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90화 (190/500)

190화.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1)

약속의 날 아침.

지산의 총수 지창태는 아침밥을 먹는 자리에서 식구들을 단속했다.

“오늘은 외부인이 회사에 많이 들어오는 날이니까 각자 처신 잘 해.”

“예, 아버지.”

“특히 둘째는 오늘만이라도 성질 죽이고. 너는 입이 문제야.”

“왜 우리가 공무원한테 겁을 먹어야 해요?”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서 대놓고 공무원한테 면박 주거나 찔러주면 안 돼.”

둘째 딸이 입을 삐죽이는 사이 막내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 뉴스에서는 중부청 낌새가 심상찮다고 했어. 내가 세무조사를 겪어 본 적은 없지만, 다른 기업 얘기를 들어보면 국세청 세무조사는 저승사자나 다름없다고 했어.”

“걱정할 것 없다. 국세청이 까다롭기는 해도 결국엔 이 나라의 공무원 기관일 뿐이야. 이런저런 방법은 많아. 중부청장은 지금 전략실이 총력을 기울여서 건수를 찾고 있다. 어르고 달래면 해결돼.”

둘째 딸과 막내딸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르자 둘째 딸이 표독스럽게 말했다.

“너는 네 남편이나 잘 챙기지 그래? 요즘 제부네 회사 적자 난다며?”

“언니, 내 남편이니까 그 정도 적자로 그치는 거야. 원래부터 계륵이던 회사를 맡아서 능력을 증명하고 있는 거잖아. 언니가 맡았으면 진작 망했을걸? 언니야말로 회사 잘 챙겨. 분식회계 들키지 말고.”

“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관리를 못 하니까 들키지.”

둘째와 막내의 기 싸움은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분식회계라는 무서운 단어가 나왔음에도 이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회장 역시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둘째야, 뉴스에서 대국민 사과하는 일은 없도록 잘 수습해라.”

둘째 딸이 이를 악물었다.

***

D-Day

지산의 모든 임직원은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근했다.

온 건물을 뒤집어엎어 국세청이 요구할 만한 자료를 찾아 두었고 대청소도 했다.

물론 대청소는 세무조사 때문에 한 것이 아니다.

건물을 돌아다닐 임원진을 위한 것이었다.

“들어오면 바로 안으로 모셔. 무조건 협조하겠다고 해.”

재무이사는 회계팀 사무실로 내려와 눌러 앉았다.

타 부서의 직원 중에는 불구경하듯 재밌어 하는 사람도 있었고, 무슨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하는 직원도 있었다.

그러나 세무조사를 직접 대응해야 할 당사자인 회계팀과 법무팀은 목이 죄어오는 긴장 속에서 공무원을 기다렸다.

그것은 지산 엔지니어링도 마찬가지였다.

오전 8시 50분.

지산 엔지니어링 사옥 앞에 두 대의 차량이 들어왔다.

로비에 서 있던 안내 직원이 부리나케 입구로 달려 나왔지만 차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머쓱해진 직원이 마른침을 삼키며 회전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묘한 정적을 깬 것은 부리나케 달려온 기자들이었다.

건물 한쪽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은 입구 바로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차를 보자마자 달려와 카메라를 들이댔다.

지산의 계열사는 많았고, 찍을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기자는 머리와 몸통에 해당하는 큰 규모의 회사로 몰려갔기에 지산 엔지니어링 앞에 모인 기자는 10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9시 정각.

기다렸다는 듯이 차 문이 열렸다.

쏟아져 나온 공무원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무채색의 정갈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아, 공무원이구나’ 할 차림새다.

그들은 하나의 잘 짜인 유기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둘이 납작하게 펼쳐진 상자를 양손에 들고 하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하나는 양식지를 고정한 결재 보드판과 펜을 들고 있었다.

오늘 있을 전 과정을 기록하고 수거할 물품의 목록을 적을 양식지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두 남자가 내려 각각 태블릿 PC와 잠금쇠 있는 사각 상자를 들었다.

철저하게 준비한 모습에 기자들은 물론 직원들까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린 청년을 본 순간 기자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여기로 오길 잘했어!’

‘본사 간 놈들보다 더한 장면을 건질 수 있겠군.’

회심의 미소를 짓는 기자들이 있었고.

‘왜, 왜 하필 여기로 와?’

안내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직원은 식은땀을 흘렸다.

“준비 다 되셨으면 가시죠.”

“네, 팀장님.”

청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무원들이 2명씩 열을 맞춰 섰다.

청년은 주위에 선 기자를 쭈욱 훑었다.

비장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얼굴에서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번져 나왔다.

신재현을 필두로 일행이 건물 입구로 향했다.

기다리고 서 있던 안내 직원이 자동문을 열어 고정시키고 공손하게 손바닥을 펴 안을 가리켰다.

수십 명에 달하는 직원이 입구에서부터 좌우에 일렬로 쭉 서 있었다.

사람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조사팀이 로비를 밟자마자 그 수십 명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지산 엔지니어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많이 해 본 것처럼 우렁차고 통일된 목소리였다.

초장에 기선을 잡아 버리겠다는 의도가 너무나 명확한 환영 인사였다.

대기업 면접 자리에서나 해 볼 법한 90도 인사에 조사팀이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쫄았나?’

‘으이구, 이거에 쫄면 어떡하냐. 윗대가리들이 그거 노리고 동원한 건데.’

‘아침부터 인사나 하고 있으려니 현타 온다…….’

미리 약속했던 대로 3초의 시간이 흐른 후 직원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 또한 한 몸인 것처럼 정확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내리꽂히는 눈빛에 숨을 들이켰다.

직원들의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압도당해서 발도 못 떼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맨 앞줄에 서 있던 청년은 팔짱까지 끼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이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까지 어린 걸 보면 ‘끝이야? 더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직원들이 당황하며 서 있자, 왠지 실망스러운 얼굴로 바뀐 청년이 사람으로 이루어진 길로 발을 내디뎠다.

‘잠깐, 저거 신재현 아니야?’

‘국세청의 사신이 우리 회사로 왔다고?’

‘일부러라도 피할 줄 알았는데. 미쳤네.’

지산 엔지니어링 이사와의 혈연관계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동생의 손으로 형의 회사를 아작낸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국세청에서 일부러 다른 쪽으로 파견을 보내리라는 것이 일반 직원들의 예상이었다.

‘그럼 우리 회사는 산 건가?’

‘형이니까 빡세게는 안 하겠지?’

직원들이 기대감을 품었다.

그 사이 조사팀은 로비를 통과했다.

직원들이 늘어선 끝에는 지산 엔지니어링의 임원진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신재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가볍게 묵례했다.

수많은 임원을 제치고 가장 가운데 선 것은 신우현이었다.

비록 직급은 이사라지만, 총수 일가의 일원으로서 경영과 의사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조사팀과 임원진이 마주 보고 섰다.

원래 계획이라면 임원 중 대표로 한 명이 나서서 인사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총수 일가 중 한 명인 신우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저절로 시선이 쏠렸다.

사정을 아는 이사들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직원들은 닮은 두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옆모습이 똑 닮았지만 둘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오늘 처음 이 회사에 발을 들인 쪽은 여유가 가득한 얼굴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로열패밀리이자 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린 이사는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는 듯 볼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직원들이 갸웃하며 쳐다보다가 신우현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잘못하면 나중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수가 있었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자 보다 못한 전무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 신 이사님.”

신우현은 파들파들 떨리는 입을 열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정말 굴욕적이라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임원진의 대표로서 신우현이 말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누가 들어도 이상하다 여길 정도로 이를 악문 목소리였다.

신재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했다.

“지금부터 지산 엔지니어링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하겠습니다.”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절차가 시작되었다.

***

이사진은 겉으로 보기에는 공손했다.

적어도 형 새끼만 빼면 그렇다.

저놈은 나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일생일대의 굴욕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티를 냈다.

아니, 내가 올 수도 있다는 건 이미 예상한 것 아닌가?

세무조사 통지서를 보여주고 납세자 권리 헌장을 교부하고, 청렴 확인서에 서명을 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준비되어 있습니다.”

절차를 마치고 나자 이사진은 무엇이 필요한지 묻지도 않고 우리를 이끌었다.

신우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억지로 이사진의 앞에 자리했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뭘 요구한 것도 없는데 대체 뭘 준비했다는 것인가.

궁금해서 얌전히 따라가자 우리 사무실의 네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회의실이 하나 있었다.

책상, 의자, 테이블 어느 것 하나 싸구려는 없었다.

실제 쓰던 것을 가져온 듯 사용한 흔적도 남아 있었다.

당장 노트북을 연결해서 써도 될 것처럼 자리마다 콘센트와 랜선이 준비되어 있었고, 복합기도 한 대 들어와 있었다.

정수기의 물통에는 물이 가득 차 있고 그 옆의 작은 테이블 위에는 여러 종류의 과자와 티백이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몸만 들어가면 되는 완벽한 준비 상태다.

큰 회사에서는 이런 식으로 직원들이 자료까지 모든 것을 챙겨준다는 말은 들었다.

어디까지나 말만 들었지 직접 겪어보게 될 줄은 몰랐다.

“베이스는 이 회의실 전체를 쓰시면 됩니다. 사람 둘을 붙여 드릴 테니 필요한 자료가 있으시면 부담스러워 마시고 말씀하세요.”

거기다 사람까지 붙여준다고?

내 팀원들의 눈동자가 갈 곳 없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 여기는 적진이다.

우리는 원정을 와 있는 것이다.

대표자인 나마저 흔들릴 수는 없다.

신우현이 바로 옆에서 보고 있다.

나는 표정을 관리했다.

“회계팀, 또는 재무팀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이 사무실을 나가셔서 이 복도 끝으로 가시면 있습니다.”

일부러 같은 층에 배정해 준 것이다.

이런 것에서도 쓸데없는 배려가 느껴졌다.

도대체 의전을 어디까지 하는 거지.

“이 사무실의 열쇠는 테이블 위에 있습니다. 사무실 바로 앞에는 CCTV가 있으며, 전 직원에게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부르지 않는 한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해 두었습니다. 조사하시는 동안 편하게 사용하십시오.”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설명했다.

“회계 전반에 대해 질문이 있으실 땐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저는 지산 엔지니어링의 재무이사 서주평입니다.”

재무이사는 지극히 공손한 어투로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을 나갔다.

지금도 복도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신우현과는 천지 차이다.

모든 이사들이 나가고 나자 조사팀에 붙여 준 두 명의 지산 직원이 남았다.

이런 대우는 처음이긴 한데, 그래도 상황은 우릴 기다려 주지 않는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팀원들에게 짐을 풀라고 지시하고 남아 있던 지산의 직원 둘에게 물었다.

“임직원 인명록이 필요합니다.”

“이쪽 상자에 있습니다.”

“회계 관리는 자체 프로그램을 씁니까?”

대기업의 경우 시중에 판매하는 프로그램보다는 자체적으로 개발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지산 자체 ERP를 씁니다. 이쪽 컴퓨터에 연결해 뒀습니다.”

직원은 일말의 틈도 없이 책상 한쪽의 컴퓨터를 가리켰다.

이미 프로그램까지 다 세팅해둔 것이다.

이러면 재무팀을 쳐들어가기도 뭐한데.

조사팀원들이 계정, 급여대장, 정관, 주주 등 각자 맡은 분야를 들춰보기 시작하는 동안 나는 가장 큰 이슈가 될 것 같은 서류를 불렀다.

“근 5년 간의 수주 계약서. 갖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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