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원치 않는 선물 (5)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러 후보를 생각해 봤는데 역시 권 팀장이 제일 적절해. 건드리기도 쉽고.”
이게 바로 물밑에서 싸워오던 사람의 사고방식인가.
사람 하나를 치운다는 얘기를 굉장히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권현아 팀장에게 문제 있습니까?”
“경고와 과시의 의미도 되지.”
무언가 이야기가 자꾸 겉도는 느낌이다.
분명히 같은 주제로 얘기하고 있는데 서로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고심하다가 물었다.
“저, 청장님. 제가 지금 잘 이해가 안 가서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권현아 팀장을 왜 치우겠다는 겁니까?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아, 그게 문제인가?”
청장 역시 뭔가 어긋난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눈빛이다.
“신 팀장, 올해 나이가 몇이지?”
“스물여덟입니다.”
“아, 생각보다 젊었군. 그래서 그런가.”
“명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권현아 팀장은 서울청장이 공들여 키우는 사람이야. 자네와 비슷한 위치지. 그래서인지 자꾸만 권 팀장과 자네를 비교하려 드니 눈엣가시 아닌가? 난 오낙현에게 흠집을 내고, 자네는 귀찮은 경쟁자를 치우고. 우리 둘의 목적은 일치하는 것 같은데 어떤가. 대상으로 딱 좋지 않나?”
혹시나 했는데 내 짐작이 맞았다.
권현아가 큰 잘못을 했다거나 방해되어서가 아니었다.
서울청장의 사람 하나를 조지고 싶은데, 그중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서울청에 있는 사람입니다. 손쓰기 쉽지 않을 텐데요.”
“어렵진 않지. 그걸 위해서 이미 밑작업도 깔아 놨고.”
“벌써요?”
“신 팀장에게 준 서류, 권 팀장을 통해 전달되지 않았나? 만약 그 서류에 있어선 안 될 것이 있었다면 어떻겠나? 외부로 유출해선 안 되는 종류의 것이나, 잘못된 정보가 있었다면?”
그래서 일부러 권현아를 통해 전달한 것이었나.
별 시답잖은 술수를 다 쓰고 있다.
“권 팀장은 전달만 했을 뿐입니다. 처음 자료를 준 사람을 찾으면 되죠. 권 팀장이 순순히 뒤집어쓰겠습니까?”
“물론 진흙 한 덩이로는 부족하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얼룩은 생겨. 그런 흙덩이를 두 번, 세 번 던진다면 어떨까. 나는 기꺼이 해줄 수 있는데.”
원래 물밑에서 싸우는 것은 다 이런 식인가?
민치호 국장은 항상 이런 술수와 싸우고 있었을까?
내가 탐탁지 않은 심정으로 빤히 바라보자 청장이 입꼬리를 당겼다.
“거절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설마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솔직한 심경으로는 역겨웠다.
당당하게 경쟁하면 되는 것을 굳이 왜 더럽게 군단 말인가.
그런 방식으로 이긴다 해도 달갑지 않다.
오히려 내가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청장의 태도에서 이 문제를 감정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장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니, 가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봐야 했다.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권현아 팀장님을 그런 식으로 내치기에는 아깝습니다. 그런 인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아요.”
“유능한 건 사실이지만 내 사람이 아니잖나. 남의 떡은 아무리 커도 남의 것이야.”
“서울청 또한 국세청의 산하기관입니다. 국세청장이 되시겠다는 분이 국세청의 살을 떼어서 어쩌려는 겁니까.”
“추후에 내가 국세청장이 되면 권 팀장이 가만히 있을까? 분명 오낙현을 도와 날 공격할 텐데.”
“희생은 최소한으로 해야 합니다. 흘리는 피가 많을수록 임기는 짧아지게 되실 텐데요.”
내가 임기를 들먹이자 그제야 청장이 고민하는 기색을 띠었다.
“그리고 제가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리다고 놀리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전 권 팀장을 실력으로 이길 거고, 그럴 자신도 있습니다. 또한 청장님께서 국세청의 수장이 되고 싶으시다면, 포용하는 모습 또한 제게 보여 주세요.”
내 강한 어조에 청장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논리라면야 내가 한발 물러서 주지. 어디까지나 신 팀장의 호감을 얻기 위해 이 복잡한 짓을 한 거니까.”
납득한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말해 봐. 뭘 하면 날 지지하겠나?”
이젠 뭐라 말하기도 무섭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청장은 혼자 생각하더니 무언가를 떠올려냈다.
“아, 그래. 그게 좋겠군. 신 팀장의 형, 신우현이 지산 그룹의 회장에게서 버림받게 해 주지.”
신우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름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고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알고서 말하는 거라면 아주 제대로 짚었다.
물론 내 뒷조사를 하고 언급하는 거겠지만.
“신 팀장이 형을 싫어한다며.”
“멀리 계시는 청장님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꽤 많이 퍼진 모양이군요.”
“신 팀장이 화제에 오른 후로 기자들이 필수적으로 조사한 게 가족관계야. 지금은 민 국장과 국세청장님이 억지로 눌러 놔서 닥치고 있지만, 입방아 오르기 딱 좋은 관계 아닌가? 기업에게서 저승사자라 불리는 공무원과 재벌가 사위로 들어간 형. 드라마를 써도 되겠어.”
청장은 진심으로 재밌어 보였다.
그의 표정과는 반대로 나는 이를 악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신우현이라는 존재는 내게 있어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눈에 보이면 패고 싶고, 이름만 들어도 화가 치솟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신우현은 분명히 조질 것이다.
그러나 남의 손을 빌릴 생각은 없었다.
이건 가족 간의 일이었고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어떻게 보면 가족의 치부인데 남에게 그 처단을 맡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 마십시오.”
“단호하군.”
“예. 신우현은 제가 조질 겁니다. 제 손으로 직접.”
다소 말이 거칠게 나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신우현이 나갈 때를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지니까.
내가 당장 신우현을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이유는, 철저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좀 더 납작 엎드려서 힘을 키우고 단번에 물어뜯고 싶었다.
신우현은 지금 그런 위치에 있으니까.
“그것도 재밌겠군.”
내가 화가 난 상태라서일까.
진심으로 웃는 청장의 모습이 거슬렸다.
아까부터 무언가 자꾸만 어긋나고 있었다.
“좋아. 그럼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 신 팀장과는 쭉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으니까.”
나는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도수 높은 술이 뱃속에 들어가자 단숨에 열이 확 올랐다.
이것이 청장 때문인지, 신우현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
세종시 국세청 조사국장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민치호는 퇴근하지 못한 채 책상 앞에 앉아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한동안 미동도 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민치호의 상념을 깨듯 누군가가 국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또독똑똑!
노크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 있는 특색 있는 리듬이었다.
민치호는 피식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오세요. 허 국장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자산과세국의 국장인 허송미였다.
어깨 위에서 짧게 쳐낸 단발머리는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으며 동그란 안경을 꼈다.
국세청의 흔치 않은 여성 국장인 허송미는 활짝 웃으며 들어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히야, 민 국장님 아직도 퇴근 안 하고 뭐 하세요?”
“그러는 허 국장님은요?”
“요즘 상속세 큼지막한 거 하나 들어와서 상속증여세과 야근하거든요. 애들이 야근하는데 제가 퇴근할 수 있나요.”
보통은 상사가 야근하면 직원들은 가시방석이다.
그러나 허송미의 경우엔 달랐다.
자기 휘하의 직원들 이름과 가족 사정을 다 외울 정도로 부하를 지극히 챙기는 사람이었다.
직원들만 일하라고 내버려 두고 퇴근할 성격이 아니었다.
“애들 간식 좀 넣어주고 지나가다 불 켜져 있길래 와 봤네요. 요즘 조사국에 무슨 일 있나요? 분위기는 조용하던데.”
“조사국에는 큰일이 없습니다. 일이 있다면 우리 국세청이 큰일이죠.”
“아, 차기 국세청장이요?”
민치호에게 선택권이 넘어갔다는 사실을 모르는 국세청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허송미는 민치호가 청장들 앞에서 딜을 걸 때 그것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요. 둘 다 청장 자리까지 왔으면 자격은 다 있는 거예요. 눈 딱 감고 맘에 드는 사람 골라버려요. 전국에 있는 우리 식구들은 다 따를 테니까.”
허송미의 가벼운 말투에 민치호가 허허 웃었다.
“올해 국정감사가 오기 전에 청문회 끝나고 국세청장님이 자리 잡게 하고 싶습니다.”
“그럼 이번 달 안에는 결정을 해야겠네요. 어차피 민 국장님이 갈 자리도 아닌데 차기 청장님 너무 배려하는 것 아니에요?”
“앞으로 상관으로 모실 분인데 편하게 해드려야죠.”
“민 국장님이 이렇게 한다고 고마워할 사람들이 아니에요. 특히 중부청장님은.”
중부청장에 대한 말이 나오자 민치호는 쓰게 웃었다.
“그분은 성격만 좀 고치면 될 것 같은데…….”
“중부청장 그 양반이요? 절대 못 고쳐요.”
허송미는 중부청장을 떠올리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울청장도 오랜 세월 정치질을 해온 만큼 물밑에서 암약하는 것은 수준급이다.
단적인 예로, 신재현이 세무서에 있을 때 직속 부하인 감사관을 통해 신재현을 끝장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중부청장의 음습함은 차원을 달리 했다.
윗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정치는 할 줄 알아야 하지만 중부청장은 방법이 달랐다.
세무서마다 정보원이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웬만한 정보는 다 알고 있었다.
눈에 든 사람이 있으면 그의 뒷조사를 통해 회유하거나 약점을 쥐고 흔들었다.
허송미 역시 국장이 되기 전 당해본 적이 있었다.
국세청의 요직인 자산과세국장에 허송미가 앉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지방대 출신인 허송미가 국장 자리에 앉으면 국세청의 품위가 손상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이야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겉으로는 별말 안 하는데 마주치면 눈빛이 다르다니까요.”
“걱정이네요…… 서울청장님은 잘못이 있어도 은근슬쩍 덮으려는 경향이 있으시고.”
“저번에 있었던 정보유출 건 말이군요. 그야 그 정도 자리에 앉으면 보신에 신경 쓰게 되어 있어요. 국세청장 자리가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데 어떻게 자기 사람이 사고 쳤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겠어요?”
이야기는 도로 원점으로 돌아왔다.
민치호가 끙끙거리자 허송미가 손뼉을 짝 쳤다.
“그러지 말고, 신재현 팀장에게 물어봐요. 내가 직접 보니까 눈빛이 맑고 흑백이 또렷한 게 사람 보는 눈도 꽤 괜찮을 것 같던데.”
“그 친구가 꾸린 팀을 보면 말씀하신 대로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중부청장님을 본 적이 없어요.”
“계속 서울청에만 있었나? 국세청에 온 적 없어요?”
“7급에 팀장이에요. 아직은 오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안 그래도 주목받는 친구인데 쓸데없이 이목을 끌 필요는 없지요.”
“어휴, 애지중지하시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허송미는 기분이 좋은 듯 깔깔 웃었다.
“그래도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요. 지금의 서울청장님 직속으로 보고 듣고 느낀 게 있을 테니까요.”
“……그것도 그렇군요. 오낙현 청장님과 함께 일한 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니.”
민치호가 한결 가벼운 표정이 되자 허송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민 국장님 그만 방해하고 상증과 애들이나 보러 갑니다.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다시 혼자 남은 민치호가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이왕 물어보기로 결정한 것, 이선균에게도 의견을 듣기로 마음을 굳혔다.
늦은 시간이니 내일 할까 망설이고 있던 차에 민치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액정에 떠오른 신재현의 이름을 보고 민치호는 깜짝 놀랐다.
이 시간에, 이선균도 아닌 신재현이 먼저 전화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각한 일이겠다 싶어 얼른 전화를 받자 잔뜩 억누른 신재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국장님. 방금 중부청장님과 만났습니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린가.
온갖 당황스러운 사건을 겪어본 민치호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뭐라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권현아 팀장을 잘라내자고 말하더군요. 서울청장님의 왼팔 말입니다.
이 양반이 사고를 쳤군.
민치호는 골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다.
서울청장과 중부청장 둘 다를 겪어본 신재현의 속내를 지금 들어보고 싶었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 수도 있다.
국세청의 수장을 정하는 일에 7급 직원의 의견을 듣다니.
하지만 민치호에게 있어서 신재현은 단순한 부하 직원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자세하게 말해 봐. 처음부터 끝까지.”
민치호는 진지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