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95화 (195/500)

195화.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 (6)

조사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하나의 녹음본이 유출되었다.

두 형제의 대화가 담긴 녹음 파일이었다.

형제 사이의 대화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살벌한 내용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철저한 유교 사회인 이 대한민국에서 형제끼리의 혈투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물론 지산처럼 대기업 후계자를 둘러싼 경쟁이라면 이해한다.

그러나 둘은 어디에나 있는 서민 가정의 형제였으며, 그중 하나는 국민의 사랑을 받던 공무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자들의 열렬한 직업 정신으로 신재현의 가정환경이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조금만 관심을 두고 찾아보면 작년에 보도되었던 기사가 나왔다.

사정도 사정이니만큼 둘 사이가 단순한 형제 싸움으로 치부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은 금방 받아들여졌다.

‘신재현도 사람이었구나. 사랑받으며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줄 알았는데.’

대부분의 반응은 이 정도로 끝났다.

이제 다음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녹취본의 내용이었다.

-부자는 성격 좀 나빠도 돼. 대신 돈이 있잖아.

-내 몸에 흐르는 더러운 하층민의 피는 쉽게 바뀌지 않아.

-……사람 패고 돈으로 막고…….

-내가 사람을 고용했잖아? 그럼 돈을 주고 사람을 산 거야. 그 노동력은 모두 내 소유물이라고.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주옥같아서 어느 부분을 틀어도 임팩트가 있었다.

덕분에 방송사에서는 녹음본을 부분 부분 골라가면서 틀어도 시청률이 나올 정도였다.

지산에서 즉시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퍼진 것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공개되었던 영상이 족족 신고를 받고 삭제되자 사람들은 오히려 관심을 갖고 일부러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결정적 부분은 이것이었다.

-국세청은 던져주는 먹이나 먹고 떨어질 거야.

국세청은 지산과 손을 잡았다!

세무조사는 보여 주기식이었다!

믿었던 국세청이 발등을 찍었다!

지금까지는 수런대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이러다 국세청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까지 나올 기세였다.

국세청 내부에서 녹음 파일 누가 흘렸냐는 얘기가 나왔지만, 민치호와 서울청장의 헛기침 한 방에 바로 사그라졌다.

지금이야 국세청이 욕을 먹지만 잘만 이용하면 여론을 바꾸는 데는 효과적인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시위 직전까지 여론이 치달은 타이밍에 신재현이 직접 나서서 인터뷰를 했다.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제 친형이기 때문에 오히려 제가 맡은 게 맞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부끄러울 정도로, 제 형은 인간 말종입니다. 동생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형의 잘못을 철저하게 밝혀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혈연이라는 이유로 봐주지 않겠습니다. 원한을 핑계로 과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지산에 다니는 임직원 여러분 또한 소중한 국민이십니다. 어디까지나 잘못만 가려내어 법 앞에 세우겠습니다.

여기에 쐐기를 박듯이 국세청이 하나둘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사전에 지산과 손을 잡았다는 의혹을 벗으려는 듯 열심이었다.

그중 중부청장은 가장 앞장서서 지산을 공략했다.

“저희 중부청에서는 지산 패션에서 약 1천억 규모의 분식회계 정황을 포착하였습니다. 이중장부 등을 발견하여 비자금 조성 과정을 조사 중이며 지홍연 사장이 이를 알고 적극적으로 지시 및 가담하였는지는 수사 기관에 의뢰할 계획입니다. 저희 국세청과 사전에 모의한 일이 없으며, 오로지 세법과 양심에 따라 조사할 것임을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중부청은 빈말이 아니라는 듯 바로 그날 지홍연과 지산 패션을 검찰에 고발했다.

신재현은 막냇사위를 치고, 중부청은 둘째 딸을 치고.

이 소식을 들은 지산 회장이 노발대발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이게 무슨 개소리야!”

-콰장창!

지산 사옥의 회장실에서는 연신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지창태는 아예 손에 골프채를 들고 집기를 박살 내고 있었다.

한정판 만년필과 유리 장식장, 외국에서 웃돈을 주고 공수해 온 양주병까지 한 줌 유리 조각이 되었다.

일반인은 평생 구경도 못 해볼 값진 물건들이 골프채 한 방에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회장실에 달린 비서실에서는 조금이라도 눈에 띄지 않도록 숨소리를 죽이고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리고 그것은 회장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후계자인 장남은 벽에 기대어 서서 가만히 고개를 숙였고, 둘째 딸인 지홍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막내딸 지서연이 애써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사랑받는 막내딸이라고 해도 분노하는 지창태에게 말을 걸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빠, 나…….”

“지금 내 마음이 어지러우니까 가만히 있어. 둘째 얘기가 먼저야. 방해하면 너라도 가만 안 놔둬.”

막내딸에게 손을 댈 정도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다.

지금은 얌전히 있어야 할 때였다.

언니가 모든 분노를 감당해 낼 때까지.

“지홍연. 내가 말했지.”

“예, 아버지.”

“뭐라고 했는지 읊어 봐.”

둘째 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들키지만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들, 들켰어요.”

“그럼 처맞아야겠지?”

“아, 아버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제 잘못은 아닙니다! 어떻게 포장을 하든 흔적은 남을 수밖에 없는 거 잘 아시잖아요!”

“잘 알면 수습할 방법 정도는 생각해 놨어야지.”

“아버지, 제발!”

지홍연은 바닥에 엎드려 두 손 모아 빌었다.

옆에 서 있던 지서연이 미처 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러게 왜 내 남편을 구박해? 가만히 있었으면 이럴 일 없었잖아. 내 남편을 괴롭힌 벌이야. 징역 좀 살다 오라고.’

둘째가 잠시 경영에 떠나 있는 동안 막내딸이 슬금슬금 지분을 먹어서 남편에게 줄 생각이었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멀찍이 떨어져 있던 장남은 막내의 입가에 서린 미소를 똑똑히 보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장남이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 지금은 수습할 길을 찾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훈육은 다음 기회에 하시지요. 더 이상 지산의 이미지가 망가지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이러는 시간에도 여론은 나빠지고 있어요.”

장남의 말이 옳다.

마음 같아서는 멍청하게 일을 처리해서 지산의 이름에 먹칠을 한 둘째를 아작 내고 싶었다.

이제는 중부청장의 뒤를 캐내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수습이 불가능한 지경이었으니까.

법인세는 둘째 치고 횡령 혐의로 둘째 딸이 구속되면 주가가 얼마나 하락할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막냇사위 신우현까지 걸려 있다.

기업이 이미지 단 하나를 위해 수십억의 광고와 기부금을 퍼붓는 걸 생각해보면, 이번 일로 깎아 먹는 이미지는 수천억 대의 손실이었다.

지창태가 조금 수그러든 것처럼 보이자 막내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빠, 우리 그이도 살려야지. 솔직히 언니에 비하면 그이는 양반이야. 신재현과 악감정이 있어서 말이 좀 세게 나간 것뿐이고.”

지창태 회장은 귀여운 막내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일단 둘째 건부터 해결하자.”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이번엔 내가 나서는 게 나아.”

장남을 만류한 지창태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국세청장은 아직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매우 고까웠지만 지금 급한 건 자신이니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협상을 하려면 만나야 하는데 대체 어쩌란 말인가.

중부청장, 기획재정부 장관,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수많은 인사의 이름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국세청장이 작정하고 전면전을 펼치는 거라면 청와대 정도는 되어야 국세청을 누를 수 있다.

‘제일 적당한 게 경제수석인데, 그 양반은 매번 우리 손을 거절했단 말이야. 지금 연락하면 더더욱 거절할 테지.’

경제수석 임현승은 꽤 공을 들였음에도 매번 놓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기름칠 자체가 안 되어 있는데 연락해봤자 결과는 뻔하다.

그렇다면 누구를 찔러야 하는가.

그때 지창태의 눈에 옆에 서 있던 막내딸이 들어왔다.

‘이거다!’

지창태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

서울청의 특수조사 2팀 사무실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털어온 자료와 우리가 정리하면서 뽑아낸 인쇄물이 한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린터에서 나온 종이의 양만큼 우리의 조사는 착착 진행되었다.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리 팀의 진척은 꽤 빠른 편이었다.

처음엔 외국어로 된 계약서를 보자마자 난감했는데, 다행히 내 눈은 여기에도 통했다.

사람을 보면 숫자가 뚜렷하게 보이고 장부를 보면 비교적 흐릿하게 보이는데, 계약서를 보자 숫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숫자의 흔적은 보였다.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외국어인데 거기에 눅진하게 배어든 얼룩 같은 숫자의 잔상들은 이 계약서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매입매출은 간단히 끝났고, 그다음 자료들은 다른 회사들과 비슷했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회사에 소명을 요구했고, 업무 연관성을 소명하지 못하는 금액들은 가차 없이 세금을 매겼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 새끼가 비자금도 만들었네.”

계약서가 잘못된 걸 알았으니 당연히 돌아오자마자 계약서부터 꼼꼼하게 뜯어 보았다.

그랬더니 해외로 돈을 빼돌린 정황이 나왔다.

중간에 국외 법인 하나를 세워 수수료를 가로챈 것이다.

“팀장님, 자금 흐름 찾았습니다.”

황민우가 은행 출입금 기록 중 한 장을 뽑아 펜으로 표시해 가져왔다.

국외 법인을 세운 자금은 돌고 돌아 신우현의 운전기사 친척에게서 나왔다.

“하필 운전기사의 친척이 지산 엔지니어링과 제3국 수주를 연결하고 수수료를 받았다 이거죠.”

이 정도면 합리적 의심이 드는데.

빼낸 돈이 어디로 가 있는지는 몰라도 더 파볼 가치는 있다.

“일단 형은 이 친척에 대해서 파 주세요. 정말 비자금이 맞으면 바로 검찰 넘길 겁니다.”

황민우가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장세훈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 연구비 횡령도 한 것 같은데?”

“연구비까지요?”

“어느 대학교 연구실이랑 협력을 체결했는데 몇 년째 연구 성과가 없어. 그래서 혹시나 해서 돈을 파봤더니 연구비 일부가 중간에 감쪽같이 사라졌네?”

“가지가지 해 먹었네요.”

연구비를 이용한 횡령은 매우 쉽고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언젠가 한 번 꼭 털어보고 싶은 주제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신우현의 비리로 마주칠 줄은 몰랐다.

“계속해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일단 법인세 과세부터 마무리할게요.”

볼 것이 너무나도 많아서 도리어 착잡해졌다.

지산에 들어간 게 몇 년인데 벌써 이 정도란 말인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형제가 맞는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다.

털어 버리기로 마음먹었는데도 고구마 줄기처럼 튀어나오는 횡령과 비리가 내 골을 지끈거리게 했다.

-형제 싸움의 결말은?

어느 메이저 신문사의 헤드라인이 떠올랐다.

인터넷은 온통 나와 신우현의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놀랍게도 내가 여기서 무언가를 더 하지 않아도 알아서 신우현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퇴직자의 이야기며, 전 비서라는 사람의 익명 제보, 그리고 대학교 시절 친구의 폭로까지.

그동안 대체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 안 봐도 뻔할 정도다.

이렇게까지 나쁜 놈이었다는 걸 아시면 어머니가 속상해하실 텐데.

그래도 내버려 뒀다가 나중에 정말 국민적 개새끼가 될 바에는 지금 내 손으로 쳐내는 것이 났다.

줄줄 나오는 것을 보아하니 아주 싹수가 노란 놈이었다.

이제 걱정은 지산의 반응이다.

둘째 딸에 막냇사위까지 걸려 들어가면 정말 싸우자는 뜻이나 다름없으니까.

지산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던 차에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지금 당장, 내 집무실로.

서울청장의 짧고 급박한 메시지다.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다.

“청장님 뵙고 오겠습니다!”

“네!”

이젠 청장실 가는 것쯤으로는 동요조차 하지 않는 팀원이었다.

메시지에 담긴 다급함을 느낀 나는 서둘러 뛰어 올라갔다.

비서실로 들어서자마자 당황한 비서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느 정도 각오가 필요하겠구나.

나는 심호흡을 하고 청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절로 다리가 굳고 말았다.

“드디어 뵙는군요, 신재현 팀장님.”

지산 그룹의 회장 지창태.

거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경악을 가까스로 눌러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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