야!”

조금 무모한 짓을 해 볼 생각이었다.

사위는 구하지 않더라도 자신은 못 본 척할 수 없겠지.

지서연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회장이 입구에 서 있던 비서에게 명령을 내렸다.

“빼앗아.”

“뭐? 악! 이것 놔! 야! 너 지금 누구한테 손을 대는 거야!”

비서는 거리낌 없이 지서연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갔다.

“아빠! 내 남편을 구해야 된다고!”

지서연은 소리를 빽 질렀다.

이런 취급은 처음이었다.

“네가 아무리 네 엄마를 닮은 얼굴로 울어도 이번만큼은 안 돼. 그러게 형이 아니라 동생을 꼬시지 그랬니. 그럼 우리 회사는 더욱 큰 도약을 이뤘을 텐데.”

회장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신재현 짓이야? 내 남편 잡아가겠대? 아무리 그래도 아빠가 그걸 허락하면 어떻게 해!”

“서연아, 판을 짠다는 건 말이다. 그 아이처럼 하는 거야. 단순히 상대가 내 마음대로 움직여줄 거라 생각하면 안 돼. 지금처럼 예상을 벗어나면 속수무책이 되잖니.”

“아빠는 나한테 그런 걸 가르쳐준 적이 없잖아! 오빠에게만 후계자 교육을 했으면서!”

“신재현이란 놈이 어디서 교육을 받아서 그런 판을 짰겠니?”

지서연은 말문이 막혔다.

말로도 이길 수 없고 눈물로도 이길 수 없었다.

아버지의 뜻을 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전략실에 명령해서 보고서가 아니라 수집한 모든 자료를 올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지산의 입장에서 벗어나 생각을 해 봤어. 어느 정도 일이 진행돼서일까, 뭔가 다른 게 보이더구나.”

“아빠, 제발…….”

“그 아이가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어. 어쩌면 이 흐름이 그 아이의 의도대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런 건 알고 싶지도 않아! 지금 중요한 건 우리 우현 씨라고!”

“그래서 얘기하는 거다.”

회장은 씩씩거리는 딸을 달랬다.

“서민 가정의 사위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오로지 너의 행복 하나만을 위해 허락한 결혼이야. 그것만으로도 나는 너에게 할 만큼 했다. 알고 있잖니.”

“아빠!”

“더는 안 된다. 나는 네 남편을 넘겨주기로 거래했어. 그것이 그룹의 회장인 나의 결정이다. 네 아버지로서는 실망스러울지 몰라도.”

“실망? 실망 정도로 끝날 것 같아?”

“아니면 어쩌겠니?”

회장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막내딸을 응시했다.

“지산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겠니? 네가 누리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겠어? 그 정도로 네 사랑이 진솔하다고 내 앞에서 얘기할 수 있겠니?”

사랑과 풍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다.

지서연은 당연히 사랑을 선택한다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는 요리고 빨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지. 당연하다. 그런 건 고용인에게 맡기면 되니까. 그런 기술을 배울 시간에 다른 걸 하는 게 낫지. 그런 네가 다른 서민처럼 남의 밑에서 월급 받으며 일하고 네 옷방보다 작은 단칸방에서 살아갈 수 있겠니? 잘 생각해 봐라.”

지서연은 혼란에 빠졌다.

왜 당연하게 사랑을 선택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건지.

“너는 내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특권을 손에 쥐었다. 네가 노력해서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내가 준 것을 빼면 네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니?”

지서연이 대답하지 못하자 회장은 그것 보라는 듯 피식 웃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물질적 여유,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나 행복이 되는 거야. 네가 한 것은 그저 유희다. 남편에게 너무 마음 쏟을 필요도 없고 그를 위해 네가 모든 걸 내던질 필요도 없어.”

회장은 오냐오냐 키워왔던 딸에게 처음으로 가르침을 내리고 있었다.

그동안은 소꿉놀이를 지켜보는 심정으로 딸을 지켜봤지만 이제는 꿈에서 깨게 해 줘야 했다.

딸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걸 볼 순 없었으니까.

고개를 푹 숙이고 침묵한 딸을 본 회장은 비서에게 턱짓했다.

“방에 데려다줘.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차단하고. 딱 3시까지만 참거라.”

회장의 명령에 지서연은 결혼 전까지 자신이 쓰던 방으로 안내되었다.

문밖에는 경호원이 지키고 있어서 사실상 연금 상태였다.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라 지서연은 내내 TV만 보았다.

남편이 모든 방송국에서 가차 없이 물어뜯기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지난 후, 핸드폰을 돌려받은 지서연은 서둘러 자택을 나왔다.

남편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만 43통이다.

도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이번엔 남편 쪽에서 받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검찰로 끌려가는 것을 실시간 방송으로 지켜봤으니.

“어디로 모실까요? 사장님.”

“집으로, 아니아니 검찰…….”

지서연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신재현 : 신우현과 함께 갈 곳이 있습니다. 궁금하면 오십시오.]

뒤이어 자세한 주소가 적힌 문자가 도착했다.

지서연은 홀린 듯 운전 기사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여기로. 여기로 가 줘.”

지금 당장 신우현이 보고 싶었다.

***

“당신…… 어떻게 알고 왔어?”

신우현은 더듬더듬 물었다.

항상 자신이 물으면 웃는 얼굴로 대답하던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신우현은 초조하게 다가섰다.

“저놈이 데려온 거야? 이런 데는 당신한테 안 어울려. 어서 가자.”

신우현이 아내의 손을 잡아끌었고 지서연이 그 손을 홱 뿌리쳤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신 왜 그래. 화났어?”

신우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방금 나눴던 대화를 복기했다.

그 대화 중에 아내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 있다.

신우현은 삐걱거리는 머리를 열심히 돌렸다.

그 원인은 금방 나왔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그, 여보. 내 말은…….”

“알고 있었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지서연이 변명을 잘라냈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도 상관없었어. 당신의 야망이 좋았고, 미래를 얘기하는 그 목소리가 좋았으니까.”

지서연은 여전히 눈을 맞추지 않았다.

“오늘 아빠가 그러더라. 당신을 사랑하는 게 맞냐고. 그런데 나는 당신을 위해 희생할 자신이 없어.”

“서, 서연아.”

“나 자신을 걸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지산을 버리고 돈 없고 집 없는 비참함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서연아, 대체 왜 그래. 나 좀 봐. 내 얼굴 보고 얘기해!”

아까 아버지의 유골함 앞에 섰을 때와는 정반대의 태도였다.

신우현은 절절한 목소리로 지서연에게 매달렸다.

“서연아, 제발!”

“이미 알겠지만 지산은 당신을 버렸어. 그리고…….”

지서연은 울음을 삼킨 뒤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도 당신에게서 희망을 버릴게. 당신의 꿈에는 같이할 수 없을 것 같아.”

지서연은 눈물을 닦고서 돌아섰다.

신우현이 억지로 손을 붙잡았지만 저 멀리서 달려온 운전기사가 신우현을 떼어냈다.

“현관문 비밀번호 바꿀 거야. 어디에 묵을지 주소만 알려줘. 내 비서가 이혼 서류 가지고 갈 거야.”

“서연아, 서연아!”

신우현은 절박했다.

지금 지서연을 잡지 못한다면 정말 끝이다.

지산의 꼬리표가 없는 자신을 거들떠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놔! 난 남편이야! 남편이 아내하고 얘기 좀 하겠다는데 네가 왜 막아!”

“더 이상 남편이 아니십니다. 저는 지서연 사장님께 고용된 몸이고요. 이사님, 얌전히 물러나십시오. 경찰까지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새끼가……!”

신우현은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운전기사를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경호도 겸하고 있는 기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사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신우현을 제압했다.

신우현은 손을 허우적댔다.

“서연아, 네가 날 버리면 안 되지. 지서연!”

사람 없는 납골당 복도에 신우현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형제의 아버지가 사진 속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후우.”

지서연은 건물을 나오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산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얘기는 다 끝나셨습니까?”

지서연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재현이 입에 담배를 문 채 건물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지서연은 얼른 눈물을 훔치고는 신재현에게 다가갔다.

신재현 역시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팀장님, 불 빌려드릴까요?”

신재현이 문 담배에는 불이 붙어 있지 않았다.

라이터를 찾아 가방을 뒤적이던 지서연을 신재현이 만류했다.

“담배 끊었습니다. 물고만 있는 거예요.”

“안 필 거면서 왜 물고 있어요?”

“담배가 너무 당겨서요. 근데 약속이 있어서 필 수도 없고.”

신재현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옆의 쓰레기통에 뱉었다.

“하긴 그렇네요. 그럼 혹시 남는 담배 있으면 좀 주실래요?”

“……담배 피우십니까?”

“그이가 싫어해서 자제했는데, 아주 절실하게 담배가 당기네요.”

신재현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통째로 건넸다.

“다 주게요?”

“있으면 피고 싶어질 것 같아서요.”

지서연은 순순히 담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자 신재현이 기댔던 등을 뗐다.

“이런 상황에 안 좋은 얘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세요.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으니까.”

“……지서연 사장님은 탈세로 저랑 만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한테 죄책감이라도 느끼나요? 남편 저렇게 만들어서.”

“아니요. 모든 건 신우현이 자초한 거고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죠.”

냉정하게 선을 긋는 신재현을 보며 지서연은 웃었다.

“하지만 그 집안에서 탈세액이 적은 분을 만난 것이 너무 의외라서요. 나중에 만났는데 탈세액이 있으면 슬플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안 좋은 길에 눈떴나, 신경 쓰일 테니까요.”

“훗, 걱정 말아요. 이번 일로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지서연은 담배 끝으로 신재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적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것.”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신재현은 씁쓸함과 후련함이 섞인 눈으로 납골당 입구를 한 차례 바라보더니 타고 온 차로 향했다.

“아버지, 다음엔 좋은 일로 올게요.”

납골당 간판을 보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신재현은 기어를 넣었다.

왔을 때는 두 명이었지만 떠날 때는 한 명.

애증과 회한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차는 노을이 길게 늘어진 길 위를 한층 부드럽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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