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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188화 (188/500)

188화. 판을 깔아주마 (4)

내가 딱 잘라 거절했음에도 유진환은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안 될 것 같지만 한 번 더 설득해보겠습니다.”

“잘 아시네요. 안 될 테니까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정보를 흘려 달라는 게 아닙니다. 목적 정도는 언급해도 되잖습니까.”

“하지 말라면 꼭 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사람 말을 왜 안 듣나 모르겠네.”

“어차피 지산은 국세청이 잡아먹기 힘든 곳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도록 돕는 것이 국세청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언제 지산을 잡아먹는다고 했습니까? 우리는 국가 기관이에요. 왜 대기업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대화라기엔 거의 독백 수준이었다.

이유는 명백했다.

상대의 말에 휘말려 말실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신 팀장님, 제게 지산과 국세청의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대기업이라고 해서 국세청의 적이 아닙니다. 적으로 생각하는 건 오히려 그쪽이죠. 세금 많이 내는데 얼마나 고맙고 좋습니까?”

“둘의 충돌을 최소화하고 알맹이만 골라서 드리겠습니다. 지산은 세금을 낼 의향이 충분히 있어요. 그러니 세무조사는 딱 계열사 3분의 1 선에서 끝내는 선으로 절충할 겁니다. 그리고 신 팀장님이 조사한 곳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게 될 거고요.”

유진환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내게 제안했다.

이제 독백은 의미가 없었다.

“법대로 할 겁니다. 지산이 뭔가를 어긴 게 있으면 딱 그만큼 낼 거예요. 왜 자꾸 국세청과 지산의 구도로 끌고 가려는 겁니까?”

답답함을 토로하는 순간 무언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지산 쪽에서는 이렇게 언플하러 나오겠구나.

“신 팀장님이 위에 말하면 해결될 거라 생각합니다. 서로 피 안 보는 방법이잖아요. 아무리 제가 싫다 해도 국세청을 위해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나는 가만히 유진환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주위에 끈덕지게 흐르는 숫자의 강을 보았다.

하도 많아서 비교하긴 어렵지만 예전에 봤을 때보다 늘어난 듯싶었다.

말은 달콤하다.

솔직히 중간에 조금 솔깃한 면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 보이는 징그럽게 많은 숫자들이 날 일깨웠다.

이놈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절대 국세청이나 법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게 왜 왔을까.

“진심으로 절 설득하러 온 건 아니군요.”

“음?”

내가 묻자 유진환이 미동도 없이 말했다.

“왜요? 전 진심입니다. 신 팀장님과 손을 잡으러 왔어요.”

“당신은 나를 잘 알 겁니다. 그런 말로 넘어갈 것 같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그러니 찔러도 소용없다는 건 그쪽이 더 잘 알 겁니다. 그럼 왜 왔느냐…….”

나는 유진환의 눈을 빤히 보고는 던지듯 말했다.

“그쪽에 대단한 정보는 없는 거로군요. 내가 이번 조사의 주요 멤버라 생각하고 찔러 보러 온 거고. 한마디 한마디 개소리와 진의를 섞어 말했을 때 내 반응을 보려고.”

“네. 정답입니다.”

유진환은 쉽게 인정했다.

“나는 말입니다. 말이 아닌 몸짓도 충분한 언어라고 보거든요. 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행동을 제어하는 건 특수한 훈련 없이는 어려워요.”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연락을 받고 나왔을 때부터 그를 완전히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대가 상대인 이상 하나를 받고 하나를 주고, 그런 모양새가 될 거란 생각은 했다.

그런데 그가 내 행동을 읽었다면 내가 얻은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읽어갔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제 혼잣말입니다. 팀장님이 맞다, 틀리다 안 하셔도 돼요.”

대답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은 내게 더는 얻어갈 것이 없다는 뜻이자, 내 감정을 생각한 배려다.

이놈이 지금 누굴 배려해?

“그런 배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얘기하세요.”

“국세청이 왜 갑자기 대기업을 치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큰 대상이 필요했고 그중 가장 적절한 후보가 지산이었던 것 같군요. 지산은 대기업 중에서도 악명이 높으니까요.”

“계속하시죠.”

“하지만 국세청은 지산을 아예 뜯어 없애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전면전이지만 실상은 피해가려는 움직임이 보입니다. 정말 지산을 박살 낼 거였으면 사전통지서가 아니라 바로 쳐들어왔겠죠.”

지산은 거대하다.

국세청 역시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로.

게다가 국세청의 입장은 언제나 같았다.

법대로 한다.

지산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것만 도려낸다.

멀쩡한 기업체를 박살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따로 협상을 할 필요는 없겠군요. 가만히 있어도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출 테니.”

“탈세는 철저하게 잡을 겁니다.”

“지산에서 예상한 최악의 경우는 경영권 박탈과 그룹의 해체였어요.”

대기업은 저런 것도 예상하는구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너무 나간 것이라 그만 입을 다물었다.

“국세청이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더는 관심 두지 않겠습니다.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길 바라죠.”

그는 정말로 지산의 건재에만 배팅했던 모양이다.

남은 캔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은 유진환은 근처의 쓰레기통에 캔을 버린 후 돌아섰다.

“오늘의 만남에선 제가 너무 많은 정보를 얻어가는군요. 미움 받는 건 싫으니 제가 귀띔을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유진환은 호의를 가득 담아 내게 말했다.

“팀장님의 형님이 언론 플레이를 준비 중입니다.”

그 새끼가 염치도 없이!

나는 주먹을 꾹 쥐며 이를 갈았다.

“저는 항상 신 팀장님과 함께 하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오세요.”

호의를 베풀어 빚을 지우는 건 이런 놈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나 역시 진심을 가득 담아 작별 인사를 건넸다.

“대화해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맙시다.”

“으하하! 아하핫!”

유진환은 욕을 처먹으면서도 기뻐하며 웃었다.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저놈이 충분히 멀어지자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나 기자님. 혹시 언론 동향 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내가 만약 신우현이라면 어떻게 언플을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저분한 방법만 떠올랐다.

서로 원수가 된 이상 절대 고상하게 싸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며 서로 이름값부터 깎아내겠지.

하지만 알았다면 미리 대비를 하면 될 뿐이다.

-안 그래도 메이저 언론사에 지산의 지시사항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기자들 통해서 얻어놓은 정보 취합 중이었습니다.

지산이 언론부터 손댈 거라는 것도 예상한 일이다.

광고가 주 매출인 그들에게 대기업의 자본력으로 협박하면 방법이 없으니까.

“그 외에 다른 언플이 있을 겁니다. 저에 대해서요.”

-국세청이나 청장급이 아니라 팀장님에게 포커스를 맞춘다고요? 그동안 있었던 조사는 팀장님 주도니까 그럴 수 있다 치는데 이번엔 판이 크잖습니까. 팀장님 친다고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보통이라면 의미가 없지만 신우현과 제 관계라면 말이 다르죠.”

나학진이 침음성을 흘렸다.

“꽤 더러운 싸움이 될 겁니다.”

나는 내게 각오를 다지듯 말했다.

***

중부청에는 요즘 들어 의외의 손님이 찾아들고 있었다.

차기 국세청장의 키를 쥐었다는 주요 인물.

바로 민치호 국장이다.

때문에 그가 중부청에 행차했다는 사실은 직원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우리 청에 왜 왔을까?’

‘저번에 서울청 갔으니까 공평하게 중부청 들린 거지.’

‘이게 무슨 밸런스 게임이냐? 하나하나 다 들리게?’

‘근데 민 국장님이 올 이유가 없잖아요.’

‘지산 대규모 조사 앞두고 조율하러 온 거 아니에요?’

‘전화로도 충분한데.’

‘중요한 일은 전화로 말 못 하지. 녹음되면 어쩌려고.’

‘대체 다음 국세청장이 누굴까? 티를 안 내고 다니니까 전혀 짐작이 안 가네.’

‘이번 세무조사에서 앞서는 사람이 청장 되겠지.’

‘청장듀스101 재밌겠다…….’

‘아냐, 내가 보기엔 이건 요식행위야. 누가 미쳤다고 대기업하고 전면전을 해. 아, 물론 하려면 할 수야 있지만 후폭풍이 장난 아닐걸? 집단 소송 들어오면 골치 아파.’

‘소송 안 들어오는 선에서 윗분들이 잘 하실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지산 건은 보여주기고 이미 청장은 결정된 사항 아닐까?’

‘오, 일리 있어요. 그럼 민 국장님이 요즘 뻔질나게 드나드는 바로 우리 중부청장님이 내정되신 건가?’

세무조사 준비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직원들은 이 화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소문은 금방 돌고 돌아 중부청장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가 희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요즘 민 국장에 대한 소문이 파다합니다. 왜 자꾸 옵니까. 다른 의도가 있나요?”

중부청장의 태도는 차가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민치호는 중부청에 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볼일이 있으면 전화로도 충분했고 청장회의가 있으면 모두 국세청으로 모였다.

세무조사 발표 후 벌써 2번째 방문이니 민치호의 속내를 캐내고 싶은 것이다.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섭니다.”

“왜?”

“그건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수 없죠.”

“까다로운 놈.”

중부청장은 혀를 차고는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뜬금없이 앞뒤 자른 말을 던졌다.

“다음 국세청장으로 날 밀 겁니까.”

“제가 함부로 말씀드릴 수 없는 걸 아시잖습니까.”

“녹음이라도 할까 봐요?”

“나중에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어디까지나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는 분이 청장이 되는 모양새여야 합니다. 그래야 지는 분이 승복하실 것 아닙니까.”

“이 모든 게 국세청을 위해서다?”

“어느 분이 되시든 전 국세청을 위해서 일할 겁니다.”

“난 민 국장의 그런 면이 좋아요. 목적이 명확하고 사람이 투명해. 감정적이지도 않고.”

“다루기 편하다는 말씀이시죠?”

민치호는 노골적으로 대답하며 웃었다.

다루기 편한 것은 서로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이 의외로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중부청장답지 않은 은근한 칭찬이었다.

처음 보는 모습에 민치호는 입맛을 다셨다.

국세청장이 그렇게까지 탐나는 자리인가 싶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혀끝에 쓴맛이 감돌았다.

“민 국장이 언급하길 꺼리니 어쩔 수 없지. 날 지지하려는 거라고 생각하겠어. 부리나케 내 쪽에 힘을 실어주는 걸 보니 내 생각이 맞는 것 같거든.”

“오늘 온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디 말해 봐요.”

“중부청장님께서 이번 일을 주도적으로 이끄셔야 합니다. 국세청 모두의 눈길이 청장님께 쏠리도록. 아니, 지산조차 청장님을 적수로 생각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가능하시겠습니까?”

민치호의 말은 노골적이다 못해 대놓고 하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중부청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만히 민치호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농담의 낌새가 보이지 않자 중부청장은 멍하니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크…….”

중부청장의 잇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이던 중부청장은 이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하하하핫! 내 생각이 맞았어!”

이 일을 주도하라.

그것은 곧 당신이 판을 휘어잡고 올라서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판에서 이기는 자가 곧 국세청장이다.

“좋아. 기꺼이 해드리지. 민 국장이 날 지지한다면야 뭘 못 하겠어요.”

목표로 삼던 수장의 자리에 코앞에 다가와서인지 중부청장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결코 중부청장님을 지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알아요, 알아. 어디까지나 민 국장은 중립이지요.”

못 박듯 말한 민치호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인사했다.

너무나도 정중한 인사였다.

중부청장은 그것이 미래의 수장에 대한 예의라고 받아들였다.

따라서 민치호가 떠난 후, 중부청에는 하나의 지침이 내려왔다.

지산의 몸통과 머리를 가리지 않고 물어뜯어라.

-중부청이 선을 넘었다!

후에 그 소식을 들은 민치호는 중부청장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마지막 인사는 드렸습니다, 청장님.”

지산의 모든 공격이 중부청장에게 쏠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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