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딸이냐 사위냐
대체 왜?
자꾸만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맴돌았다.
세무조사 때문이면 여기가 아니라 국세청으로 갔어야지.
둘째 딸 때문이라면 중부청장에게 갔어야 한다.
왜 하필 여기로 온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 있어도 놀라지 않기로 각오하고 청장실 문을 열었건만 이건 너무 예상 밖이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한 건 신우현이나 둘째 딸 지홍연 또는 막내딸 지서연 정도였는데.
자식들을 제쳐놓고 회장 본인이 직접 나서다니.
어떤 면에서는 대단하다.
“악수해도 되겠습니까?”
회장의 물음에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회장의 손을 붙잡았다.
주름이 가득했지만 젊은이 이상의 힘이 느껴졌다.
회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소파로 이끌었다.
마치 자신의 집무실처럼 스스럼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혹시나 청장과 무언의 약속이 되어 있는 건가 싶어 청장을 바라보았지만, 그 역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원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저게 평소의 무표정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서울청장 오낙현 역시 의외의 인물에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진작 찾아봤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사부인은 잘 계시지요?”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순간 나는 멈칫했다.
단순한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너와 나는 인척 관계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었다.
이 능구렁이 영감님이.
“저는 지금 공무원으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혹시라도 사적인 대화가 필요하신 거면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청장님께도 폐가 됩니다.”
이럴 때는 단호하게 나가 줘야 한다.
아예 여지를 주지 않도록.
내가 딱 잘라 얘기했지만 회장의 표정에는 조금의 틈도 생기지 않았다.
둘째 딸과 신우현의 꼬라지를 보면 회장 역시 성깔 하나는 대단해 보였는데.
까마득하게 어린 공무원에게 가차 없이 거절당했는데도 평온한 걸 보면 표정관리는 수준급이다.
“어이쿠, 미안해요. 공무 중이셨지. 너무 반가워서 그랬습니다.”
반갑기는 개뿔.
이런 얼굴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눈앞의 영감님은 신우현에게 서민의 기를 쫙 빼고 오라고 했던 사람이다.
재벌가의 일원이 되고 싶다면 부모고 형제고 다 버리고 나오라고 명령한 바로 그 장본인이다.
정말 인성이 좋았다면 그런 조건을 내걸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보러 왔겠지.
뭘 대단한 지원을 바란 건 아니다.
상견례도 없이 가족을 원수로 만들라고 한 사람인데 저 얼굴에 속아 넘어가진 않는다.
자연히 내 목소리는 곱게 나오지 않았다.
“왜 여기로 오셨습니까? 설마 저 때문입니까?”
“솔직히 말해 그런 감은 있지요. 국세청장님을 제외하고 현재 국세청에서 이 지창태와 협상이 가능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신 팀장의 이름값을 빌리고 서울청장님께 인사도 드릴 겸 왔습니다.”
설마 서울청장이 차기 국세청장으로 내정된 것이 회장에게까지 퍼져나간 건가?
내가 의아해하자 서울청장이 끼어들었다.
“차기 국세청장은 손경진 중부청장님께서 앉기로 하셨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회장님께서 둘째 따님과 사위를 구명하러 오신 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사위 건이야 우리 신 팀장이 맡고 있지만, 둘째 따님을 비롯해 지산의 세무조사 전반은 국세청이나 중부청에 가셔야 해결됩니다.”
“허어, 벌써 내정이 됐단 말이군요.”
서울청장은 은근슬쩍 중부청장이 내정됐다며 거짓말을 했다.
중부청장에게 화살을 돌려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다.
회장은 낙담한 듯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동네 할아버지 같다.
“제가 자식 농사를 잘못 지은 탓입니다. 탈세는 곧 국가의 세금을 도둑질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빠짐없이 국고로 돌려놓으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법인세는 내겠다는 뜻이군.
그럼 뭘 봐 달라는 거지?
할 일도 많은데 자꾸 돌려 말하니 답답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복잡하게 말씀하시면 저는 잘 못 알아듣습니다. 이 자리에 녹음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 확실하게 말씀해주세요. 뭘 바라고 오신 겁니까?”
“젊은이란 좋군요. 성격도 화끈한 것 같고. 신 팀장님, 형과 화해할 생각 없습니까? 벌써 몇 년 쨉니까. 이 세상에서 믿을 건 가족뿐입니다. 원한다면 제가 사위를 잘 타일러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지?
형제 사이를 갈라놓은 원인 제공자가 중재자인 척을 하고 있다.
“신우현과 제 사이는 이미 끝난 일입니다. 제3자인 회장님께서 끼어드실 일도 아니고요. 저는 절대 신우현을 봐줄 생각이 없습니다. 형제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탈세와 비리는 끝까지 캐낼 겁니다.”
소신껏,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쏟아냈다.
그런데 회장이 의외로 담담했다.
“그럼 저에게 두 명의 자식을 잃으라는 겁니까? 둘째 딸과 막냇사위. 둘 중 하나는 제 품에 돌려주시지요.”
회장의 말에 서울청장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잠깐, 뭐가 이상한데.
둘 다 잘못했는데 마치 우리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일깨웠다.
“두 분 다 잘못이 있으시니 문제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 거래의 여지는 아예 없다는 뜻이로군요.”
마음 같아서는 당연히 거절인데 거래하고 말고를 내가 정해도 될지는 모르겠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서울청장도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움찔했다.
거래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나?
내가 눈을 가늘게 뜬 것과 동시에 회장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인내심의 한계인가.
“제가 예의를 갖춰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지요.”
회장의 태도가 돌변했다.
나는 회장의 머리 위를 슬쩍 훑었다.
만만치 않은 액수다.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탈세도 저렇게 많이 한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회장의 태도가 서울청장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갑자기 서울청장 역시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 국세청의 공무원을 협박하시는 겁니까?”
“판단을 잘하라는 말씀입니다.”
“저희의 판단 기준은 세법뿐입니다. 그에 비추어 봤을 때 저희의 판단은 옳습니다.”
“그럼 내 딸을 감방에 처넣는 걸 그냥 지켜만 봐라, 이건가요?”
회장의 얼굴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덩달아 서울청장 역시 표정이 급변했다.
아무리 대기업 총수라고 해도 직접 찾아와서 협박을 해?
곧 국세청장이 될 서울청장으로서는 지창태의 말이 도가 넘은 것이었다.
서울청장이 불편한 심기를 말로 뱉어내기 전에 내가 한마디 던졌다.
“회장님, 딸과 사위를 잃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뭐라고……?”
“이미 아시죠? 국세청은 지산과 전면전 할 생각이 없었다는 걸. 중부청장님이야 실적에 혈안이 되어 있으시니 둘째 따님을 물고 놔주지 않는 거고.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인생의 원수를 놓칠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물러나지 않으면 나와 아들까지 물어 뜯겠다? 같잖군요. 정말 국세청이 온전한 승리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협박한다고 내가 굴할 것 같나?
나는 오기로라도 질 생각이 없었다.
“법을 어겼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만.”
내가 벌어준 시간 동안 서울청장은 표정에 드러난 불쾌함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질주하는 나를 막았다.
“신 팀장은 잠시 나가 있도록 해.”
“청장님.”
“이런 것까진 안 보는 게 나아. 신 팀장을 위해서도.”
나는 탈세에 있어서는 굽히지 않으니까 협상이 안 된다는 거겠지.
그래서 불안해졌다.
대체 뭘 주고 협상을 하려는 걸까.
“걱정 말고 믿어.”
청장의 진지한 눈빛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선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짧게 묵례한 후 청장실을 나와 비서실 한편에 앉았다.
***
“나는 현재 국세청의 이미지를 만든 장본인이자 신뢰의 상징인 신 팀장과 협상을 하러 온 건데요.”
신재현이 나가자마자 회장은 불만을 내비쳤다.
서울청장 오낙현은 한심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저 친구를 잘 모르시나 보군요. 협상? 불가능할 겁니다.”
“세상에 권력과 돈 앞에서 기울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저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서울청장님은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분이시니 제가 권력과 돈을 운운할 필요가 없겠지요.”
비꼬는 말에 서울청장이 팔걸이를 토도독 두드렸다.
심기가 불편해서 오래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때에 따라 협상과 거래도 하며 진창에 발을 담글 줄도 알아야 한다.
신재현 역시 거래는 좀 해 보고 다니는 모양인데, 그 굳센 성정에 지금 하려는 대화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보냈다.
억지로 진창에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렇게 하죠. 이미 혐의가 드러나 검찰에 넘어간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봐주기 하는 것 아니냐고 국세청이 집중포화 맞는 걸 보셨잖습니까. 둘 중 한 분을 제물로 던져 주십시오. 한 분은 물어뜯기겠지만 다른 한 분은 조용히 들어갔다 나오기만 할 겁니다.”
회장이 턱을 쓰다듬었다.
“하나는 언론 앞에 서서 온갖 욕을 다 먹겠지만 하나는 그 뒤에 숨어서 세금, 벌금만 내고 끝난다?”
“징역이 될지 벌금이 될지는 검찰의 소관입니다. 수사 협조를 잘 하시면 정상참작은 되겠죠. 잠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자숙의 기간을 갖고…….”
“조용해지면 돌아와라?”
“어차피 둘 다 후계자는 아니잖습니까. 아드님에게만 타격이 없으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친자식과 사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인 것 같은데도 회장은 생각에 잠겼다.
막내딸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내가 얻어가는 게 없구만.”
“경영을 태만하게 한 결과입니다. 받아들이시죠. 대신 향후 5년간 세무조사를 하지 않겠습니다.”
하긴 세무조사가 나오지 않는다고 방심하긴 했다.
특히 둘째 딸의 방만한 경영은 화를 불러왔다.
이번 기회에 둘째의 성질머리를 식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10년.”
“너무 깁니다. 6년.”
“그럼 내가 많이 양보하겠습니다. 지산의 이름을 단 회사는 7년 간 세무조사 하지 맙시다.”
세무조사는 한 번 들어가면 역산해서 5년 치를 조사한다.
그러니 7년간 세무조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곧 2년간 세무당국의 눈을 벗어나는 기간이 생긴다는 뜻이다.
“7년이라. 좋습니다. 대신 너무 막 나가지 마세요. 아무리 법인세라 해도 적극적인 조세포탈이 의심되면 10년인 거 아시죠?”
법인세를 부과할 수 있는 기간은 5년이지만 부정이 있을 때 파볼 수 있는 권한이 10년까지 늘어난다.
즉, 아예 치외법권을 주는 것은 아니니 적당히 자중하라는 뜻이다.
“좋습니다. 그럼 신 팀장에게 전해주세요. 사위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시라고. 생각해보니 형제 싸움인데 제가 끼어들 필요가 없는 것 같군요.”
막내딸이 슬퍼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막내의 고집만 아니었다면 애초에 사위로 들이지도 않았을 인물, 언론에 내던져 갈가리 찢겨도 상관없었다.
“아, 하나 더.”
회장은 살벌하게 웃었다.
“중부청장님이 국세청 수장이 되시는 건 도저히 제가 참을 수 없을 것 같네요. 결코 순조롭게 국세청장이 되지 못할 겁니다.”
지창태는 날 선 예고를 남겨두고 청장실을 떠났다.
그와 배턴을 터치하듯 신재현이 들어왔다.
아무런 말은 없지만 눈빛만으로 청장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선을 넘었는가, 감시라도 받는 느낌이라 서울청장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 신우현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 둘째 딸 역시 죗값은 치를 거야. 대신 신우현은 여론의 방패막이가 될 거다. 둘째 딸은 조용히 조사 받을 거고.”
“그렇게 간단히 끝날 문제는 아니었는데요. 뭘 주셨습니까?”
숙제 검사라도 받는 기분으로 서울청장은 설명했다.
“7년간 세무조사 면제.”
“7년이면 무려 2년이나 붕 뜨게 됩니다! 2년이면 뭐든 할 수 있어요!”
“걱정 마. 조세포탈 혐의 있으면 10년이잖아. 그리고 신 팀장이 눈 뻔히 뜨고 지켜볼 거 아니었어?”
“……도를 넘으면 바로 칠 겁니다.”
“그래. 그러면 돼. 나도 신 팀장 생각하고 그런 조건 건 거니까. 됐지?”
신재현은 어느 정도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는 다른 팀 안 기다리고 준비되는 대로 치겠습니다.”
“그래. 이번 판은 전적으로 신 팀장을 위해 마련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어디 뛰고 싶은 만큼 뛰어 봐.”
그리고 온 세상에 그 칼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알려라.
칼자루를 쥔 것은 민치호더라도, 민치호의 위에 있는 것은 자신이다.
미래의 국세청이 어떤지 보여 줘라.
서울청장은 인사를 남기고 나가는 신재현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서울청장에게도 흡족한 대화였다.
지산의 회장은 중부청장이 차기 수장이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것이다.
사위야 원래 못마땅해 했으니 그렇다 치고, 둘째 딸을 물어뜯은 중부청장이 수장이 되는 꼴을 순순히 두고 볼까?
‘중부청장님, 말년이 평탄하지 않겠습니다.’
서울청장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조사를 끝마친 특수조사 2팀은 다른 조사팀의 경악을 뒤로하고 지산 엔지니어링으로 향했다.
검찰청 수사관들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