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 (3)
지산의 둘째 딸과 막내딸의 지루한 싸움은 지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었다.
같은 비행기에 탔다가 싸움이 일어나 둘째가 비행기를 돌려 내린 일은 유명했다.
이미 탑승까지 마치고 이륙까지 단 10분 남은 비행기였는데 말이다.
퍼스트 클래스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승객에게는 엔진 고장이라고 둘러댔으며 적절한 보상이 있었기에 외부에는 퍼지지 않았다.
하지만 알음알음 이야기를 들은 지산의 직원들은 ‘또 한 건 했네’라며 고개를 저을 정도로 이런 행태는 비일비재했다.
이미 후계자도 정해진 마당에 왜 딸 둘이 싸우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막내딸은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첫째는 장남이므로 엄격한 교육을 별 의문 없이 받아들였다.
둘째 역시 오빠의 선례를 보고 비교적 불만 없이 갑갑함을 감내했다.
문제는 막내가 태어나고 나서였다.
늦둥이 막내딸은 그 호랑이 같던 아버지의 마음을 쏙 녹여놓았다.
둘째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맞았던 7살에, 막내는 말을 선물로 받았다.
막내가 아빠라 부르며 안겨 다닐 때, 둘째 역시 막내를 따라 하다가 존댓말을 쓰라며 혼났다.
장남은 그룹을 받을 예정이고 막내는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둘째는 아무것도 받지 못 했다.
결정적으로 둘째가 비뚤어진 계기는 결혼이었다.
둘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룹에 보탬이 되는 사람과 강제로 팔려가듯 결혼했다.
막내는 기부금으로 들어간 명문 대학에서 만난 남자와 연애결혼을 했다.
당연히 억지였고 안 될 줄 알았는데, 회장은 조건을 걸고 막내의 결혼을 허락했다.
둘째와 막내의 사이에 파여 있던 깊은 앙금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해 버렸다.
이젠 용암의 강이 되어 간헐천을 뿜어내고 있는 수준이었다.
“언니는 우리 그룹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지산 회장의 막내딸, 지서연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친언니 아닙니까?”
지서연은 옆자리에 앉은 시동생을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다.
정작 혈연끼리 죽일 듯 싸우는 장본인이 남의 형제싸움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그 눈빛을 느낀 신재현이 덧붙였다.
“형제 싸움 해 봐서 아는 겁니다. 웬만한 이유로는 서로 죽이려 들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건방지다며 그 자리에서 쫓아냈을 것이나 지서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분명 어렸을 땐 자주 혼나는 언니를 안쓰럽게 여겼다.
언니가 혼자 울고 있으면 몰래 자신이 받은 사탕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8살 생일 선물로 받은 건물에 언니를 초대해 생일 파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언니의 반응은 유별났다.
어린 마음에 아껴둔 사탕만 골라 가져갔더니 빼앗아서 발로 밟고, 생일날 데려간 건물에서는 문을 차 유리를 부수었다.
매번 호의를 줘도 악의로 되돌아오니 좋아지려야 좋아질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앙숙이었으니 이제 와서 원인은 기억나지 않네요. 하지만 명분이 필요하신 것 같으니 이 상황에서 가장 논리적인 이유를 하나 알려드리죠.”
지서연은 고개를 돌려 시동생과 눈을 마주쳤다.
자신의 남편과 닮았으면서도 총기가 어린 눈동자가 거기에 있었다.
자신은 남편의 야망 어린 눈동자를 좋아했다.
그러나 시동생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포식자의 눈빛, 사냥감으로 보는 강자의 눈빛이었다.
감히 지산의 막내딸인 자신을, 이라고 생각했다가도 그 눈빛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남편과 닮아서일까.
아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야망과 자신감, 젊음과 패기, 그리고 지성이 넘치는 남자.
‘고졸인 게 유일한 흠이네. 학벌만 됐으면 좋았을걸.’
부족함 없이 자라온 지서연은 머리도 충분한 사람이 왜 대학교를 안 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학벌은 곧 그 사람의 한계라 여겼다.
지서연은 시선을 거뒀다.
흥미가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언제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원석이 거기에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관심이 없는 척 해야 했다.
이미 국회에서도 러브콜을 받았고 그걸 걷어찼다고 들었다.
이 자리에서는 반드시 비즈니스 관계로만 이야기를 진행해야 했다.
만약 여기서 ‘내 사람이 되어라’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간 바로 거래는 끝이다.
이런 논리적인 사람은 주고받는 것이 확실해야 그다음의 기회도 생기는 것이다.
“둘째 언니가 저와 제 남편, 신우현을 노리고 있거든요.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괜찮겠지만 오빠가 그룹을 물려받으면 둘째 언니는 우릴 쳐낼 거예요. 내가 죽기 전에 죽일 겁니다.”
“……신우현을 죽인다면 저야 환영인데요. 제가 그런 딜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신우현을 직접 죽이고 싶어 하셨잖아요. 저는 돈도, 일자리도 제안 드리지 않을 거예요. 승진도 신재현 씨가 알아서 하세요. 저는 이 자리에서 언니의 비리에 대한 제보만 할 거예요.”
“하…….”
신재현이 나직하게 한숨을 흘렸다.
그러나 기분 나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어 하는 얼굴이었다.
“바라는 것도 없이 제보만 하시겠다? 탈세와 비리가 있는 걸 안 이상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전 둘 다 칠 거예요. 언니분과 남편분 모두.”
“그러시든가요. 제 남편은 제가 지키면 그만이니까.”
지서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지산 패션은 근 5년간 총 1천억 규모의 분식회계를 했습니다. 거기 잘 뒤져보면 이중장부도 있을 거예요. 분식회계를 왜 했을지는…… 짐작이 가시죠?”
지산 패션이라면 패션, 의류, 섬유를 주로 다루는 업체다.
신재현의 얼굴에 대번에 심각해졌다.
“제보 감사합니다.”
인사도 없었다.
다급하게 차 문을 열려던 신재현이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지 사장님께서는 제보를 하신 겁니다. 저는 갚을 것도 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럼요. 저는 선량한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건데요. 조사관님도 공무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세요.”
한밤의 거래는 그렇게 성사되었다.
***
아침이 밝았다.
조사의 둘째 날이 되자 지산 엔지니어링의 회계팀은 반쯤 긴장을 풀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네요.”
“그러게요. 예상한 것만 요구하네.”
조사 예고 통지서가 온 이후 회계팀은 머리를 맞대고 밤새 대책회의를 했다.
요청 예상 서류를 리스트업하고 걸릴 만한 부분을 체크했다.
예상 법인세를 산출하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 결과와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긴, 내부자도 아닌데 뒤져볼 자료는 뻔하죠. 계약서랑 매출 제일 먼저 보고, 통장 보고 법인카드 보고.”
마침 조사팀에 붙여 둔 직원이 회계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통장 내역 요청하십니다’라며 운을 뗐다.
회계팀의 직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계약서를 벌써 다 봤을 리는 없고, 역시 겉핥기로 보고 끝내려나 보네요.”
“볼 게 워낙에 많잖아요. 눈에 띄는 대로만 하는 거죠.”
계약서는 전문지식 없이는 해석조차 어려웠다.
외국어로 된 것에 한국어로 해석과 각주가 달려 있었지만, 제대로 보려면 외국어 원문도 봐야 했다.
절대 공무원이 다 살펴볼 수 없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자세한 건 모를 테니 계약서에 쓰여 있는 금액하고 당시 환율 곱해서 매출액 추산하고 덮었을 거예요. 장담해요.”
회계팀 직원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 유명한 신재현과 서울청 조사팀이 자신들의 예측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상대도 별수 없는 공무원이라는 감상과 몇 날 며칠 야근하며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차올랐다.
“통장은 엑셀로 해서 USB에 담아드릴게요.”
“공인인증서 갖고 오셔서 눈앞에서 열어 달래요.”
거래 건수가 많으니 통장 내역은 보통 엑셀로 요청한다.
그런데 엑셀은 수정이 가능하다.
그러니 눈앞에서 열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세무서에서 일반 기업에 요청할 땐 그냥 엑셀로 받아가잖아요. 왜 굳이 와서 열어 달래요? 세무조사의 전제 조건이 납세자의 제출 자료는 믿는다 아니었나요?”
“저야 사정은 모르죠. 말만 전달했을 뿐인데.”
조사팀 까다롭네, 하고 회계팀 직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무이사의 허락을 받고 파일 반출을 받아야 하니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 사이 조사팀의 심부름을 온 직원에게 공무원들의 동태를 물어보려 눈을 마주친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지산이 잘 방어하고 있으니 당연히 환한 얼굴일 줄 알았는데, 어딘가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임님, 공무원들이 갑질해요?”
설마 해서 물었으나 심부름 온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데, 제가 아는 조사랑 뭔가 좀 다릅니다. 이상해요.”
“어제 계약서랑 매출 봤으니 오늘은 통장. 예상에서 한 치도 안 벗어나잖아요.”
“아뇨, 어제 제가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요청 자료 전달했잖습니까. 그런데 어제 매출 확인 다 끝났다고 했어요.”
“……그게 어떻게 벌써 끝나죠?”
상식 밖의 사태에 회계팀 여직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도 계약서는 오로지 신재현 팀장님 혼자서 훑어봤습니다. 계약서 들어보고 한쪽에 던지고. 그러고 그냥 끝이었어요.”
“에이, 계약서는 전문적인 법률 지식이랑 건설업 지식 있어야 검토가 가능해요. 그냥 복사해서 청 가서 볼 생각이었나 보네요.”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정확하게 분류했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다른 팀원들이 각자 분담해서 뭘 하나씩 훑어보고 갖다 주면 신재현 팀장은 스윽 읽고 어떤 건 왼쪽에, 어떤 건 테이블에 올려놔요. 그게 끝이에요.”
“보기만 하고 분류하는 건 회계 경력 25년 차인 우리 실장님도 불가능해요.”
회계팀 여직원은 슬쩍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땐 불안했는데 설명이 이어질수록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뭘 보고 겁먹었는지는 몰라도 잘못 본 것이 분명했다.
“안 믿으시는군요?”
“얘기가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어야 믿죠. 검토가 아니라 필요한 자료, 필요 없는 자료 분류하기도 벅찰 텐데.”
회계팀 여직원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직접 보세요.”
심부름 온 직원은 처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공무원들에게 배정된 복도 끝의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회계팀 여직원은 걸음을 멈췄다.
“이게 대체…….”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테이블은 둘로 나뉘어 그 사이에 신재현이 앉아 있었는데, 공무원들이 한쪽 테이블에 자료를 뽑아 올리면 신재현은 그것을 스윽 훑었다.
속도로 봐서는 절대 정독이 아니다.
정말 겉핥기였다.
그런데도 뭘 잡아냈는지 어떨 때는 옆에 있는 박스로, 또 어떨 때는 옆 테이블 위로 서류가 넘어갔다.
분류가 끝난 자료는 또 한 명의 공무원이 전담하여 상자에 담고 목록을 작성하고 복사해 추렸다.
이것은 하나의 오케스트라였다.
자신보다도 어린 청년을 중심으로 6명의 공무원들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다.
감히 방해하는 것조차 꺼려질 정도로 딱딱 맞물려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들어 본 그 어떤 조사와도 달랐다.
“아, 통장 가져오신 겁니까?”
“네…….”
회계팀 여직원은 홀린 듯 다가가 USB를 내밀었다.
“이쪽 컴퓨터에서 통장 뽑아주세요. 엑셀로 내려 주시면 됩니다.”
“네, 네에.”
여직원은 안내받은 의자에 앉아 은행 페이지를 열면서 조심스럽게 앞에 놓인 서류를 훔쳐보았다.
아래 박스에 들어간 것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은 뚜렷하게 보였다.
애초에 항상 신경 쓰고 있던 계약서라 눈에 잘 띄는 것이기도 했다.
‘저, 저게 왜……!’
회계팀 여직원은 따로 분류되어 있는 계약서와 복사본을 보자마자 눈을 부릅떴다.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서 걱정하고 있던 계약서가 하필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설마 저 계약서가 모두…….’
하루 만에 계약서가 까발려졌다.
그럼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얼마나 더 파낼 것인가.
‘괴물 같은 놈!’
여직원의 눈동자가 갈 곳 없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