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판을 깔아주마 (3)
신우현은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을 보고 반가운 척 오묘한 눈길을 보내자 의아해졌다.
눈치를 보아하니 회장 지창태와 그룹 후계자인 장남은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제길, 또 나만 모르는 데서……!’
항상 그랬다.
정말 중요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룹의 의사결정을 회장과 후계자 둘이 의논하여 진행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열등감에 빠져 있는 신우현에게는 또 자신만 따돌린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거래라. 일단 듣지.”
“바쁘실 테니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선생님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십시오.”
“당연하다면 당연한 요구로군. 대가는?”
“제가 요청하면 90% 이상의 확률로 만나 줄 국세청 중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둘의 대화는 총수의 직계라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이미 서로의 목적과 입장을 아는데 굳이 주위 사람을 위해 상황 설명을 할 정도로 배려 있는 작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다리라도 놔주겠다는 건가, 그를 통해 정보를 받아 오겠다는 건가, 아니면 그를 포섭해 오겠다는 건가?”
“셋 다 불가능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만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요.”
셋 다 불가능하다는 말에 지켜보던 직계 가족들이 눈을 부릅떴다.
조만간 유리잔 하나가 더 날아가겠다 싶었는데 의외로 회장은 얌전했다.
“셋 다 불가능한데 만나는 것만으로 대가를 요구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라…… 국세청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면서 우리가 직접 접촉하는 건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거군.”
“사람은 누가 어느 상황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끌어낼 수 있는 정보가 다르죠. 지산에서 사람을 보내도 의미 있는 결과를 얻기는 힘들 겁니다. 제가 만나 봐야 해요.”
“흐음.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어필하고 거래에 써먹는 거, 나는 아주 좋아해. 하지만 유 실장도 잘 알고 있겠지? 나는 결과를 중시한다. 과정은 필요 없어. 유 실장이 들고 오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가격이 정해질 거야.”
“그거면 됐습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별 대단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둘 다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신우현은 이것이 하나의 확인 절차임을 알았다.
무언가를 팔기 전에 유진환은 그것이 값진 것임을 각인시키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목표는 달성한 것이다.
유진환이 회의실을 나가자마자 회장은 명령을 내렸다.
“유 실장에게 섭섭지 않게 챙겨 줘.”
“아버지, 아직 아무런 거래도 없었잖아요. 게다가 저놈이 가져올 게 뭔지도 모르는데.”
둘째 딸의 반박에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넌 회사 일을 그렇게 오래 하면서도 아직도 모르겠어? 언제 돈을 써야 하고, 언제 아껴야 하는지?”
“저런 놈은 널렸잖아요. 국회의원의 위세를 믿고 자기가 잘난 줄 아는…….”
“쯧, 내 딸이라는 것이 멍청하기는. 신우현, 네가 말해 봐라.”
기회가 왔다.
신우현은 방금 있었던 상황을 머리에 그리고 얼른 정리했다.
머리 회전과 학습만은 자랑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었다.
“방금 나간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말씀하신 바로 봐서는 국회의원의 손발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지산의 격을 생각해서 회장님께서 만날 정도면 웬만한 의원은 아닐 테고, 거래까지 걸어 왔으니 투자 가치가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청탁을 많이 받는 국회의원의 특성상 웬만한 금액으로는 성도 안 찰 테고요. 그렇다고 무작정 찔러주면 우리를 얕보게 됩니다. 그러니 서로 원하는 게 있는 지금, 지산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기에 좋다고 봅니다.”
신우현은 쉬지도 않고 단번에 추측에서 결론까지 끝냈다.
둘째 딸이 씩씩거리며 신우현을 바라보았지만 그뿐이었다.
회장은 흡족하게 끄덕였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놈은 허세를 부리고 간 거고, 나는 알면서도 그 허세를 받아준 거다. 저놈이 모시는 건 대권 주자 하동문이야. 이번 기회에 잘 들어라. 대통령이 누가 되든 상관없어. 여야 상관없이 돈을 뿌리고 공을 들여라. 어느 한쪽을 지지하다 반대쪽이 당선되면 곤란해지지만 양쪽 다 뿌리면 아무 문제 없어.”
“알겠습니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장남이 일어나려 하자 회장은 바로 제지했다.
“네 비서를 보낼 급이 아니다. 유진환 실장은 하동문 의원의 오른팔이야. 신 이사가 가거라.”
자신에게 일이 떨어지자 신우현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잽싸게 인사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둘째 딸이 분통을 터뜨렸다.
“왜 중요한 일을 부외자한테 맡기시는 건데요! 아버지!”
성질을 못 이기고 씩씩거리기 시작하는 둘째 딸에게 눈을 흘긴 회장이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했다.
재벌이라면 응당 자존심을 챙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둘째 딸은 안하무인으로 자랐다.
화를 내는 끓는점이 낮고 시도 때도 없이 물건을 부숴 먹었다.
심심하면 직원을 때려 입막음에 돈이 심심찮게 들어간다는 정보도 들려왔다.
물론 이런 것은 흠결이 아니다.
직원 또한 노동력이라는 자산인데, 주인인 둘째 딸이 어떻게 쓰든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이 일이 외부에 퍼졌을 때 이미지에 타격이 갈 것이 문제지.
이와 같은 이유로 일전에 한울 회장 앞에서 무례를 범한 신우현도 내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회사는 장남이 물려받을 것이니 다른 직계는 완벽하지 않은 게 좋았다.
방금만 해도 그렇다.
유진환이 신우현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 자리에서 단둘, 회장과 장남만이 눈치챘다.
대권 주자 하동문의 오른팔이라는 작자가 대기업의 사위를 과연 어떻게 써먹을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
“부회장, 과하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잘 지켜봐.”
“예, 회장님.”
지산의 위기를 타파할 카드가 될지, 멍청하게 이용만 당하고 돌아올지.
회장은 입맛을 다셨다.
***
지산은 공격적이고 광범위하게 움직였다.
지산의 사장단과 이사들이 총동원되어 각자 사람을 만나러 다녔다.
그동안 갈고닦은 인맥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국회의원부터 행정부 관료, 기자들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술자리가 생겼다 없어지길 반복했다.
그들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표시인지 만남에 초대된 사람들은 적어도 음료수 한 상자씩은 차에 싣고 돌아갔다.
그런 소문이 퍼지면서 지산의 초대를 기다리는 사람마저 생겼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 세무서가 부지를 팔고 새로 건물을 지어 이사하려고 하자 지산은 헌 부지를 비싼 값에 사들였다.
정부의 공사 입찰에는 최저가로 수주 계약을 맺었다.
또한 가난한 고학생일 시절부터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준 장학생들에게 연락했다.
그 장학생들은 현재 각종 국가고시를 통과하고 행정부와 사법부에 퍼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려울 때 받은 도움은 쉽게 잊지 못한다.
지산의 덕을 본 장학생들은 공무원이 되고 나서도 지산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했다.
지산이 알고 싶은 것은 딱 두 가지.
세무조사의 명령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리고 진짜 목적이 무엇인가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국세청에 있는 장학생들조차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국세청과 서울청, 중부청이 힘을 합칩니다. 명령은 국세청장님이 내리셨어요.”
“진짜 목적이요? 국세청장 자리를 두고 서바이벌하는 겁니다. 이긴 놈이 청장 자리를 먹는 조건으로요.”
사실 장학생들이 목적을 말하긴 했다.
하지만 정보를 취합한 전략실에서는 쉽사리 믿지 못했다.
청씩이나 되는 국가 기관이 아이돌 콘테스트도 아니고, 누가 대기업을 잘 치나 내기를 해서 수장을 뽑는다는 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많은 돈을 뿌리고 연을 동원해도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철저하고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결국 전략실은 이런 결과를 내놓았다.
-따로 명분을 마련할 정도로 대규모의 공세가 예상됨. 그룹 차원의 총력전이 필요함.
-이번 세무조사는 길들이기용 세무조사라는 설이 우세함.
-예상 목적으로는 첫째, 그룹의 후계 상속을 대비한 사전 조사. 둘째, 최근 공격적인 그룹 차원의 인수합병에 대한 견제. 셋째, 근 10년 간 법인세 납세액의 하락에 대한 조사 등이 있음.
전략실의 엘리트들은 상대의 행동은 항상 합리적이고 논리적일 거라는 가정을 깔고 있었다.
그래서 ‘청장 콘테스트’가 정말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전략실의 착각 속에서 지산의 대응은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거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기자들이었다.
처음엔 가끔 있는 대기업 세무조사로 생각하고 다루었다.
그러나 지산이 예상외로 전면전 수준으로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자 지금은 신문 1면에 뜰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었다.
***
“그래서, 실제 목적은 뭡니까?”
유진환은 갑작스레 내 앞에 찾아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묻는 걸 보니 기가 차서 웃음만 나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기브 앤 테이크. 신재현 팀장님도 뭔가 캐내고 싶은 게 있어서 나온 것 아닙니까?”
그의 말이 맞다.
1층 접수처에서 방문객이 있다며 전화가 왔을 때는, 이름을 듣고 미친놈이라고 욕했다.
하지만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날 찾아왔다는 건 지산 일에 끼어들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정보를 캐러 나가봐야 했다.
서울청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캔 커피를 사 들고, 골목에 선 나는 유진환에게 말했다.
“제가 좀 바쁘니 탐색전은 집어치웁시다. 저번에 많이 했잖아요.”
“그러시죠.”
유진환 역시 반가워하며 대답했다.
피차 바쁜 사람들이었다.
“왜 왔어요?”
“음, 맨입으로 가르쳐 드리기엔 아까우니까 이건 어때요? 질문 하나씩 묻고 답하기. 대신 진실만 말하는 겁니다.”
이놈이 어디서 영화를 많이 봤나 보다.
탐색전 집어치우랬더니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서로 정보 교환을 한다 쳐도 공격 측, 즉 국세청에 있는 내가 가진 정보가 더 많다.
어딜 어떻게 칠 건지, 사람은 몇이나 되는지만 알아도 방어 쪽은 효율이 상승하니까.
그래서 경멸의 눈빛을 숨기지 않으며 정면에 대고 답해주었다.
“아예 대화하기 싫어요? 정보전 이런 거 필요 없어요? 나 들어갑니다?”
“아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나갔네요. 장난인데 좀 받아 주시지.”
“허…….”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지난번 만남 때 살벌한 분위기로 헤어진 게 언젠데, 굉장히 친한 척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헛소리 들으며 시간 낭비 하느니 그냥 들어가서 조사 준비나 할까, 싶다가도 이것이 전략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로 발을 멈췄다.
내 갈등을 눈치챘는지 유진환이 기습적으로 물었다.
“언질이라도 해 주십시오, 팀장님. 왜 갑자기 지산을 때리는 겁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당연합니다. 목적을 알아야 원하는 것이 보이고, 그래야 비로소 협상 테이블에 누굴 끌어낼지도 결정할 수 있어요. 원하는 것을 쥐여 주고 그쪽이 만족하는 선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협상이죠.”
나는 유진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말로 명확해졌다.
유진환은 지산을 돕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유진환 뒤에 있는 그 권력자 역시 지산을 도울 것이다.
“협상을 일임 받았습니까?”
“음, 그건 아닌데요.”
그건 아니지만 다른 부탁은 있었다는 건가.
지산과 유진환이 연관점이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대화다.
유진환은 굳이 지산과의 연결점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지산 문제라면 다른 고위직을 찾아가야죠. 왜 저를 찾아옵니까?”
“팀장님도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하시잖습니까. 제 예상이지만 팀장님과의 대화에서 핵심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런 소식은 어디서 들으셨을까. 국세청에 연줄이라도 있나 봅니다.”
“떠본 거였는데 진짜입니까? 역시 팀장님도 지산 조사에 참가하시는군요?”
응? 떠본 거였어?
하지만 나는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아무렇지 않게 되받아쳤다.
“떠본 척하지 마시죠. 이미 제가 참가한다는 건 청의 모든 직원이 압니다. 누가 그쪽 사람인지 특정할 수도 없어요.”
“그럼 편하게 말할 수 있겠군요. 현장 조사 가시면…… 응? 뭡니까?”
진짜 내부에 정보제공자가 있는 거였구나.
내 얼굴을 본 유진환이 입을 막았다.
“방금 그거 역공한 겁니까?”
“누가 그쪽 사람인지 특정 못 한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니 큰 손해는 아닐 텐데요.”
유진환이 먼저 떠본 것이었고 나 역시 그걸 이용했으니 서로 한 방씩 주고받은 셈이다.
그러나 유진환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볼수록 탐나네.”
“혼잣말은 그만하시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유진환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목적을 알려 주시죠. 그럼 실적을 챙겨 드리겠습니다.”
긴 대화에 비해 매우 노골적이고 간단한 제안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지랄하지 마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