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마지막 기회를 줄게
D-6
중부청장이 총력전을 선언했다.
굳이 숨기지도 않았기에 이 소식은 금방 언론에 퍼졌다.
‘지산이 혹시 밉보였나?’
이런 의혹이 돌 정도였다.
D-5
언론의 논조가 바뀌었다.
일제히 지산을 옹호하는 기사가 터져 나왔다.
유일하게 중립적인 서술을 하는 것은 나학진의 인터넷 신문뿐이었다.
D-4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이나 지산 그룹이 예상했던 것보다 판이 커지고 있었다.
‘단두대 매치 - 지산 vs 국세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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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라면 누가 세무조사를 받든 주주나, 업계에서만 화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재현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신재현에게 쏠린 관심은 그대로 국세청에게 옮겨갔다.
국세청이 대기업을 상대로 얼마나 선전할 것인가.
국회에서 공성전이 벌어졌을 때만큼이나 국민의 기대감이 높아졌다.
‘여론이 너무 뜨거워졌잖아! 세무조사 받는 걸 이렇게까지 광고해서 어쩔 거야!’
지산은 의도한 것보다 더한 관심에 뒤늦게 언론을 압박해 기사를 내렸다.
국세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긴급히 청장급 회의가 소집되었다.
“관심을 끌어서 지산이 함부로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지, 서로의 명예를 걸자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말릴 수도 없는 지경까지 왔어요. 국민의 관심이 너무 뜨겁습니다.”
“저는 단두대 매치라는 말 처음 들었습니다. 이러다 진짜 목 잘리게 생겼어요.”
화제가 될수록 책임은 커지고 실수는 용납받지 못한다.
청장 경합이어야 할 무대가 피바다가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러다 삐끗하면 누군가는 옷을 벗는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국세청의 미래를 걱정하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지산과의 싸움을 앞둔 당사자들은 전혀 미동도 없는 모습이었다.
당사자들이 가만히 있는데 다른 청장들이 안달복달해도 소용이 없었다.
중부청장은 자신이 국세청 차기 수장으로서 임팩트를 가지길 원했고, 어차피 과하게 지산을 친다 해도 국세청장이 되면 적당히 무마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세무공무원 몇이 지산의 공격에 갈려 나가는 것은 알 바 아니었다.
민치호는 중부청장이 더욱 날뛰어서 지산의 주목이 그에게만 꽂히길 원했다.
결국 국세청의 방침은 ‘세무조사에 최선을 다한다’로 정해졌다.
D-3
폭풍전야 같은 고요함이 양측에 흐르는 가운데, 신재현은 신우현을 불러냈다.
***
완연한 여름밤, 강바람을 맞아도 그다지 춥지 않았다.
한강에는 한여름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그득했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삼삼오오 모여 음식도 시켜먹고 노닥거리는 걸 보니 새삼 부러워졌다.
형이라는 새끼가 집을 나간 이후로 저런 광경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놈은 절대 돌아올 놈이 아니었고, 돌아온다 해도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남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씁쓸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달각.
나는 빈 맥주 캔을 구겨 옆에 내려놓았다.
가로등마저 닿지 않는 다리 밑 한쪽에 앉아 있으려니 옛날 느꼈던 우울함이 부표처럼 떠올랐다.
감정이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온갖 상념이 씻겨 내려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중엔 형이라는 새끼가 집을 나가면서 했던 말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난 2년 반을 세무공무원으로서 바쁘게 살았고, 나름 인정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그놈에 대한 감정은 희석되고 무뎌졌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도 그놈이 뱉은 말이 생각날 정도로 기억이 생생했다.
-잘그락.
부서진 돌조각이 구둣발에 밟히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나와 닮은 얼굴의 남자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다리 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나오면서도 번듯한 정장을 똑바로 차려입은 빈틈없는 모습이다.
나야 브랜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돈이 꽤 들었겠다 싶은 차림새였다.
“왜 불러내고 지랄이야.”
나와 닮은 얼굴로, 나와 닮은 목소리로 신우현은 만나자마자 욕설부터 퍼부었다.
물론 나 역시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을 테니 상관은 없다.
이제 와서 그런 거로 상처받을 시기도 아니고.
“불러낸다고 잽싸게 나온 놈이 할 말은 아니지.”
내 대답에 신우현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이 보였다.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네.”
“그럼. 그 세월이 몇 년인데 당연히 커야지. 널 잡아서 조져 버릴 정도로 커야 하지 않겠어?”
“허, 미친놈.”
신우현은 혀를 차며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왜 불러냈는데.”
나는 저 멀리 교각 밑을 통과하는 커다란 새 한 마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시간에도 열심히 물고기를 찾아 헤매는 새가 있나 보다.
“신우현, 너는 그러고 나간 거 후회 안 하냐?”
“겨우 그런 거 때문에 불러낸 거냐? 시간 낭비했네.”
“제대로 대답해.”
신우현이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듯 투덜댔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내 겉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미쳤나?”
“전면전이 얼마 안 남았는데 갑자기 불렀을 땐 뭔가 이유가 있는 법이지. 너 녹음기 숨겼냐? 지금 날 함정에 빠뜨리겠다, 이거지?”
눈치는 빠른 놈이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었다.
녹음되는 것 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신우현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너 저번에 고소당했던 거, 녹음기로 모면했다며. 녹음기 어딨어?”
신우현이 내 옷을 뒤지다가 재킷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역시 들키는군.
아니면 재벌가 역시 이런 일에 민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 그렇지. 역시 오늘 괜히 불러낸 건 아니라 이거지?”
신우현이 의기양양하게 녹음기를 들어 올렸다가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강에 던지려고 한 것 같은데 거리가 멀어서인지 계단 밑에 떨어졌다.
나는 아쉬운 척 입맛을 다셨다.
“저거 비싼 건데.”
“잘됐네.”
“그럼 녹음기 값이나 하고 가. 이젠 말해도 되잖아. 집 나간 거 정말 후회 안 해?”
녹음기가 없어져서인지 신우현은 쉽게 입을 열었다.
“절대 후회 안 해. 아니, 오히려 잘한 거지. 그 집구석이 얼마나 내 발목을 잡았는지 알아?”
“누구나 금수저일 수는 없잖아. 다들 힘들고 어렵게 살아. 그러면서 헤쳐 나가는 거고. 너는 받을 거 다 받았으면서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야, 너 강남권 애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안 봤지?”
이 새끼 또 개소리하네, 라고 면박을 주려다가 도로 집어삼켰다.
그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내가 이 새끼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저놈을 봐서가 아니다.
오로지 어머니를 생각해 내 나름대로 정한 마지막이었다.
“어디 한번 지껄여 봐.”
“밥 걱정, 학원비 걱정 없이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내. 공부는 과외를 부르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이 자라. 그러면 성격에 모남이 없고 항상 여유와 자신감을 가지는 아이가 완성되는 거야. 반대로 너와 나 같은 놈은 어떨 것 같아?”
“마음에 여유가 없지.”
“항상 전전긍긍하고 가진 것 조금이라도 뺏길까 봐 인간이 편협해져. 사고방식이 조잡해지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일반화시키지 마. 부자여도 편협한 새끼들은 널렸어.”
“부자는 성격 좀 나빠도 돼. 대신 돈이 있잖아.”
“그래서 재벌 집 들어가니까 좋아? 진짜 가족을 버리고 그쪽 가족의 일원이 되니까 온몸의 피가 다 바뀐 것 같아?”
“당연히 아니지. 내 몸에 흐르는 더러운 하층민의 피는 쉽게 바뀌지 않아.”
“부모님한테 하층민이라고 하는 거냐, 이 미친놈아?”
“이제 슬슬 세상이 어떤지 봤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네. 이 세상은 신분제야. 나는 상위 신분으로 올라간 거고. 이게 바로 남들이 말하는 자수성가 아니야?”
여전해서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나는 이것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때문에 마지막 기회를 주긴 했지만 나는 저놈이 그것을 걷어차길 바랐다.
그래서 더 이상의 망설임도 없이 조져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너는 지산에서 그 지랄을 하고 다니는 거냐? 인터넷 찾아보니까 안 좋은 소문이 돌던데. 사람 패고 돈으로 막고, 대기업 사위 되더니 진짜 재벌 3세 됐다고 착각하는 거 아냐?”
“아, 본사 법무팀 일 참 대충 하네. 그게 아직도 인터넷에 남아 있어? 야, 잘 들어. 내가 사람을 고용했잖아? 그럼 돈을 주고 사람을 산 거야. 그 노동력은 모두 내 소유물이라고. 일 못 하는 새끼한테 돈값 하라고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원래 이렇게까지 맛이 가진 않았던 것 같은데.
모든 것을 버리고 아예 재벌가 사람으로 바꾼다고 하는 게 이런 거였나.
보고 배운 것이 지산 가의 사고방식이겠지.
그럼 나는 신우현을 통해서 지산 일가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회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재벌 아닌 자들을 무슨 눈으로 보는지.
너무나도 적나라해서 고마울 정도다.
어이가 없어서 웃고만 있자 신우현이 따라 웃었다.
비웃음이다.
“공무원으로 평생 발버둥 쳐봐.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7급으로 시작하면 어디 서장으로 끝나나? 나는 대기업의 일원이야. 백 평 넘는 집에서 자고, 한 끼에 수십, 수백만 원짜리 식사에 1억짜리 와인을 곁들이며, 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동안 너는 쥐꼬리만 한 연봉을 가지고 평생을 서민으로 살 거야.”
나한테 자격지심이라도 있는 건가.
신우현은 특히나 나를 깎아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이미지 관리는 집어던진 지 오래였다.
이 중 단 한 마디만 밖으로 새어나가도 언론의 뭇매를 맞을 만한 내용이다.
“그래, 네 생각은 아주 잘 들었다.”
“아직 한참 더 말할 수 있어. 네가 얻은 건 별 볼 일 없는 명예일 뿐이거든.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잊혀질 테지만 나는 지산의 임원으로서…….”
“더 들을 필요 없을 것 같네. 불러낸 이유나 말해줄게.”
신우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오늘 나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불렀어. 조금이라도 후회하는 기색이 있으면, 부모님에게 미안하다는 척이라도 하면 끝까지는 안 가려고 했거든.”
신우현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이미 국세청이 지산과 전면전 하지 않을 거라는 정보는 들었어. 지산은 적당히 세금 납부하고 말 거고, 국세청은 던져주는 먹이나 먹고 떨어질 거야.”
자랑스럽게 나불대는 정보를 들어 보니 유진환이 전한 것인가 보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든가.”
“이번에 너도 나온다며? 잘됐네. 이번 기회에 좌절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해 본 적 없잖아, 너.”
“글쎄. 나도 궁금하네. 나는 널 어머니 앞에 무릎 꿇릴 생각이거든. 그때 어떤 표정일지 기대가 된다.”
“미친놈. 너야말로 바닥을 기며 내게 사정하게 될 거다.”
서로를 향한 선전포고를 끝으로 신우현이 한강을 떠나갔다.
신우현이 저 멀리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옆에 내려둔 맥주 캔을 들었다.
-잘그락.
바닥이 뚫린 맥주 캔 안에서 나온 것은 녹음기였다.
그것도 일부러 국세청에서 빌려온 고성능 녹음기.
지금도 주변의 소리를 기록하고 있는 녹음기의 버튼을 누른 후 내용을 확인했다.
신우현의 목소리가 깔끔하게 흘러나왔다.
“재료는 대충 됐고…… 그래, 어디 더러운 싸움 한번 해 보자.”
3일 후 있을 사건을 기대하며 나는 녹음기를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