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원치 않는 선물 (3)
다급하게 달려온 사장은 신재현 앞에 다다르자 이사와 합의한 것을 떠올렸다.
연구실을 돌다가 우렁찬 목소리를 듣고 내려오기까지, 둘의 합의는 이랬다.
-확실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이 자리만 잘 모면하자.
사장은 얼른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하도 소리쳐대니 급한 대로 입을 막을 셈으로 달려왔을 뿐이다.
사장은 절대 쉽게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조사관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장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위압적으로 말했다.
어떻게든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온몸에서 무럭무럭 피어났다.
“조사관님이 요즘 타율이 좋은 건 알고 있습니다. 화제도 많이 되시던데요. 지금 그거 믿고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구시는 겁니까?”
신재현은 말없이 사장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사장은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신재현을 내려다보듯 했다.
“이해합니다. 그동안 장관도 건드려 보고, 국회의원도 건드려 봤으니 슬슬 대기업도 손대보고 싶겠죠. 근데 그거 아십니까? 대기업은 그동안 상대한 사람들과 차원이 달라요.”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는 것은 돈이다.
권력 또한 돈에서 나온다.
지산이라는 거대한 그룹 안에 있어 본 사장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돈 있는 자들이 얼마나 악랄한지, 법은 얼마나 무의미한지.
지금은 국민의 힘을 믿고 날뛰는 눈앞의 공무원이 하룻강아지처럼 보였다.
“조사관님, 후회하실 겁니다. 그냥 하던 대로 어쭙잖은 놈들이나 치세요.”
사장은 비웃음을 띄웠다.
가만히 듣고 있던 신재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다들 이렇게 똑같은 말만 하시는지. 사장님을 보니 더더욱 제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위에서 오냐오냐해 주니까 진짜 뭐라도 된 것 같습니까? 현실을 직시하세요.”
“……오기 전에 주식 게시판을 봤어요. 지산 바이오 투자한 사람들이 글을 썼더라구요.”
“갑자기 말은 왜 돌립니까? 이제 와서 겁먹었어요?”
신재현은 대본이라도 읽듯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전세금 잃었다는 사람, 결혼 자금을 잃었다는 사람, 퇴직금을 꼬라박았다는 사람. 굉장히 많더군요. 어떤 글엔 추모하는 댓글도 달려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달려온 이유입니다.”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원래 사회는 정보 불균형이에요. 누가 주식 사랬어요? 잃은 놈이 바보지. 그리고 원래 주식은 벌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겁니다.”
“정보 불균형? 이건 애초에 잃기로 계획된 판이었습니다. 공정한 거래가 아닌데 어떻게 저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습니까?”
신재현이 따졌지만 사장은 낯빛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건데? 하는 얼굴로 비릿하게 웃었다.
“아까부터 이해가 안 되는 얘기만 하시네. 그래서 우리가 주가 조작 했다는 증거 있어요? 있냐고요.”
“피해자들 앞에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시체와 피눈물 위에서 주가 조작 안 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시체? 피눈물? 지랄 말라고 해요. 그런 건 다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지.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우리는 떳떳합니다. 주가 조작은 없었어요!”
사장의 말에 신재현이 잠시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도,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도 보였다.
신재현이 이내 눈을 떴을 때, 아까 보았던 흥분과 분노보다는 차가운 살기가 감돌았다.
무의식적으로 사장이 주춤할 정도였다.
“그렇군요. 어차피 저희는 주가 조작이고 뭐고 밝힐 권한이 없습니다. 지산 바이오에 탈세 혐의가 꽤 보이더군요. 오늘은 탈세에 관한 것만 조사하고 돌아가 드리겠습니다.”
사장은 대놓고 안도의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고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이었다.
“공무원의 한계를 여실히 깨달으셨나? 아니면 알고서도 온 건가?”
사장 입장에서는 이 정도면 성공적인 방어였다.
세금이야 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주가 조작이 들키면 징역에 회사가 풍비박산 날 수도 있다.
이미 윗분들의 돈이 꽤 들어갔으니 욕은 먹겠지만, 아예 회사가 박살 나는 것보단 나았다.
그러나 신재현은 패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사장을 노려보았다.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닌데요. 제가 이 모든 걸 알고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응?”
신재현이 한 발짝 다가오더니 남들에게 잘 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선가에서 원한을 많이도 사셨나 봅니다. 제 손에 뭐가 있는지 알면 이렇게 못 나오실 텐데.”
사장은 흠칫하며 신재현을 쳐다보았다.
허세인가, 진짜인가.
그러나 아무리 뜯어봐도 사장의 눈에 저 자신감은 진짜처럼 보였다.
“뭘 갖고 있는 겁니까.”
신재현은 아침에 받은 또 한 장의 서류 봉투를 떠올렸다.
지산 바이오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것처럼 비교적 정확하게 정리된 증거가 들어있었다.
“사장님, 회계 부정도 있으시죠? 오늘 제 역할 그겁니다. 세무조사와 회계 부정 조사. 그게 끝이 아닙니다. 제가 손대지 못하는 부분은 다른 기관이 해줄 거예요. 내일은 금감원이 나올 거고, 모레는 검찰이 나오겠죠. 제가 국세청 공무원이라고 안심하지 마세요. 국가 기관이 국세청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 당신이 뭔데 금감원을 들먹이고 검찰을 들먹입니까?”
“공무원의 한계를 말씀하셨죠? 그야 제게는 한계가 있죠.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럴 때는 남의 힘을 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요.”
“다른 기관까지 총동원 하겠다고? 당신이?”
“제가 아닌 제 뒤에 있는 분이 하실 겁니다.”
믿을까 말까 흔들리는 사장에게 신재현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힘자랑은 사장님 같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저도 이용할 땐 이용해요.”
설마, 하는 사장을 지나쳐가며 신재현이 웃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장은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들키지 않고 잘 넘어왔다지만 마음먹고 조사하기 시작하면 분명 잡힌다.
지산 바이오는 끝날 것이다.
지산 본사는 이런 실험적인 자그마한 계열사 하나를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지 않을 테고.
그제야 사장의 눈앞에 자신이 버림받고 몰락하는 미래가 보였다.
***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손으로는 일을 하면서도 수시로 시선이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잠시 핸드폰을 봤다가 책상 위의 전화기를 봤다가 사무실 문을 봤다가.
도저히 일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팀장님 신경 쓰이는 거 있으세요?”
오죽하면 강혜원이 먼저 물어볼 정도였다.
“슬슬 접촉이 들어올 때가 되지 않았나 해서요.”
“누구요? 아, 제보자요?”
“네.”
제보자인지 다른 속셈이 있는지.
이쯤이면 내가 지산 바이오에 가서 들쑤셨다는 소식을 이미 들었을 텐데.
물론 신중한 성격이라면 며칠 더 두고 보다 접촉하겠지만 모든 일엔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내 관심이 최고조에 이른 지금이 접촉하기 최고의 시점이고.
“저는 지산 바이오 내부 고발자라는 데 한 표 겁니다.”
“내기 시작하는 거야?”
전산 자료를 열어보던 팀원들이 심심풀이로 한 마디씩 던졌다.
비록 주가 조작은 우리 업무가 아니라지만 엄연히 큰 범죄였다.
팀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당연했다.
“음, 저는 기자에 한 표요. 기자니까 듣고 본 일이 많을 거 아니에요.”
“그럼 본인이 터뜨리지 왜?”
“자기가 터뜨리면 묻힐 거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무서웠겠지.”
“그런 의도면 굳이 기자가 아니어도 되지 않아요? 어렵게 돌리지 말고 쉽게 생각해 봐요. 눈에 불을 켜고 지산 바이오를 조사할 만한 사람이 누구죠? 지산 바이오 주가 조작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죠. 주식이 떡락해서 돈을 날렸는데 이유가 뭘까, 하고 조사해보니 이상해서 주가 조작에 대해 알게 된 거죠!”
“그래서 피해자가 직접 조사한 자료를 우리 팀에 토스했다고?”
“가능성 있지 않아요? 개인의 힘으로 지산과 싸우기에는 힘드니까.”
“내 생각엔 전문직이야. 음, 회계사나 세무사인 거지. 비밀유지 의무가 있으니까 어디다 말은 못 하고 익명으로 던진 거야.”
“공익을 위한 제보나 불법적인 행위에는 비밀유지 의무 해당 안 되는데요?”
“아무리 비밀유지 해제된다고 해도 의뢰인의 비밀을 떠벌린 전문직을 어느 업계에서 받아주겠냐?”
“그럼 접촉 안 할 수도 있겠네요.”
팀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추측을 늘어놓다가 막히자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내 생각이라.
나는 서류를 받았을 때부터 느낀 바를 말했다.
“내부 고발자는 아닙니다. 이번 건은 탈세가 주가 아니에요. 탈세도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주가 조작이 문제였죠. 우리에게 제보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팀장님을 믿어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요. 팀장님은 누구든 쥐어 패기로 정평이 나 있으니까.”
“그렇다기엔 너무 비밀스럽게 움직였어요. 지산 바이오의 부정을 밝히겠다는 목적이 느껴지질 않았습니다.”
정말 지산 바이오를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나뿐만 아니라 금감원, 검찰, 기자 등 보낼 수 있는 모든 곳에 보냈을 것이다.
이슈화시키고 일을 키워서 어딘가에서 묻혀 버리지 않도록 사방팔방 모든 곳에 뿌렸을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했다.
“그리고 한 번에 모든 자료를 보낸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보냈죠.”
“추가로 알아낸 걸 정리해서 보낸 게 아닐까요?”
“겨우 반나절 차이입니다. 반나절 안에 알아낼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거니와 시간차로 보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꺼번에 보내면 되는데요.”
“기자는요?”
“기자도 아니에요. 그쪽 업계에서 저와 접촉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나학진 기자라는 건 이미 소문이 나 있습니다. 제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서울청에 와서 남에게 소중한 자료를 맡기느니 차라리 확실하게 나학진 기자에게 전달을 부탁했을 겁니다.”
팀원들이 혼돈에 빠졌다.
“그럼 팀장님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여기서부터는 제 추측입니다.”
“넵.”
팀원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내게 주목했다.
“타이밍 좋게 제게 자료를 보냈을 때는 지산의 적일 가능성과 제게 호의를 가졌을 가능성을 둘 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두 번째 자료가 도착했을 때 절 시험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험이요?”
“네. 굳이 시간을 두고 더 자세한 자료를 보냈을 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너는 주가 조작에 도달했나?’ 제가 도달했다면 두 번째로 온 자료는 제가 원하는 자료가 될 것이고, 만약 도달하지 못했다면 자신의 유능함을 알릴 기회가 됩니다. 어느 쪽이든 제게 도움이 되죠.”
주가 조작의 자료를 본 순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료를 보낸 사람은 대단하다.
내가 필요한 타이밍에 필요한 것을 보냈으며 내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내 손에 든 서류가 잘 손질된 재료처럼 보였다.
자, 어디 한번 이걸로 마음껏 요리해 봐라.
그런 호의마저 느껴졌다.
“그러니 곧 접촉할 겁니다.”
내가 확신을 담아 말하자 팀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잡담을 나누며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하던 일로 시선을 옮겼지만 여전히 집중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누군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주의를 끌려는 목적이면 대성공이다.
차라리 빨리 접촉하고 본론을 말해줬으면 싶었다.
-뚜르르.
“전화요! 전화!”
내 책상에 있던 유선 전화가 울리자 팀원들이 더 난리를 쳤다.
기다리던 소식인가 싶어 받아 보니 운영지원과 과장이었다.
운영지원과는 교육이라든가 행사, 회계, 물품 조달 등의 일반 사무를 보는 곳으로 서울청의 모든 직원이 신세를 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다.
하물며 과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긴가민가하여 용무를 묻자 과장은 가볍게 제안했다.
-오늘 저녁 시간 됩니까? 식사 같이하시죠.
나와 통성명도 제대로 한 적 없는 사람이 갑자기 저녁 식사 제안이라.
우리나라에서 윗사람이 저녁 먹자는 것은 곧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세요.”
누군지 얼굴을 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