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4)
중부청장 손경진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본청에 서울청까지 끼어든 일인데도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 쏠리고 있었다.
지산의 공격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국세청을 등에 업는다면 못 이길 것도 없다.
평생 몸담아온 곳이기 때문에 중부청장이 과대평가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국세청은 강력한 권력 기관이었다.
그곳의 수장이 될 수 있는 기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불어 방금 받은 전화는 자신의 국세청장행에 쐐기를 박아 줄 정보를 담고 있었다.
-지산 패션이 1천억 규모의 분식회계를 했습니다. 아마 비자금을 조성했을 겁니다.
바로 신재현의 전화였다.
1천억 규모의 분식회계에서 비자금까지 발견해낸다면 중부청의 위상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가는 것이 고우니 오는 것이 고운 것인가.
딱 자신이 보냈던 것처럼 정보가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
잘 포장이 된 건 아니지만, 재료야 손질하기 나름이다.
이 정도 정보라면 중부청장은 충분히 지산을 쥐고 흔들 수 있었다.
‘지산 패션이라면 둘째 딸의 회사다. 내겐 두 가지 선택이 있어. 둘째 딸의 비리 혐의를 까발리느냐, 아니면 회장에게 찾아가서 덮어두는 조건으로 거래를 하느냐.’
어느 쪽을 택하든 남는 장사였다.
중부청장의 성격상 당연히 후자에 더 마음이 끌렸지만, 지금은 눈앞의 국세청장 자리가 더 급했다.
게다가 신재현은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호감을 사서, 자기 사람은 아니더라도 동맹 정도는 되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신재현이 준 정보로 지산과 거래를 한다면 분명 민치호 라인 전체가 자신을 돌아설 것이다.
‘일단 국세청장이 된 후에 지산과 화해하자.’
대기업 역시 국세청과 척을 지고 싶진 않을 것이다.
나중에 지산의 일탈을 눈감아 주는 식으로 화해를 청하면 충분히 협상이 가능하다.
결론을 내린 중부청장은 핸드폰을 들었다.
지산 패션에 나가 있는 조사팀에게 이 좋은 소식을 알려줄 참이었다.
‘운이 좋군.’
자신도, 지산 패션 담당 조사관들도 아주 시기를 잘 탔다.
이 정보 하나만 갖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또한 신재현이 이것을 알려줬다는 것은 중부청장에게 하나의 확신을 주었다.
‘나를 국세청장으로 점찍은 게 확실해.’
이런 좋은 정보를 쥐고서 굳이 자신에게 줄 필요가 없다.
물론 지산 패션의 담당이 중부청이긴 하지만, 공을 가져갈 생각이었으면 방법은 충분히 있었다.
어차피 다 엮인 회사다.
-지산 전체의 자금 흐름을 조사하다 보니 지산 패션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런 발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일부러 중부청장에게 직접 전화로 전해 줬다는 것은 신재현 역시 자신을 벌써 차기 수장으로 인정한 것 아니겠는가.
국세청의 이단아, 발령받자마자 두각을 드러낸 바로 그 신재현이!
국세청장이라는 달콤한 타이틀에 취한 중부청장은 자기도 모르게 이성이 흐트러졌다.
“지산 패션을 샅샅이 조사해. 지산의 직계라고 봐주지 마. 어차피 그쪽 후계자인 장남만 건드리지 않으면 괜찮을 거야.”
중부청장이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떠나갔다.
***
세무조사가 시작되자 지산의 공세는 눈에 띄게 심해졌다.
물론 지산의 이름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무조사 당사자인 국세청에 대해 조사해보자는 명목으로 세 청장에 대한 검증이 연일 기사를 탔다.
역시 가장 공격을 많이 받는 것은 중부청장이었다.
-중부청장 손경진, 아들 병역 면제 의혹 불거져.
-재산이 무려 50억? 중부청장 투기 의혹.
-중부청장의 행실은 어땠는가? 전 세무조사관의 증언.
사람은 털면 먼지가 나온다.
작정하고 털면 고위 공무원에게서는 건더기가 나온다.
그리고 기자는 남의 뒤를 캐는 것에 아주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지산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다면 더하다.
재산에서부터 가족 관계, 무단횡단과 자동차 딱지에 이르기까지 뒤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뒤집었다.
아침엔 중부청장의 재산 형성에 대한 의혹이 나오고 오후엔 위장전입 의혹이 터져 나왔다.
중부청장은 조사권자의 자격이 있는가? 하는 헤드라인까지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기회라고 느낀 것일까.
지산 엔지니어링의 이사이자 지산의 막내 사위인 신우현과 국세청의 저승사자 신재현의 관계 역시 재조명되었다.
신우현이 손을 쓴 것이다.
작년에 이미 한 번 터져 나온 이슈였다.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조사관 신재현은 현재 지산 엔지니어링을 조사하고 있다. 놀랍게도 지산 엔지니어링에는 그의 친형이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혈연관계에 있는 공무원이 조사를 도맡는다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일까? 신재현 조사관의 판단력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필자는 혹시 봐주기 수사가 펼쳐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조심스럽게 제기해 본다.
사설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의도는 명백했다.
신재현의 명예에 흠집을 내려는 것이다.
└이거 작년에도 나왔던 얘기 아닌가?
└철 지난 떡밥이긴 한데 이것도 일단 중립임.
└근데 이게 진짜면 실망인데.
한번 찔러 보기식으로 나온 사설의 반응을 본 후에 이번엔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칼럼이 나왔다.
-신재현 조사관과 지산 엔지니어링의 신우현 이사의 관계는 재계에서는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다. 둘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까지 일컬어지고 있으며, 오히려 이번 지산 엔지니어링 조사가 신재현 팀장의 개인적인 복수심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무리 신재현 팀장이라 하더라도 사심으로 세무조사를 이용한다면 지탄받아 마땅하다.
└아니 왜 싸워
└형제싸움 스케일 크네.
└친형제니까 일부러 꼼꼼하게 조사하는 거 아님? 널널하게 하면 봐준다는 소리 나올 거잖아.
└이상하다. 내가 저번에 봐줄까 봐 걱정된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대체 어쩌라는 것이지?ㅋㅋ
└아니 그래서 왜 싸우냐고! 복수라는 말이 왜 나오는데! 나한테도 설명을 해 줘!
└검색해라 ㅂㅅ아
신재현과 신우현의 형제싸움이 슬금슬금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할 때, 중부청장이 행동을 취했다.
신재현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중부청장을 향한 공격이 점점 거세졌기 때문이다.
여론의 포위망이 더욱 좁혀지기 전에 빠져나가기 위한 수였다.
[중부청, 지산 패션의 횡령 혐의 검토 중]
-내부의 소식통에 따르면 현재 중부지방국세청은 지산 지창태 회장의 둘째 딸인 지홍연 지산 패션 사장에 대해 중대함 혐의를 포착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현재 조사 중이나 중부청은 탈세와 비리, 횡령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지산 패션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전했다.
중부청장이 일부러 흘린 정보였다.
원래는 어느 정도 확실한 증거를 찾고 나서 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너무 늦으면 ‘세무조사의 결과를 희석시키기 위한 지산의 네거티브 공격이다, 중부청에 대한 압박이다’라는 역공도 통하지 않게 된다.
아직 이중장부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중부청장은 살기 위해서 일단 지르고 보기로 했다.
지산의 분노는 점점 쌓여 가고 있었다.
***
서로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고,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치열한 공방 속에서 조사팀은 기사를 볼 틈도 없이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청의 특수조사 1팀이 지산 기획에 들어온 것도 벌써 둘째 날 오후였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던 때, 팀원 하나가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
“중부청이 많이 시끄러운가 봐요.”
“중부청이요?”
그간 바빠서 뉴스도 보지 못했다.
집에 들어가면 바로 잠드는 일상이었다.
게다가 단톡방에서도 별다른 말은 없었기에 권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중부청에서 대놓고 지산의 둘째 딸을 건드리셨어요.”
“확실한 근거만 있으면 상관없지 않나요?”
“대놓고 싸움 건 거나 다름없죠. 요즘 중부청장님이 대놓고 막 나가요.”
권현아는 팀원의 말에 네이버 뉴스 탭을 열었다.
뉴스 랭킹의 대부분이 이번 세무조사와 중부청장에 대한 글로 가득했다.
“와, 이런 적은 또 처음이네요. 그동안에는 우리 서울청이 폭풍의 중심이었는데.”
올해 들어 특수조사팀이 생긴 이후로 서울청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관심을 모조리 중부청이 가져간 느낌이다.
오히려 서울청은 너무나도 조용해서 의아할 정도였다.
“중부청장님이 차기 국세청장으로 내정되셨다는 게 정말입니까?”
팀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들 모두 서울청의 조사관인 데다 팀장인 권현아는 서울청장의 사람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했다.
“아직 모르는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하면 나중에 뒤집힐 수도 있고요.”
“그래도 중부청장님은 벌써 비자금을 캐내셨잖아요. 특단의 조치가…….”
“아니요.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합니다. 잔 수법은 필요 없어요.”
권현아는 딱 잘라 얘기하며 신재현을 떠올렸다.
항상 정석적으로 벽을 돌파하는 사람, 그 어떤 일에 휘말려도 굳건히 중심을 지키는 사람.
자신 역시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할 일이 많습니다. 어서 끝내죠.”
“넵!”
힘차게 대답하는 팀원들이 들러붙어 파일을 훑기 시작했다.
광고 회사다 보니 계약서나 포트폴리오, 제안서 자체는 PDF 파일로 존재했지만 실물 계약서도 확인은 해 봐야 했다.
개중에는 PDF로 저장되어 있지 않은 것도 존재했으니 더 문제였다.
처음엔 계약서 색인이나 목록을 달라고 했더니 그런 것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권현아 팀은 전자문서와 실물 자료를 교차 확인하는 지루한 작업에 들어갔다.
“후, 겨우 다 끝냈네요. 광고사라 그런지 진짜 많네.”
“저희도 원장 다 뽑았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직원도 작업의 끝을 알렸다.
이제 남은 것은 통장과 카드명세, 거래명세표와 간이영수증 등 자잘한 서류들이었다.
현장 조사도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빠르지 않나요?”
팀원이 위로하듯 말했다.
권현아 역시 동감이었다.
작은 회사 하나를 뒤져도 자료를 요청하다 보면 누락되고, 또 요청하고, 정리하다 보면 몇 날 며칠이 걸린다.
현장에서 실물 자료를 쓸어 담는 것뿐이지만, 대기업 계열사 하나를 이틀 만에 끝낸다는 것은 꽤 빠른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회계팀 컴퓨터 떼어가고 싶은데요.”
“탈세의 증거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정기 세무조사인데 자료 제공 정도로 참아야죠.”
팀원들이 회계팀에 나머지 자료를 요청하러 간 사이, 권현아는 한숨 돌릴 겸 조사팀장 단톡방을 켰다.
어느새 수십 개의 대화가 쌓여 있었다.
다들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나 궁금해진 권현아는 밀린 대화를 읽어보기 시작했다.
-거의 다 끝나갑니다! 오후엔 청 들어가요.
-벌써요? 너무 빠르신데.
-혼자서만 앞서 나가지 말고 같이 좀 합시다.
다들 경쟁의식을 불태우고 있었다.
어디는 수입수출을 끝냈다느니, 전표철 뒤지고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올라왔다.
권현아는 혹시 신재현이 진행 상황을 올리지는 않았을까 하며 대화를 훑었다.
팀장 자체가 처음이라 이런 단체 대화가 어색한 걸까.
아니면 다른 팀장들이 고깝게 생각할까 봐 대화에 끼지 않고 자중하고 있는 걸까.
눈 씻고 찾아봐도 신재현의 발언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읽음 표시가 되어 있는 걸 보면 단톡방을 보긴 보는 것 같은데.
‘전화해서 물어볼까? 아직 멀었겠지?’
남들이 1팀과 2팀을 라이벌 구도로 엮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저도 모르게 경쟁심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자신이 앞섰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경력이 출중한 세 청의 날고 기는 조사팀장들이 모인 이 방에서 아직도 현장 조사를 완전히 끝낸 사람은 보지 못했으니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가뜩이나 경력이 부족한데 대기업 계열사의 조사라니.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으면 가서 도와줘야겠다.’
전화는 좀 부담스럽다.
권현아는 걱정 반, 기대 반을 꾹꾹 눌러 담아 문자를 보냈다.
-끝나고 도와드리러 갈까요? 지산 엔지니어링 가까운데.
답장은 금방 왔다.
-아니요, 다 끝냈습니다. 곧 청 들어갑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권현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기지가 않아서 두 번, 세 번을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저쪽 회사가 작던가?’
권현아는 머릿속으로 사전에 조사했던 두 회사의 자산 현황을 그렸다.
건설, 토목 계통인 엔지니어링이 자산 규모는 더 컸다.
“이런 괴물을 걱정한 내가 바보네.”
권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