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94화 (194/500)

194화.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5)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조사팀도 하나둘 현장에서 철수하고 각자 가져온 자료를 토대로 맡은 회사를 심층 분석하기 시작했다.

조사 시작에서 일주일이 지났을 때, 청장 주재의 조사 회의가 열렸다.

요즘은 IT시대라더니 회의실 앞쪽 스크린에는 다른 두 청을 비춘 화면이 떠 있었다.

일명 화상 회의다.

“오늘은 중간 결과를 보고하고 서로 방향을 맞추는 자리입니다. 다 연결되어 있는 회사를 조사 중이니 모두 숨김없이 말해 주기 바랍니다.”

국세청장이 큰맘 먹고 개최한 화상 회의였다.

회의 시작 전에 사진도 찍었다.

내용은 아니더라도 이 사진은 기사에 뜰 것이다.

[국세청, 화상 회의로 더욱 유기적인 조사]

[IT 최강국의 앞서가는 국세청]

대충 이런 제목을 달아서.

“현재 지산 카드는 내부 자금 흐름 추적 중입니다.”

“지산 투자는 특수 관계인 간 부정 거래가 없었는지 확인 중입니다.”

노련한 조사팀장들은 벌써 내부 정리를 끝마치고 가장 중요한 자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애초에 제일 중요한 것은 돈이다.

모든 부정은 돈에서 발생한다.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편법을 쓰다 결국 불법에까지 손을 대는 것이다.

카드나 통장 같은 모든 세무 자료는 궁극적으로 자금 흐름을 보기 위한 데이터에 불과한 것이다.

대략적인 진행 상황 보고가 끝나고 나자 이번에는 화살이 중부청장에게 향했다.

“요즘 중부청에서 지홍연 사장의 비자금 조성을 조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진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국세청장으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곧 옷 벗고 떠나는 입장이라지만, 지금 당장 총지휘를 잡은 건 자신이었으니까.

잘못하면 수십 년 공무원 생활에 먹칠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뢰성 있는 정보였고 현재 조사도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터뜨린 시점이 너무 빨랐어요. 이래서는 반격할 시간만 주는 꼴이잖습니까. 요즘 지산 쪽에서 전화가 아주 불티나게 와요. 통화했다는 사실만으로 트집잡힐까 봐 일부러 안 받고 있는데, 부재중 전화만 43통입니다.”

국세청장이 툴툴거렸다.

그에게는 중부청의 대처가 아주 성급해 보였다.

“중부청장답지 않게 성급한 결정이었습니다.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지요. 지금 중부청장 뒷얘기 터져 나오는 거 알죠?”

낮은 직급자들도 모인 자리다.

공식적으로 중부청장이 혼나는 모습을 보자 팀장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못 본 척하는 것이다.

중부청장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실태를 거론하는 모습에 이를 빠득 갈았다.

“나중에 제가 직접 청장님께 찾아뵙고 해명하겠습니다.”

“내 입장도 생각해 달라는 말입니다. 중부청장만 공격받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날 조사한답시고 내가 20년 전에 쓴 월세 계약서까지 찾아서 내놓고 있습디다. 나도 찢어 버린 걸 대체 어디서 찾아오는지, 참나.”

국세청장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말년의 화려한 불꽃이 되어야 할 마지막 대규모 조사가 빛이 바래고 있으니.

이러다간 오명과 함께 국세청을 떠나게 생겼다.

“이번 일, 확실하게 끝내야 할 겁니다. 이미 이렇게 됐으니 물러설 수 없어요. 봐준다는 말 나오지 않게 명확한 증거를 잡아서 지홍연을 확실히 잡아넣으세요.”

국세청이 빛날 방법은 이제 하나였다.

상대가 나쁜 놈이 되는 것.

나쁜 놈을 잡아내면 수단은 좀 거칠더라도 결국 정의가 되니까.

이것이 승자로서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강조하지 않으셔도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모든 걸 걸고 지홍연을 잡아 오겠습니다.”

중부청장의 결연한 다짐을 끝으로 다시 회의는 원래 주제로 돌아갔다.

조사팀장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올리고 각자의 진척을 파악하고 있을 때, 한 팀장이 손을 들었다.

본청의 직원이었다.

“다들 열심이신 건 압니다만,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번 건은 2인 3각 경기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팀이 균등하게 발을 맞춰야 해요. 뭐, 경험 출중하신 분들이니 알아서 잘 하실 거라 믿습니다만, 혹시라도 어렵다 싶은 팀장님은 기탄없이 말해 주셔야 합니다.”

본청 직원은 말을 빙빙 돌렸지만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실력 후달려서 못 할 것 같은 사람은 미리 말해라.’

누구를 말하는지도 명확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거기에는 이 자리에서 가장 젊고 직급도 낮은 청년이 앉아 있었다.

‘본청은 견제하나 보네. 아니면 소문으로만 들어서 그게 부풀려진 거라고 생각하든가.’

서울청의 팀장들은 피식 웃으며 도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들도 한때 저런 생각이었지, 하는 자학 어린 웃음이었다.

서울청 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본청 직원이 재차 입을 열었다.

“걱정이 되어 하는 말씀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일찌감치 요청하세요. 나중에 한 군데에서만 조사가 덜 되어 국세청 전체의 업무가 올스톱 될 수도 있습니다.”

발목 잡을 것 같으면 이실직고해라.

그런 말이었다.

그 의도 또한 명백해서 서울청 직원들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들이 인정해 이 자리에 앉힌 팀장이다.

본청의 무시는 참을 수 없었다.

“본청에서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미 잘 하고 계시니.”

보다 못한 서울청의 팀장 하나가 맞받아쳤다.

그러자 본청 팀장이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울청에서 이미 돕고 계신가 보군요. 그렇다면 안심했습니다.”

그 말에 서울청 팀장들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당사자인 신재현은 가만히 있는데도 주위에서 난리였다.

“우리가요? 아, 우리 일하기도 바쁜데 뭘 도와줘요? 우리 일 끝나고 나서 시간 남는 거면 몰라도.”

“본청은 그렇게 합니까? 자기 일 팽개쳐 두고 남의 일 먼저 처리해 줘요?”

“저놈이 뭐가 예쁘다고 도와줘, 도와주길. 우리 눈이 동태 눈깔인가? 실력만 아니었으면 이 방에 들어오지도 못 했어, 에잉.”

중간에 이상한 말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신재현이 저평가받는 것을 참지 못했다.

이미 자신들이 인정했는데 그걸 까내린다는 것은 곧 같이 도매급으로 넘어가는 것과 같았다.

나이 지긋한 팀장들이 본청 팀장에게 따지는 것도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말싸움이 이어지자 권현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아까 진행 상황 들으셨잖아요. 그걸로는 부족하신가? 그럼 직접 보시면 되겠네요.”

권현아가 자연스럽게 판을 깔아주었다.

먼 곳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던 신재현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자 권현아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신재현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숨에 시선이 쏠렸다.

“먼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운을 뗀 청년은 평온한 어조로 결과 보고를 이어나갔다.

현장 조사에서 무엇을 발견했고 현재 자료는 어디까지 취합했는가.

어딜 중점적으로 팔 예정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번 조사에서 무엇을 건져냈는가.

“이상을 근거로 해외 수주계약을 이용해 외국 법인에 외화를 유출한 후, 일부를 빼돌려 횡령하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회의실이 침묵에 휩싸였다.

도움을 주고 자시고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는 아직도 매출액 맞추는 중인데, 신재현의 입에서는 국내가 아닌 해외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미 국내는 어느 정도 자료 취합을 끝내고 국외로 시선을 돌렸다는 소리다.

“더불어 지산 엔지니어링의 법인 통장에서 정당한 근거 없이 이동한 금액들을 집계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출금처를 정리하는 수준이지만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내부망에 올리겠습니다.”

“그…… 자금 흐름까지 이미 보고 있단 말입니까?”

본청 팀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도 안 되네요. 저도 조사관 생활만 10년이 넘었습니다. 서울청에서 너무 대놓고 밀어주기 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신 팀장이 서울청의 얼굴이라고는 해도…….”

자리를 망각하고 따질 만큼 본청 팀장은 흥분해 있었다.

이번엔 서울청장이 눈썹을 꿈틀했다.

“우리 청이 그렇게 한가해 보입니까?”

본청 팀장이 찔끔하며 자리에 앉자 바로 옆에 있던 다른 나이 지긋한 팀장이 옆구리를 툭툭 치는 것이 보였다.

“밀어줄 거면 1팀을 밀어줬겠지. 자기 사람도 아닌데.”

말리는 소리가 화면 너머로 똑똑히 전해져 왔다.

서울청장이 팔걸이를 토도독 두드렸다.

저 둘은 이제 서울청장의 눈에 들었다.

안 좋은 의미로.

***

각 팀이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언론은 온갖 추측으로 기사가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자료를 갖고 청으로 들어가 버린 이상 정보가 흘러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직접 사무실에 쳐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국세청에 물어봐도 결과 발표를 기다리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결국 남은 것은 추측성 보도뿐이었다.

언론은 셋으로 나뉘었다.

그간 지산을 둘러싸고 있었던 안 좋은 소문을 재조명하는 것.

중부청장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

신재현과 신우현의 관계를 파헤치는 것.

이중 단연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중부청장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였지만, 신재현에 대한 기사도 만만치 않았다.

장관과 의원, 가리지 않고 목을 쳐내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공무원에게 이면이 있었다니?

주목받기 딱 좋은 소재였다.

-신재현이 형을 봐주고 있다.

-형에 대한 복수다. 사적인 감정으로 권한을 남용하고 있다.

둘의 주장은 정반대였지만 그렇기에 좀처럼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누군가 부추기는 것처럼 기사는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개중에는 신재현의 인성을 의심하는 글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론이 점점 신재현에게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신우현은 쾌재를 불렀다.

“그래, 이거지! 이게 바로 돈의 힘이야!”

지산 엔지니어링의 이사실에 앉아 TV를 보던 신우현이 킬킬 웃었다.

모든 것이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지산의 홍보팀과 전략실 역시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신우현 역시 따로 돈을 썼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 봐. 쥐똥만 한 명예 따위 재벌의 힘이면 금방 먹칠해줄 수 있다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곁에 서 있던 비서가 맞장구를 쳤다.

회계팀의 비관적인 예측을 보고하러 왔는데 이사가 다행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결재판으로 앞통수 몇 대는 얻어 맞겠구나 각오했는데, 이 정도면 해볼 만했다.

비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사님. 회계팀의 법인세 과세 결과 예측치입니다.”

“음?”

신우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고서를 펼쳤다.

처음 회계팀이 예측했던 것보다 법인세가 거의 2배로 늘어 있었다.

신우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이렇게 많이 늘었어? 회계팀 제대로 일하는 것 맞아?”

“처음 산정한 예상액은 일반적인 세무조사일 경우를 전제로 한 금액이었습니다. 새로 산출한 법인세액은 특수조사 2팀이 까다롭게 책정했을 최악의 경우로 계산했다고 합니다.”

특수조사 2팀이라는 단어에 이번엔 신우현의 입술이 꿈틀했다.

하지만 마침 TV에서 나온 지산의 둘째 딸 이야기가 신우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공식 발표는 아니지만 중부청이 지홍연을 집중 조사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지홍연이 조사받는 건 희소식이었다.

그동안 자신을 볼 때마다 눈동자에 경멸이 스치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자신이 조금만 공을 세우려 하면 즉시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지홍연이 몰락한다면 떨어지는 콩고물도 많을 것이다.

소유 지분을 조금만 더 가져도 발언권에 힘이 실린다.

눈엣가시 같던 지홍연도 없어지고 콩고물도 주워 먹고.

금상첨화였다.

“후…… 그래, 그 새끼는 예측 외긴 하지. 좋아,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큰소리 내긴 싫고.”

비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이 금액 전부 과세되면 회계팀은 날아갈 줄 알아. 이거 일부러 크게 잡은 금액인 거 다 아니까 이 중 20%는 방어해내라고 전해.”

“20%씩이나요?”

세금이 적게 나오도록 알아서 방어하라는 뜻인데 그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 한다.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게 어디 사람 마음처럼 쉽게 되는 일인가.

비서가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때 TV의 뉴스 특집에서 갑작스레 속보가 떴다.

-서울지방국세청 신재현 팀장과 그의 형 신모 씨가 나눈 대화 녹취록이 공개되어 큰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어?”

신우현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비서가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보고도 끝났겠다.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후다닥 문을 닫고 도망친 비서가 안도했을 때 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아악! 저 개새끼가 언제 저런걸! 저건, 저것만은 안 돼! 안 된다고, XX!”

평소보다 발광이 심했다.

당분간 이사실에는 접근하지 말아야겠다.

‘아예 확 나가리 됐으면 좋겠네. 어쩌다 저런 놈이 지서연 사장님 눈에 띄어서…….’

비서는 성질 더러운 상사가 몰락하길 간절히 바라며 복도를 걸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질 거란 것은 상상도 못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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