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91화 (191/500)

191화.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 (2)

-오늘 9시 정각, 지산 그룹 계열사 21개 회사에 대한 정기 세무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국세청은 본청과 서울청, 중부청의 조사관 약 300명을 동원하여 조사 시작 전부터 큰 관심을 받아 왔습니다. 국세청은 앞선 발표에서 대기업이라는 이유로 세무조사에서 피해갈 수 없으며, 17년 만의 세무조사인 만큼 계열사 전반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안 그래도 화제였던 국세청의 행보가 대기업 세무조사라는 말에 언론이 떠들썩했다.

논조는 거의 두 가지로 갈렸다.

처음엔 대기업에 대한 횡포라며 국세청을 비판하는 기사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역효과였다.

└국세청 발표 보니까 17년 만에 하는 세무조사라던데 횡포까진 아니지 않음?

└대기업이라고 나쁜 건 아니지. 열심히 돈 벌어서 회사 키운 죄밖에 없는데. 그래도 국세청이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조사하는 거 아닐까? 일단 나는 중립 기어 박아봄.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동네 슈퍼든 탈세했으면 세금 내야지. 탈세했는지는 국세청이 알아서 조사할 거고.

└지급 급발진하면 박제 각이다ㅋㅋ 다들 기어 잘 잡아라ㅋㅋㅋ

사람들은 쉽사리 국세청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동안 쌓아온 신뢰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이제 당황한 것은 언론사였다.

여론과 언론의 방향이 어긋나면 티가 난다.

필요 이상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논조는 조금 더 부드럽게 바뀌었다.

세무조사는 모든 회사가 받는 것이니 지산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별일 아니고 성실하게 조사받겠다.

이런 논조였다.

그리고 언론의 방향이 바뀌자 자연스럽게 패널의 발언도 자유로워졌다.

기사에서는 대놓고 말하지 못하더라도 패널의 입을 빌려 지산과 국세청, 양 측의 입장에서 분석을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재벌기업은 오히려 일반 기업보다 세무조사를 덜 받습니다. 중소기업 같으면 평균적으로 5년에 한 번은 세무조사를 받잖아요. 그게 과세권이 5년 한도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5년에 한 번씩 조사해서 5년 치를 한꺼번에 과세하면 빈틈이 없는 거죠.

-그럼 왜 재벌은 자주 세무조사 하지 않는 겁니까?

-첫째는 부담스러워요. 세무조사 들어간다는 예고만으로도 기삿거리가 됩니다. 잘해야 본전이고요. 과하게 탈탈 털면 정부가 재벌 죽인다고 욕먹기 딱 좋고, 그렇다고 설렁설렁하면 정부가 봐준다고 뇌물 얘기 나오기 십상이에요. 둘째로는 봐야 할 게 너무나도 많습니다. 연결재무제표부터 시작해서 해외 지점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회계 지식으로는 손도 대기 힘들어요. 국세청은 세법 전문이지 회계는 잘 모르거든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세무조사라는 것 자체가 기업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기업의 이미지에 악영향이 가요. 이미 세무조사라는 발표만으로 지산의 탈법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번엔 국세청이 안일했어요. 애초에 탈세와 절세는 다릅니다. 탈세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탈세가 가능케 한 정부의 잘못이지 기업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기업은 항상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있거든요.

여러 의견과 추측이 나돌고 있을 때 현장에 파견 나간 조사관들은 눈코 뜰 새 없이 자료를 뒤지고 있었다.

오전 11시.

‘지산 현장조사 팀장방’이라는 이름의 단톡방에는 쉴 새 없이 푸념이 올라왔다.

어디에 조사 갔다는 사실조차 남과는 공유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지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회사는 개별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하나의 그룹으로 묶여 있다 보니 연관되는 부분이 많았다.

때문에 팀장급끼리 따로 방을 만들어 정보를 공유하기로 한 것이다.

-다들 잘 하고 계세요?

-지금 자료 정리만 해도 하루 종일 걸릴 것 같습니다. 통장도 왜 이렇게 많죠?

-일단 계약서부터 파세요. 계약서랑 매출액 비교하는데 아마 해외 거래가 많을 거예요. 환율이랑 외환차손익 꼭 확인하세요.

-수출면장 CIF가 운임 포함 맞나요?

-FOB가 운임 포함이고 CIF는 운임이랑 보험료 포함이요.

-하나씩 끝내요, 하나씩. 지금 보니까 양이 너무 많아서 일반 회사처럼 했다간 안 끝나겠어요.

-계열사끼리 전도금 오간 거 따로 정리해서 파일 올려야 될 것 같습니다.

-다들 계약서랑 매출매입부터 시작하시는 것 같으니까 혹시 매출 끝내고 통장 파기 시작하시는 분 있으면 알려주세요.

-캐톡으로 공유하면 안 돼요. 청 들어가서 내부망으로 올리세요.

단톡방에는 주로 실무자들의 노하우가 올라왔다.

그러나 간간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잡담도 섞여 있었다.

-이거 오늘 내일은 청에 못 들어가겠는데요.

-벌써 2시간 지났어요? 우리 이제 겨우 원장 1년 치 깠는데.

세무조사 때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원본을 세무관서에 보관할 수 없었다.

자료를 다 가져가면 회사의 재무팀은 올스톱 되니까.

재무팀이 멈추면 회사 경영 자체가 어려워진다.

때문에 뭘 가져가고 뭘 복사할지 판단해야 했다.

-각자 식사는 어떻게 하기로 하셨어요?

-근처에 식당 없어서 지산 구내식당 갈 생각입니다.

-저 이런 조사는 처음이라 여쭙는 건데 회사 구내식당 가도 됩니까?

-우리 돈 주고 사 먹는 건데 안 될 것 없지 않나요?

-대기업 구내식당은 뭐 좀 다른가요?

-장난 아니죠. 이따 팀원이랑 꼭 가보세요. 예전에 어떤 회사 조사 나가신 조사관님 얘기 들어보니까 수면실에 샤워실에 장난 아니래요.

-그건 복지가 아니고 야근하라고 만들어둔 거 아니에요?

-어. 그런가?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물이나 믹스커피 이런 것 이외에 주는 것들 절대 받으면 안 됩니다. 잘 아시죠?

-음료수 박스도 안 됩니다. 안에 뭐 들어있을지 몰라요. 집에 가기 전에는 재킷 주머니나 차 트렁크 꼭 확인해보고 타세요.

-실제로 음료수인 줄 알고 받았다가 열어보니 돈이었다는 경험담이 있습니다.

워낙에 큰 조사다 보니 걱정 어린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렇게 조사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

단톡방에 올라온 정보대로 나는 12시가 되자 팀원들을 데리고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내부는 복잡했지만 우리 팀에 전담으로 붙은 두 지산 직원의 안내로 무사히 식권까지 살 수 있었다.

다들 정장 차림이라 그런지 다들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섞여들 수 있었다.

아니면 알고도 일부러 아는 척을 하지 않은 걸 수도 있다.

확실히 구내식당 밥은 싸고 맛있었다.

겨우 5천 원에 정식 수준의 밥, 그리고 후식까지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혜택이었다.

그리고 막 사무실로 올라왔을 때, 전담 직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걸었다.

“팀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올 것이 온 건가?

나는 이 남자가 불러 세운 일 자체가 심상치 않은 것임을 직감했다.

일 얘기라면 굳이 나만 불러낼 필요가 없을뿐더러, 사무실 밖에서 조심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 남자는 지금 못 할 말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말씀하세요.”

혹시라도 으슥한 곳에 갔다가 흰 봉투를 툭 찔러 줬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에게 목격된다면?

아니, 아예 그것을 노린 거라면?

몰래 숨어서 마치 내가 뇌물을 받는 것처럼 연출한 사진을 찍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나는 흘끗 머리 위의 CCTV를 확인했다.

무언가를 주더라도 즉시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것이 CCTV에 찍힌다면 내 결백이 증명된다.

“조금 비밀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더욱 수상하다.

내 경계가 심해져서인지 직원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발짝 다가섰다.

“만나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저녁에 잠깐 시간 되십니까?”

너무 전형적인 방식이라서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기는 한 걸까?

“지금 그 얘기가 저한테 어떻게 들리는지 아시죠?”

남자는 우물쭈물하더니 곧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도를 넘었나 보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얘기를 봐서는 딱 그런 제안이던데요. 뭔가요? 녹음기라도 있나요? 그럼 제가 딱 잘라 말씀드리는데 저 아무것도 안 받아요. 저한테 뭘 주려고 하는 순간 모가지 날아가는 거예요. 안 봐주는 거 아시죠?”

너 지금 머리 위에 숫자 안 보여서 친절하게 네 잘못을 말로 알려 주는 거다.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자 직원은 당황해서 연신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저, 정말 아닙니다. 제가 바보도 아니고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겠습니까. 팀장님이 어떤 분인지는 멀리서 기사로나마 익히 봤습니다. 저도 뇌물 따위로 인생 망치기는 싫습니다!”

필사적으로 직원이 항변했다.

너무나 절실한 모습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짜고짜 나오라고 하면 제가 나갈 수 없는 것 아시죠?”

직원이 와서 말하는 걸 보아하니 분명 지산의 관계자다.

지금 내 입장에서 지산의 인물과 접촉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

물론 뭔가 이유가 있다면 만나볼 수는 있다.

3일 전에는 신우현과 만났으니까.

그러니 이 상황에서 반드시 만나야 하는 이유를 들어 나를 설득해 보아라.

그런 의미였다.

이 말이 잘 전달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원은 한참을 고심하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말씀드렸는데 섣불리 만날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적어도 누군지나 이유는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직원은 손으로 전화를 가리고 조심스럽게 말하더니 내게 핸드폰을 건넸다.

액정에 쓰여 있는 글자는 JSY였다.

알파벳만 보고는 언뜻 누구인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분명 지산 쪽 인물인데 직함이 아니라 알파벳으로 저장했다니.

지산 엔지니어링에 다니지 않는 인물의 냄새가 났다.

“여보세요.”

-신재현 팀장님. 이렇듯 전화로 말씀드리는 건 예상에 없던 일입니다. 피차 길어지면 좋을 게 없으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대는 젊은 여자였다.

30대 중반의 젊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다.

“……그러시죠.”

-전 물질적인 그 무엇도 드리지 않을 겁니다. 필요하시면 카메라를 들고 나오셔도 됩니다. 대신 녹음은 안 되는 거로요.

협상이 뭔지 아는 사람이다.

내가 왜 나가지 않으려는지 이유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것만 해결해 주면 당연히 만나지.

물론 그렇다고 쉽게 만난단 소리를 하진 않는다.

“누구시죠?”

-지산의 사장 중 하나입니다.

지산은 계열사가 많은 만큼 사장도 수십 명이다.

자기소개치고는 매우 성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되묻지 않았다.

전화 주인이 누군지 이미 눈치챘으니까.

“……호칭은 생략하겠습니다. 이해하십니까?”

-네. 얘기는 들었으니까요.

“공무원으로서 지산 계열사의 사장님과 비공식적으로 만나는 겁니다. 단순히 대화만 나누겠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이따 퇴근하실 때 앞에 있는 직원에게 알려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

“오늘은 이쯤 하고 집에 갈까요?”

“자료 이대로 놓고 가도 돼요? 적지나 다름없는데 누가 들어와서 보면 어떡하죠?”

“노트북 켜놓고 캠 작동시켜 놓고 가죠. 입구 쪽으로 돌려놓으면 누가 들어오는지 바로 보여요.”

“노트북에 중요한 건 없죠?”

“당연하죠. 저장용인데.”

나름 머리를 굴려 의견을 낸 팀원들은 저마다 자리를 단속했다.

그리고 사무실 문단속을 한 후 팀원들을 돌려보내고 나는 지산의 직원을 따라나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운전석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걸어 나오더니 내게 인사했다.

날 안내해 준 직원이 더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 멈춰 서자 운전석의 남자는 차의 뒷문을 열었다.

차에 올라타자 밤인데도 챙 모자를 깊게 눌러쓴 여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서연 사장님.”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나와는 인척 관계로 연결된 사람.

신우현의 부인.

지산 회장의 막내딸이자 지산 호텔의 사장인 지서연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신재현 팀장님, 우리 언니에 대해 제보할 게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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