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97화 (197/500)

197화. 아니다

지산 엔지니어링의 임직원이 모인 강당, 사장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지산 엔지니어링은 언제나 직원 여러분과 함께할 것이며 사회 정의와 발맞추어 물질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할 것입니다.”

지산 엔지니어링의 임직원이 모인 강당, 사장이 연설을 하고 있었다.

평생을 지산 그룹에 몸담아온 경영자로 머잖아 이 회사를 이어 받을 신우현의 사수 역할을 맡고 있기도 했다.

세무조사와 여론 악화로 지산이 흔들리는 지금, 그는 능숙한 경영인답게 직원들부터 다독였다.

상여금을 풀고 휴가를 보내기도 하고 특식을 준비하고.

직접 회사를 돌며 직원들을 다독였다.

자고로 밖에서 공격을 받으면 안에서는 하나로 뭉쳐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사장은 그 일환으로 직원들을 강당에 모은 것이다.

연단 위에 앉아 있는 임원들은 가운데에 자리한 지산의 막냇사위를 흘끔거렸다.

총수 일가가 개판인 건 임원에겐 익숙한 사실이지만, 이번에 무사히 철퇴를 피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작 장본인인 신우현은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출석할 걸 그랬나.’

며칠 전 서울청에서 출석 요청서가 왔다.

신재현이 보낸 것이 분명한데 당연히 갈 생각은 없었다.

얼굴조차 마주치기 싫은 그놈이 조사관이랍시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추궁하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여론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답이 보이질 않는다.

‘당신은 걱정할 것 없어. 이런 일쯤은 지산의 힘이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니까.’

오늘 아침 아내인 지서연은 잔뜩 굳은 얼굴로 아버지를 보고 오겠다며 나갔다.

어떻게든 자신을 보호할 것이라고 했다.

그 후로 감감무소식이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회장의 자택으로 전화해도 사용인이 받고서 모른다며 끊어 버렸다.

불안함이 척수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지서연은 나한테 반해 있어. 절대 날 버리지 못해.’

스스로 위안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 신우현은 잘 알았다.

당장 자신부터가 가족을 버리고 나오지 않았는가.

회장이 과연 자신을 끌어안아 줄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지서연은 어디까지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까.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절대로 신재현에게 굽히지 않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자신이 옳고 신재현이 틀렸기 때문이다.

아니, 틀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까지 버리며 나온 자신의 인생은 뭐가 되는가.

‘내 선택은 언제나 옳았어. 이 자리까지 온 게 바로 그 증명이야.’

신우현이 생각에 고심에 빠진 사이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흔들었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방금 전까지 연설을 하던 사장이었다.

“이사님께서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직원들을 안심시켜 주세요.”

사장이 일부러 만든 자리다.

불안을 종식시키고 그룹의 굳건함을 보일 수 있는 기회.

‘나는 신우현이야. 한국대학교 출신의 우수한 인재이자 앞으로 지산의 중역이 될 몸이라고. 이제 시작인데 이렇게 무너질 순 없어.’

신우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사장이 반쯤 벗겨진 머리가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지산을 걱정하는 마음에 일부러 직계 가족인 신우현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인 것이었지만, 신우현은 그것마저 고까웠다.

‘평생 일해서 사장을 달아봤자 마름일 뿐이야. 나는 지주가 될 거다.’

그러자 어느 정도 불안감이 가라앉았다.

살다 보면 위기가 한두 번 올 수도 있고, 그것을 잘 극복하는 것이 곧 능력이다.

다른 재벌 3세들은 마약을 해도 살아남고 뺑소니를 쳐도 풀려난다.

자신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그저 운 좋게 금수저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놈들보다 자신이 못할 게 뭐가 있는가.

“우리는 지금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인식하지 못했는데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하지만 인생에는 찬란한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바꿀 것이고 이 손으로 찬란한 순간을 쟁취할 것입니다.”

그래도 달달 외운 보람이 있었다.

입에서 술술 나온 연설문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던 그때, 강당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끼이익.

침묵 한가운데서 그 소리는 수면에 일렁이는 파문처럼 뒤에서부터 앞으로, 혼란을 퍼뜨렸다.

문 너머의 조명에 역광이 져 사람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직원들의 얼굴에 번지는 공포에서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저 인물이 누구인지.

신우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강당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에 휩싸였다.

-뚜벅뚜벅.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은 중앙의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단 한 명의 움직임에 그 누구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한 명인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압도당하듯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남자가 연단 앞까지 다가왔다.

“뭐야, 혼자야?”

신우현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내려다보는 모양새였다.

연단 밑에 선 남자는 닮은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저랑 얘기 나누시죠.”

신재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신우현은 비웃음으로 거절했다.

“내가 왜? 이제 와서 내 입에서 무슨 말을 듣고 싶어?”

신재현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저는 지금 사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지산 엔지니어링의 신우현 이사님,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야기 좀 하시죠.”

“아, 그러십니까? 공무라면 할 일을 하시죠. 뭐 물어볼 게 더 남았습니까?”

신우현은 억누른 잇새로 존댓말을 내뱉었다.

정말 싫다는 표정이었다.

신재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연단 위로 올라왔다.

같은 눈높이가 되자 신우현은 대놓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줄이더니 반말로 내뱉었다.

“내가 너 따위랑 1:1로 얘기할 것 같냐? 저번에 그렇게 뒤통수를 쳐 놓고?”

녹음본이 유출된 후 신우현은 단 둘만 남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신재현은 차디찬 눈에 경멸을 실었다.

“후회할 짓을 하네. 그럼 그렇게 해라.”

미련 없이 몸을 돌린 신재현은 강당 입구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 됐습니다. 들어오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르르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연단으로 다가오더니 양옆에서 신우현의 팔을 꽉 붙잡았다.

“서울지검에서 나왔습니다. 횡령 및 비자금 조성 의혹이 있어 동행을 부탁드립니다.”

“뭐라고요?”

신우현이 당황한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이사들은 놀란 얼굴로 입을 쩍 벌린 채 지켜보았고, 직원들의 바늘 같은 눈빛이 콕콕 박혔다.

수백 명의 직원들 앞에서 이런 추태라니, 신우현은 이를 빠득 갈았다.

“놔! 놓으세요! 이렇게 무작정 잡아간다니 말이 돼? 내 변호사하고 이야기 하라고!”

다른 재벌 3세가 다짜고짜 연행당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출석 요구서가 오면 변호사와 동행하여 출석하고, 변호사가 떠들면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만 온다고 들었다.

감히 지산의 사위를 지산의 건물에서 끌어내려 하다니.

수사관 주제에 오만하다.

“신 이사님, 가셔야 합니다.”

“뭐예요? 사장님, 지금 무슨 말을…….”

사장이 조용히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신우현이 놀라서 돌아보자 사장은 이미 짐작한 얼굴이었다.

심장이 불안함으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지금 사장이 뭐라고 한 건가?

얼른 변호사를 부르고 수사관을 돌려보내도 시원찮은 판국에 저들 손에 자신을 넘기겠다는 것 아닌가.

그때 신재현이 가만히 다가와 충혈된 눈동자를 들이밀었다.

야근으로 시달린 눈에는 피곤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번들거리는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너는 뒈졌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우현 이사님, 아직 소식 못 들으셨군요. 지산은 당신을 버렸습니다.”

“……지랄하지 마.”

신우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푹 빠진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는 회장의 사랑받는 막내딸인데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어디서 또 수작질이야? 거짓말 하지 마.”

지금 이것은 함정이다.

순순히 끌려갔다간 저놈의 술수에 놀아나 비자금이고 횡령이고 전부 인정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회장한테 전화해 봤습니까? 그쪽에서 구체적인 도움을 주던가요? 지산이 자랑하는 법무팀의 변호사 자문은 어딨습니까. 이사님이 이렇게 끌려가리라는 건 전략실에서 다 예상했을 텐데요.”

아까부터 애써 외면해왔던 불안감이 쩌억 아가리를 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쪽에서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이, 신재현의 말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버림받을 것 같아? 내가 누군데.”

신재현이 수사관을 향해 가볍게 고갯짓했다.

악에 받쳐 버티던 신우현은 말 그대로 질질 끌려 나갔다.

수천만 원 하는 고급 브랜드 정장이 볼품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신우현처럼.

“아니, 잠깐만! 변호사 불러! 야!”

신우현은 끌려가는 중에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그래도 지산이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막상 가더라도 이앤박 같은 최고의 변호사 군단이 붙으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

‘첫째는 구속을 피하고 둘째는…….’

그러나 그 희망은 건물을 나서는 순간 슬그머니 쪼그라들었다.

기자, 기자, 그리고 또 기자.

50명은 족히 넘는 기자의 무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지산의 돈이 들어간 언론이었다.

자신을 옹호해야 할 언론에서 앞장서서 마이크를 들이대고 있었다.

신우현은 저도 모르게 뒤로 돌아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주위를 둘러싼 수사관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기자의 무리를 바라보는 신우현의 뒤로 신재현이 스윽 다가왔다.

“내가 부른 거 아니다. 너희 장인어른께서 손수 보내주신 기자들이야. 봐, 저기 돈 처먹은 새끼들 수두룩하지? 서운해 하지는 마. 저 기자님들도 내가 곧 납부서 보내드릴 테니.”

“그럴 리 없어. 회장님께서, 아니 와이프가 나를…….”

“너희 장인이 직접 와서 거래했으니 확실해. 네가 믿고, 그렇게 되고 싶었던 그들은 널 버렸어.”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달콤하다는 뜻이 아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희망을 가리고 자존심을 발로 지근지근 밟아 신우현이라는 인간을 부숴내고 있었다.

“너는 그들의 울타리로 들어가고 싶어 했지? 피를 나누고 모든 걸 준 부모까지 버려 가며. 어때? 그들은 널 받아 줬나? 울타리로 들어간 기분이었어?”

신재현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살을 한가득 담았다.

벼리고 벼린 칼날이었다.

***

조사를 마친 신우현은 녹초가 되어 검찰청을 나섰다.

질문을 받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검찰 또한 녹록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산의 둘째 딸이 같은 날 조용히 출두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어차피 넌 끝났다. 피차 귀찮게 하지 말자.’

그런 의도였다.

그러나 신우현이 입을 다문 것은 아직도 실낱같은 희망이 남았기 때문도 있지만, 도저히 말할 정신이 아니었던 이유가 더 컸다.

정말 이게 회장의 결정인지, 어떻게 한순간에 밀어낼 수 있는지.

머리가 어지러워서 검찰의 질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검찰청을 나와서 기자의 질문을 받아도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떠들긴 하는데 뇌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검찰청을 나와 가만히 길을 따라 걸었다.

원래라면 마중 나온 차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길가를 찾아봐도 기다리는 차는 없었다.

정말 버림받은 것인가.

택시를 잡아탈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모든 사고가 정지한 채로 신우현은 정처 없이 발길을 옮겼다.

그 옆에 검은 차 한 대가 선 것은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그래도 차는 보냈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태우려고 기다렸나 보다, 하고 보니 얄미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신우현, 타라.”

열린 조수석 창문 너머로 운전대를 잡은 신재현이 보였다.

“미친놈.”

뇌에서 나온 말이 필터 없이 튀어나왔다.

생각을 담당하는 기관이 다 정지한 느낌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타.”

신우현은 해가 넘어가기 시작한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집에 가면 부인이 있을까, 없을까.

있든 없든 도저히 맨정신으로 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신우현은 힘없는 몸짓으로 차에 올라탔다.

볼일이 다 끝난 신재현이 왜 찾아왔는지 궁금한 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신재현은 말없이 차를 몰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서울 외곽을 향해 한참을 달렸다.

1시간쯤 갔을까.

불편한 침묵은 어느 건물 주차장에 차가 들어서면서 깨졌다.

“여긴 어딘데? 네 복수는 아까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신재현은 담배를 찾는 듯 주머니를 습관적으로 뒤적거리다가 포기하고는 싸늘한 눈으로 신우현을 응시했다.

“복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건 그냥 공무였어. 내 사적인 용무는 지금부터야, 멍청한 자식아.”

신우현은 차에서 내려 간판을 훑었다.

그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하, 납골당이라.”

신재현과 신우현.

둘의 아버지가 잠든 곳에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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