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85화 (185/500)

185화. 판을 깔아주마 (1)

중부청장과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내 마음은 답답해졌다.

아주 짧은 1시간의 만남이었지만 불쾌함 뿐이었다.

나는 7급 세무 공무원답지 않게 의외로 높으신 분들과의 사적인 식사 자리를 가진 적이 많다.

보통은 탐색전으로 시작하며 점점 본론으로 들어가고 그 후엔 제안과 협상, 때로는 거래가 오간다.

때문에 나름대로 생긴 노하우가 있다.

쪼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담담하려고 노력하며 상대의 반응을 살펴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오늘도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중부청장의 상식은 나와 어긋났다.

정치질을 하다 보면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랬던 것인지.

방해된다는 이유만으로 권현아를 끌어내리려 했던 것뿐만이 아니다.

중부청장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라도 하려는 듯 그동안 자신이 묻어 버린 공무원들을 언급했다.

잘나가다 삐끗한 사람들과 그 이면의 이야기들.

서울권, 특히 강남권과 청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상, 실수 한 방에 지방으로 밀려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중부청장이 말하는 그 삐끗은 상황이 달랐다.

단순히 중부청장의 눈에 띄었기 때문에 밀려난 사람도 많았다.

본인의 실수 때문이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부하가 가야 할 자리에 누군가 있으면 그 사람을 치워서 빈자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조금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식사 내내 듣고 나오자 오히려 내 윗사람에게 묻고 싶어졌다.

정말 저 사람이 청장 후보인 거냐고.

저 사람의 어디서 수장의 자질을 보았냐고.

물론 오늘은 사적인 자리였고, 서로 센 척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내가 중부청장의 이면만 본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보고할 겸 이선균의 번호를 눌렀다가 지우고 민치호 국장의 번호를 눌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민치호는 벨이 한 번 울리자마자 받았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나서 물었다.

“국장님은 누굴 선택하실 생각입니까? 제가 모르는 중부청장님의 장점이 있습니까?”

내 질문이 고까울 만한데도 국장은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자기 사람이어도 실망을 끼치거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면 거리낌 없이 버리는 건 두 분이 똑같아. 하지만 서울청장님은 네가 겪어봤듯 외부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관료의 모습이다.

서울청장은 내가 옆에서 지켜봤으니 동의한다.

그러나 국장의 평은 끝나지 않았다.

-물밑에서는 한 발짝 빼려는 모습을 주로 보여. 대놓고 지시하는 게 아니라 부하를 불러 놓고 ‘그 친구 요즘 부진하군. 실수도 자주 하고.’라고 혼잣말을 하면 그 이야기를 들은 부하가 알아서 처리하는 식이야. 나중에 작업 친 사실이 밝혀져도 어디까지나 부하의 과한 충성으로 덮고 넘어가지. 자기 보신에 뛰어난 사람이야.

이건 내가 모르던 모습이다.

아니, 어찌 보면 낌새는 있었다.

권현아와 나를 불러 놓고 명확한 지시가 아니라 은근히 돌려 말하듯 표현한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그저 내가 힌트만 듣고도 제대로 중점을 파악하는지 시험하려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중부청장님은 결단력 있고 과감하시다. 자기 사람은 끔찍이 아껴서 아주 잘해 주시고.

“제가 본 중부청장님은 좀 달랐습니다.”

-그게 좀 문제야. 중부청장님은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소시오패스에 가깝거든.

“……예?”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중부청장이 보인 모습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왜 다른 누구도 아닌 권현아를 쳐내자고 제안했는지.

내가 거절하자 왜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봤는지.

그에게 있어서는 방해꾼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내가 어리석어 보였을 것이다.

-진단을 받거나 청장님 스스로 말하고 다닌 건 아냐. 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겉으로 보기에 능력 있고 부하를 잘 다루시니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뿐이지.

“그럼 더 위험한 것 아닙니까?”

-아니, 행동원리만 알면 다루기 쉬워.

그렇다기엔 너무 찜찜했다.

죄없이 갈려 나간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하지만 물밑에서 싸우는 건 어디까지나 민치호다.

내가 그의 판단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오랜 시간 둘과 싸워 본 민치호를 믿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감추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민치호가 다급히 물었다.

-아니, 아직 끊지 말고. 그래서 신 팀장 생각은 어때?

“제 의견 말씀이십니까?”

나는 살짝 당황했다.

서울청장 밑에서 일한 것도 반년 정도밖에 안 됐고, 중부청장은 겨우 한 시간 봤다.

그런 내 의견을 물어봐 주는 건 고맙지만 쉽사리 대답하기 어렵기도 했다.

그런 걱정을 눈치챘는지 민치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의 근엄한 얼굴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느낀 대로만 말하면 돼. 어떻게 보면 신 팀장은 편견 없는 상태에서 만난 거니까.

“저는 서울청장님의 이면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중부청장님의 겉모습을 모릅니다. 그런 상황을 감안하고 들어주십시오.”

-그러지.

“……중부청장님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분이 제한 없이 힘을 휘두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군.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민치호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움이 많이 됐어. 나도 결정을 내렸으니.

“제 의견으로 결정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두 분을 깊게 알지 못해요.”

-신 팀장은 의외로 사람 보는 눈이 예리하더군. 신 팀장이 그렇게 느꼈다면 거의 정확할 거야.

“하지만, 국장님.”

-걱정 마. 나도 오랜 세월 두 분을 봐 왔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여러 조언도 들었고, 최종 결정은 내가 내린 거야. 조언 고맙네.

물론 내 말만으로 결정하진 않았겠지만 국장의 말에서 부담을 덜어주려는 배려를 느꼈다.

-그리고 나중을 위해서 내가 물밑에서 수작을 좀 부려볼까 하는데.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민치호 역시 높으신 분이다.

더러운 수 없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중부청장처럼 도를 넘고 날뛰느냐 최소한의 명분은 지키느냐의 차이겠지.

그러니 굳이 내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한다.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몇 가지 미리 양해를 구할까 해서 말이야. 언젠가는 지산 칠 거지?

“네. 하지만 중부청장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남에게 맡길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직접 할 거예요.”

현 경제수석인 임현승도 예전에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언젠가 본인의 힘으로 무릎 꿇리라고.

-지금 해버리자. 내가 판을 깔아주마.

“……국장님. 상대는 지산입니다.”

-지산과 전면전 할 생각은 없어. 국세청을 총동원하면 사위 하나는 잡을 수 있다.

“괜히 가만히 있는 대기업을 치는 것 같지는 않고, 뭘 얻으시려는 겁니까?”

내 질문에 민치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하나가 수장에 앉으면 남은 사람은 그 밑으로 들어가야 하는 법이지. 그런데 둘 중 누구도 절대 승복할 성격이 아니거든. 국세청에 피바람 불게 할 순 없으니 외부를 쳐서 시선을 끌어볼까 하고. 어때? 할 생각 있나?

나는 전화를 붙잡고 길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말이야 쉽지, 대기업 하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게 간단할 리가 없다.

어쩌면 지금 이상으로 피바람이 부는 게 아닐까.

민치호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닐까.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도 남을 시간 동안 민치호는 조용히 나를 기다려 주었다.

“……최선이라고 생각하세요?”

-현 상황에서는 그래. 그 청장님은 세력을 온존한 채로 놔두면 국세청을 부수고도 남을 분이니까.

민치호의 말을 듣는 순간 그가 누굴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본 그 사람이라면 국세청 피바람이라는 말이 정말 가능할 것이라는 것도.

“다른 직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가능할까요?”

-나는 신 팀장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지. 아무런 손실 없이 쳐내긴 힘들 거야. 하지만 내 모든 것을 다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지.

“그럼 국장님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먼저 판을 깔 거야. 하던 대로 일하고 있으면 돼. 판 깔리면 자동으로 알게 될 테니 걱정 말고.

민치호의 목소리에 흥분이 섞였다.

어찌 보면 그도 이런 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

계획을 짜고 자신의 주도하에 국면을 흔드는 것.

기대감 어린 목소리를 들어 보니 내가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민치호가 말한 판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삼 일 후였다.

도저히 모를 수 없는 일이었다.

온 국세청이 긴장으로 바싹 얼어 있을 정도니.

“팀장님, 지금 서울청 분위기 장난 아니에요.”

조사국에 자료를 맡기고 온 팀원들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요즘 조사국과 친분도 쌓을 겸 여럿이 놀러 가서 과자도 나눠 먹고 오곤 했는데, 이제는 소문도 이야기할 정도로 친해졌나 보다.

“어떤 얘기던가요?”

“지금 국세청장님이 임기 끝나기 전에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벼르고 있대요.”

직감적으로 이것이 민치호의 작업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3일밖에 안 된 시점에서 소문이 이렇게 퍼졌다는 것은 아예 작정하고 퍼뜨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에 국세청의 힘을 보여줄 목적으로 좀 큰 곳을 칠 텐데, 그때 실적에 따라서 차기 국세청장을 내정하실 건가 봐요.”

“진짜 딱 실력 위주로 뽑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냐? 누가 국세청장 자리에 어울리는지 보여주겠다는 거잖아. 이 업계는 실력으로 압살하면 아무도 말 못 하지.”

우리의 수장이 결정되는 일이다.

팀원들은 잔뜩 흥분해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 처음이야, 새로워! 청장님이 아주 큰 결심을 하신 거라고.”

“그렇죠! 보통 마음에 둔 후임을 지정하고 가시는데! 국세청이 흔들리지 않길 바라는 배려가 느껴지지 않아요?”

어찌 보면 국세청 최대의 이벤트일 수도 있는 사건이다.

거기다 윗분들이 대놓고 무대를 만드는 게 보이는 상황이니 팀원들의 흥분도 이해는 갔다.

“어딜 칠 생각일까요? 자격 증명 같은 거니까 좀 큰 걸 손대지 않을까요?”

“조세 피난처, 돈세탁, 국외 은닉자산, 비자금…… 찾아보면 많지.”

“어디든 재밌겠네요. 배울 것도 많겠어요.”

“원래 강 건너 불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이지. 청장끼리의 진검 승부! 키야, 기대된다.”

강 건너 불구경일 것 같진 않은데.

하지만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진 비밀이다.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바빠질 팀원의 미래가 보였다.

“어! 메신저 왔어요. 전원 강당으로 모이래요.”

“진짜 시작인가 보다.”

공지에 따라 우리 팀은 사무실을 나섰다.

옆 사무실에서도 1팀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복도는 금방 정장 차림의 공무원들로 북적거렸다.

긴장과 흥분으로 이런저런 잡담이 오가는 무리와 함께 강당으로 내려가자 그 넓은 강당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다 모을 정도면 차기 청장에 대한 발표가 맞겠죠?”

“지휘를 청장님이 잡으신다면 서울청과 중부청의 대결 구도가 되겠네요. 그럼 서울청 소속인 우리는 자동으로 서울청장님 지시를 듣는 거겠죠?”

사방에서 이런저런 추측이 오가고 있었다.

“왔다!”

한 직원의 외침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모인 강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서울청장 오낙현이 거친 발걸음으로 연단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직원들이 적잖이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평소의 무표정했던 청장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인 모습이다.

“모두 모였군. 오늘 아침 있었던 국세청장님의 방침을 전달하겠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서론은 없었다.

서울청장의 강렬한 눈빛이 강당을 훑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처음 보는 열기가 그 눈빛에 담겨 있었다.

“국세청 본청의 주도하에, 우리 서울청과 중부청은 지산의 세무조사에 나선다.”

올 것이 왔다.

더군다나 대기업인 지산이라면 국세청에게 부족함이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조사 건도 있으니, 이 프로젝트는 각국의 인원 중 3분의 1만 차출하여 진행한다.”

대기업 하나를 전수조사하기엔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었으나, 기업 조사의 명수인 본청에 중부청까지 함께한다.

다 합치면 충분할 것이다.

“세무조사 통지서를 보낸 후 조사 첫날 현장조사를 진행할 거다. 총지휘는 내가 직접 잡을 거고, 우리 서울청이 조사할 대상은 지산 엔지니어링을 포함한 6개 회사다.”

지산 엔지니어링이라는 말을 듣자 마자 주먹을 꽉 쥐었다.

바로 신우현이 이사로 있는 그 회사다.

-판 깔리면 자동으로 알게 될 테니 걱정 말고.

네, 정말 대놓고 깔아주시는군요.

민치호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