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판을 깔아주마(2)
“그럼 우리 청에서 조사할 대상과 조사 인원을 발표하겠다. 인원은 나중에 국장들에게 따로 공지할 거니까 대략적으로 들어. 그리고 다들 알겠지만 이 모든 내용은 외부 발설 금지다. 본청의 공식 발표 이외의 모든 라인은 입 닫아.”
서울청장은 그렇게 말하며 매서운 눈으로 강당을 훑었다.
이만큼 큰일을 벌이는 것이니 기밀 유지는 당연하다.
국세청 본청의 홍보과가 풀가동 될 것이니, 그 이외의 일명 ‘내부의 정보원’은 기자들에게 입도 뻥끗하지 말라는 뜻이다.
서울청장은 이미 모든 계획을 다 짜놓은 듯 거리낌 없이 인원을 발표했다.
지산 카드, 지산 물산 등의 큰 회사는 조사국 인원이 도맡았고, 특수조사 1팀 역시 지산 기획의 세무조사를 담당하기로 했다.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역시 특수조사 2팀의 존재였다.
“요즘 제일 잘 나가는데 당연히 주요 계열사 하나 맡기겠지?”
“여기서 딱 지산 반도체나 지산 건설 맡으면 대박이다.”
“와, 7급 주사보가 대기업 몸통을 맡는다고? 옛날 같으면 미쳤냐고 비웃었을 텐데 지금은 가능성이 있어서 놀랍다.”
직원들은 옆자리 동료와 작은 목소리로 본인의 예측을 피력했다.
대부분 신재현이 선봉에 설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그러나 서울청장은 뒤쪽에 앉은 신재현을 쳐다보더니 옅은 한숨과 함께 그의 담당을 발표했다.
“특수조사 2팀은 지산 엔지니어링을 맡는다. 이상.”
“어어?”
“방금 지산 엔지니어링이랬지?”
강당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산 엔지니어링.
가스나 원유 등을 뽑아내 가공하는 플랜트 건설을 주로 하는 회사다.
건설과 토목계열이니 어찌 보면 튼실한 우량사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속 빈 강정이다.
우리나라에는 웬만한 플랜트는 다 들어차 있으므로 제3세계의 수주를 따내는 걸 주 매출로 삼고 있기도 하다.
다른 그룹이 아프리카 등의 플랜트 사업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돈을 쓸어 담는 걸 보고 뒤늦게 뛰어든 산업이었다.
10년도 안 된 회사에 특출난 기술력이 있을 리 만무했고, 지산은 파격적인 수주 가격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플랜트 사업은 가격도 중요하지만 신뢰는 더더욱 중요하다.
싸게 따낸 수주를 성공시키면 회사가 반석에 오를 테고, 그때는 좀 더 크고 단가가 센 사업을 맡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대차게 말아먹었다.
필요해서 지산이 갖고는 있지만 큰 흑자는 내지 못하는 깡통, 그것이 지산 엔지니어링이었다.
“지산 건설이 아니고 엔지니어링?”
“뭐지? 이번엔 뒤로 빼돌리는 모양새인데.”
“상대가 너무 커서 그런 건가?”
“그런 걸 무서워할 놈은 아니잖아. 그리고 애초에 그런 이유면 권 팀장의 1팀을 뒤로 빼돌렸겠지. 자기 식구인데.”
“권 팀장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려는 거 아닙니까?”
“청장님 자존심에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하진 않아. 똑같은 조건으로 해 놓고 뒤에서 은근슬쩍 지원하겠지.”
“그럼 대체 뭘까요? 민치호 국장이 자기 사람 다치는 거 싫다고 빼달라고 했나?”
“그것도 가능성 있네. 아니면 신재현한테 너무 시선이 몰려 있으니까 잠깐 돌렸다가 다른 걸 칠 생각이던지.”
강당 곳곳에서 신재현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그 정도로 그의 거취에는 관심이 많았다.
서울청장의 짧은 발표가 끝나자 직원들이 빠른 발걸음으로 강당을 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진행 중인 조사 건은 서둘러 마무리 짓고 넘겨야 했으며, 세무조사의 준비도 해야 했다.
지산의 조사에 동원되든 안 되든, 바빠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신 팀장님, 잠시 저 좀 보실까요?”
강당을 나가려던 신재현을 불러세운 것은 권현아였다.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을 지은 신재현은 팀원들을 보내고 강당의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았다.
권현아는 벽에 기대어 선 채 팔짱을 끼고 따지듯 물었다.
“신재현 팀장님과 혹시 미리 얘기가 된 사항인가요?”
“지산 전수조사 말입니까?”
“신 팀장님이 지산 엔지니어링을 맡은 거요.”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신재현이 되묻자 권현아는 왠지 화난 얼굴을 했다.
“이상하잖아요. 같은 TF팀인데 하나는 지산 기획을 맡고 하나는 지산 엔지니어링을 맡는다는 게. 그 회사 상황 알아요?”
“대충만 압니다. 작년 영업손실 1천억에 달하고 주가는 한 2만 원 정도 하던가요? 지산의 계륵이죠.”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윗선이 개입해서 일부러 이렇게 배분했다는 생각밖엔 안 든다고요!”
정보 유출로 검찰에 넘어간 조사2국장 김상민 사건 이후로 권현아는 이런 판에 민감했다.
항상 비교되고 있는 특조 2팀과는 동등한 조건이어야 직성이 풀렸다.
조사국이 밀어줬던 때처럼 권현아의 실적은 만들어진 것이다, 라는 평가는 듣고 싶지 않았다.
“만약 다른 사정이 개입한 거라면 제가 청장님께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권현아는 결연했다.
청장의 명령에 순응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신재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사정이 개입한 건 맞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제가……!”
“권 팀장님의 배려는 감사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제가 원한 거예요. 민치호 국장님이 저를 위해 마련해 주신 무대입니다. 이번에는 선의의 경쟁이 끼어들 때가 아니거든요.”
“무슨 뜻이에요?”
권현아는 설명을 원하는 눈빛으로 채근했지만 신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복잡한 가족사, 부모가 죽어 나가든 말든 알 바 아니라며 무시했던 형에 대한 복수를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실적 세워서 오시면 됩니다. 전 엔지니어링 하나만 물어뜯으면 되니까요.”
신재현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큭큭대며 웃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때보다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권현아는 감히 사정을 묻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했다.
***
지산 그룹의 회의실에서는 오랜만에 총수 일가가 모였다.
각자 회장, 부회장, 사장 등의 직책을 가진 지씨 일가는 다른 임원들이 줄지어 배석한 자리에서 전략실의 보고를 들었다.
그룹의 관리를 도맡은 전략실의 실장은 짜깁기한 뉴스를 틀었다.
-속보입니다. 국세청이 2022년 대규모 세무조사를 예고했습니다. 대상은 지산 그룹으로, 지난 2005년에 지산 생명이 인수합병으로 인한 세무조사를 받은 이후 17년 만입니다. 국세청의 입장문에 따르면 이번 조사는 정기 세무조사일 뿐이며 지산에 어떤 구체적인 혐의가 포착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혔습니다. 다만 계열사 하나가 아니라 그룹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인 만큼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원래 정권이 바뀌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대기업이 인사를 보내요. 오해가 있으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뇌물을 줬다거나 청탁을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에요. 정부마다 국책사업이 있잖습니까? 일자리 10만 개 창출, 노조 협상, 발전소 건설, 군사용 부지 제공 등 여러 방법이 있어요. 다만 이번 정부는 딱히 특색이 없다 보니까 딱히 대기업도 뭔가를 한 적이 없단 말이에요. 이게 원인인가 싶기도 하고…….
-정기 세무조사라고 하는 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중소기업조차 세무조사 한 번쯤은 받고 넘어가요. 그런데 지산은 가장 최근에 받은 세무조사가 2005년입니다. 그때도 지산 생명 하나만 대상이었어요. 워낙에 큰 회사다 보니 미루고 미뤄왔지만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는 거죠.
-그룹이라고 묶어 부르니까 작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무려 21개의 크고 작은 계열사가 엮인 곳입니다. 하나만 조사해도 엄청난데 이걸 다 조사한다는 건 엄청난 전력이 투입되어야 가능해요. 가능성은 둘입니다. 하나는 지산이 무언가를 크게 잘못해서 본보기를 보이는 거거나, 또 하나는 국세청에 다른 속셈이 있거나.
몇 가지 뉴스가 흘러나오자 상석에 앉은 지산의 총수 지창태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한쪽 손을 들었다.
전략실장은 재빨리 영상을 멈췄다.
“지금 내가 이런 개소리나 듣자고 부른 줄 아나? 이 세상에 가장 공평하고 거래가 불가능한 자산이 바로 시간이야. 너는 내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고용한 거고.”
지창태 회장은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집어던질 것처럼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닌지 전략실장은 당황하지 않고 준비해 온 것을 읊었다.
“국세청 내부와 접촉하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지창태 회장이 어깨높이까지 손을 들어 올렸다.
실장의 말이 더욱 빨라졌다.
“다만 저희는 언제 어느 때 세무조사가 들어와도 상관없도록 항시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냐. 세무조사야 당연히 문제지만 네가 말한 것처럼 그런 거 대비하라고 있는 게 전략실이야. 그럼 그 이상의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 것 아냐!”
-콰장창!
결국 지창태 회장의 분노가 터졌다.
시원하게 날아간 물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중간에 앉은 부사장의 등 뒤에서 박살이 났다.
느닷없이 파편을 맞은 부사장은 떨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뜨고 필사적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여기서 움찔하는 순간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해 온 것 더 없어?”
순간 전략실장이 머뭇거렸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하고 왔어도 방금 머리에서 피가 튈 뻔했는데 바로 외운 것이 튀어나올 리 없었다.
그 3초의 순간을 회장은 놓치지 않았다.
“너한텐 이제 기회 없어.”
회장은 그가 입버릇처럼 기회를 많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실장은 옆에 서 있던 전략실 직원들에게 끌려 나갔다.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현 실장 또한 전임자의 실수로 그 자리에 앉은 것이니.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실장이 끌려나가기가 무섭게 중간에 앉은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이 자리에 앉지도 못할 실적을 가진 지산의 막내 사위, 신우현이었다.
그룹의 외교라 할 수 있는 사교 자리에서 두 번이나 실수한 덕에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필사적이었다.
회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우현은 얼른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나온 세무조사이니 원하는 게 있을 겁니다. 명령이 어느 선에서 나왔는지를 알아내서 협상을 시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언론을 다스려야 합니다. 지산이 무언가를 잘못했으니 국세청이 행동에 나선 거라는 기사는 눈에 보이지 않도록 치우고, 정부의 망종으로 몰고 가야 합니다. 광고를 끊어 버린다는 말이면 충분할 겁니다.”
“부회장, 방금 한 말 들었지?”
회장의 장남인 지재욱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국세청에 있는 저희 사람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내로 여야, 정부 기관, 다른 재벌가와 자리를 마련할 예정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시간이 급한데 저 혼자 그 많은 사람을 만나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비서실을 통해 어디서 누굴 만날지 알려주겠다는 뜻이다.
이미 대처가 진행되고 있자 회장은 만족한 얼굴을 했다.
“돈을 아끼지 마라. 지금이 쓰는 타이밍이야. 돈으로 사람과 미래를 산다고 생각해라. 우리가 가진 자산을 이용해. 자, 움직여!”
참새가 흩어지듯 사장단이 순식간에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회장의 눈앞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담긴 속도였다.
그리고 사장단과 교대하듯 한 남자가 회의실로 쑤욱 들어섰다.
“뭐야?”
그들만의 대화를 위해 남아 있던 직계 가족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면 총수 일가의 시간을 방해한 직원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그러나 회장과 장남은 남자의 얼굴을 보더니 얼굴을 부드럽게 풀었다.
외부인을 대할 때 짓는 대외용 미소였다.
“유 실장이 직접 왔군.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거래를 제안하러 왔지요.”
국회의원 하동문의 오른팔 유진환이 총수 일가를 훑더니 신우현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