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학과비의 행방(3)
주눅 든 회장과 총무를 보며 나는 고민했다.
내가 주로 목표로 하는 것은 탈세범.
내 눈에 걸리면 법대로 조지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래서 이놈들도 똑같이 해 줄까,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건드는 건 차원이 다르다.
이미 내가 학교에 온 것 만으로도 뉴스거리다.
제사 때 사촌 형이 말했듯이 내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화제가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대학교 내에서 학생들끼리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내가 불려 오지 않았겠지.
그렇다고 여기서 이 둘을 조지면 둘은 어떻게 될까.
남은 인생 알차게 말아먹지 않을까?
물론 이 둘은 이미 나쁜 일에 발을 들였다.
한 번이 어려운 거지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또 이런 짓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생각해서 지금 여기서 둘의 인생을 조지는 게 맞는 일일까.
“흠…….”
짧은 한숨에도 둘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둘의 머리 위에 뜬 숫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금액은 크지 않다.
학생회는 딱히 사업자등록 같은 것이 의무인 단체는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별개로 하나의 단체 취급을 받는다.
그러니 저 숫자는 학생회가 이들에게 증여한 것으로 보고 매긴 증여세일 것이다.
단순계산으로 역산해보면 100만 원과 300만 원 정도의 횡령이다.
그렇다면 현재 저만큼의 벌만 받는 게 맞지 않을까.
미래에 어떨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그 미래에 저지를 일까지 예측해서 사람 둘을 조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좋아, 결정을 내렸다.
나는 둘에게 강한 어조로, 스스로 끝맺음 지을 것을 요청했다.
나로서는 정말 많이 봐주는 거다.
그러나 이대로 말로만 끝내는 건 아쉽다.
이번에 운 좋게 넘어갔다고 다음에도 그냥 넘어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또 이런 짓을 저지르면 곤란하지.
나는 바닥에 앉아 영수증 정리에 열중하는 수정이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회장과 총무에게 말했다.
“다음엔 학생이라는 보호막도 없을 거야. 내가 높으신 분들 어떻게 조지는지 봤지? 너희가 어떤 위치에 있든 내가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어. 두 번 다시, 법은 어기지 마.”
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들 입장에서 장관이나 국회의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일 테고, 그들이 어떻게 추락했는지 봤다면 평온할 수 없지.
이 정도면 적어도 앞으로 사건을 저지를 때 한 번쯤은 내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까.
나는 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수습하세요. 빈 돈은 당연히 채워 넣고, 학생들 모두에게 횡령 사실을 알리고 사과하세요. 지켜볼 겁니다.”
둘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아직도 장부에 몰입해 있는 네 명을 흘끗 바라보았다.
한참 집중하는데 방해하기도 그렇다.
나는 학생회실 밖으로 한 발짝 나왔다가 난데없는 인파에 주춤했다.
“우와아아아아!”
대충 헤아려 보니 머릿수는 약 마흔 명.
하나같이 어려 보이는 얼굴인 걸로 봐서는 이 학교의 학생들이다.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한차례 소리 지르더니 이제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학생회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모인 건가.
회장이 쉬쉬하고 덮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학생들이 다 들었을 테니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아직 위층에선 강의를 하는 교실도 있을 텐데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내 손짓 하나에 즉각 조용해진 학생들은 무언가 기대 어린 눈빛을 했다.
좋은 기회다.
나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어느 조직이든 반드시 썩습니다. 인간이 원래 그래요.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학생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이 학교 교수님들은 수업할 맛나겠네.
고등학교랑 대학교는 집중력 자체가 다르구나.
나는 감탄했다.
“여러분이 조금만 관심을 갖고 살펴주세요. 혼자서 따지기 힘들면 친구랑 가서 따지시고.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하는 분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더한 발언은 꼰대 같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나는 내게 손을 흔드는 학생들에게 꾸벅 인사해가며 얼른 건물을 빠져 나왔다.
***
인문사회대 건물을 나온 나는 무작정 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경험상 저런 일이 터지고 나면 사람이 점점 더 몰린다.
그리고 근처에 있으면 일이 커지기 십상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터덜터덜 걸은 것이었는데 캠퍼스는 생각보다 넓었다.
지나가다 갈림길에서 나온 화살표에 연못이라고 써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과연, 대학교는 교내에 연못도 파놓는구나.
이왕 온 김에 구경이나 해 보자.
오늘은 일찌감치 퇴근한 데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서 느긋했다.
나는 주위 풍경을 감상하며 길을 따라 걸었다.
한쪽은 관리를 안 하는지 우거진 풀이 건물 주변을 뒤덮고 있었고, 어느 건물은 꽤 오래된 느낌이 나기도 했다.
학생들은 제각기 손에 두꺼운 책을 들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대학교는 이런 분위기였구나.
그렇다면 연못은 꽤 분위기 있겠군.
캠퍼스를 구경하며 빙 돌아 도착한 연못은 내 기대를 무참히 배신했다.
물이 고이긴 했는데 관리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웅덩이에 불과했다.
아니, 이건 날벌레의 부화장이다.
인기척에 놀라 날아오르는 날벌레를 손으로 쳐내며 얼른 연못에서 빠져 나왔다.
비탈길을 헐레벌떡 올라가니 야트막한 동산에 벤치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캠퍼스 광경이 한눈에 보였다.
“와…… 이런 데서 공부하면 재밌겠다.”
진심으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그냥 앉아만 있을 뿐인데 내가 세상에서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고독이나 적막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바쁘게 일하던 뇌가 기어를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잡생각이 뭉게구름처럼 흩어지고 마음이 잔잔한 수면처럼 가라앉았다.
멍하니 학생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있자 발치에 참새 몇 마리가 쫑쫑거리며 다가왔다.
참새는 새카맣고 조그만 부리로 바닥을 콕콕 집더니 무언가에 놀랐는지 포르르 날아올랐다.
-부우웅.
원인은 내 핸드폰이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문자를 확인해보니 신수정이었다.
-뭐야, 언제 갔어?
이제야 내가 없어진 걸 알아챘나보다.
내가 뭐라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신수정이 연달아 문자를 보내 왔다.
-여기 장난 아님! 좀만 더 있다 가지.
-내가 있었으면 더 난리 났을걸. 대피하는 게 상책이야.
-뒤늦게 얘기 들은 어문학과 애들이 몰려들어서 물고 뜯고 난리 났거든.
-ㅋㅋㅋ어문학과는 욕도 문학적으로 하냐?
-아, 뭐래. 닥치고 이거 봐 봐.
이어서 몇 개의 사진이 왔다.
학생회실 밖으로 나간 회장과 총무, 그리고 학생회로 보이는 몇 명의 학생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학생회실에 둘밖에 없길래 의아했는데 인원이 더 있긴 한가보다.
그들 앞에 모여든 학생들은 각자 삿대질을 하며 무언가를 추궁하고 있었다.
수정이와 함께 학생회실에 따지러 갔던 여학생들이 의자 위에 올라가서 뭐라 뭐라 설명하는 사진도 보였다.
-네 친구들이 설명하는 거야?
-ㅇㅇ 첨엔 막 중구난방으로 따지고 드는데 정리가 안 되니까 그럼 신재현한테 배운 놈들이 상황설명 해줘라, 해서 이렇게 된 거.
나는 사진을 보며 웃었다.
몇몇 학생이 손을 들고 있었다.
짧은 시간 내에 장내 정리하고 발언권까지 얻어서 말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는 잘 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 회장이 사과하고 있고 자기가 알바해서 책임지고 채워놓겠다고 했어.
-방금 누가 사용 내역은 어떻게 검증하냐고 물어봤는데, 상경대 참고하기로 함.
-있는 자료 다 긁어모아서 스캔해 가지고 학과 홈피에 올리면 학생들이 다 같이 검증하기로 했음.
-오, 잘하고 있네.
-나중에 검토할 때 오빠도 한 번만 봐줘.
-ㅇㅇㅋㅋㅋㅋㅋ알겟슴
이 정도면 내가 더 참견하지 않아도 학생들끼리 잘 할 것이다.
나중에 잘하고 있나 한번 들여다보면 되겠네.
-근데 오빠 어디임?
-여기 무슨 연못 옆에 있는 동산
-언제 거기까지 갔냐. ㄱㄷ 지금 감. 밑에 내려와서 건물 앞에서 기다려.
-거기 정리 안 된 거 아니었음? 왜 옴?
-우리 학교 첨 왔으니까 학교 구경시켜 줌ㅋㅋㅋ 학식 먹고 가라
-ㅇㅋ
문자는 이걸로 끝이었다.
나는 기지개를 한번 켜고는 터덜터덜 내려갔다.
지리를 잘 모르니 수정이가 시킨 대로 어느 건물 앞에서 서성대고 있을 때였다.
“어, 자네!”
이번에 나를 붙잡아 세운 것은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이 딱 봐도 교수인 듯싶었다.
교수는 잘못 본 것처럼 눈을 끔뻑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아는 사람인가 싶어 머릿속을 뒤졌지만 역시 모르는 얼굴이다.
요즘엔 일방적으로 상대가 나를 아는 부쩍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상대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교수님이니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자네, 아니 신재현 씨. 혹시 우리 학교 편입하기로 한 겁니까?”
의외의 질문에 잠시 당황한 사이 교수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 회계학과 교수예요.”
“아!”
그제야 왜 교수가 반가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회계에 대해서는 나보다 잘 아는 전문가인 것이다.
“편입 시험 보려고요? 잘 생각했어요. 우리 학교 회계학과 무척 좋아요. 세법도 중요하게 생각해서 학점도 늘렸거든요. 신재현 씨가 와준다면 금상첨화지요.”
교수는 신나서 회계학과의 장점을 설파했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제가 대학교를 다닐 상황은 아니라서요. 사촌 동생이 국문학과 학생이라 만나러 왔습니다.”
학비는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일할 시간도 부족한데 무슨 편입이란 말인가.
게다가 사실 내가 이 학교에 들어온다 치면 편입이 아니라 수능을 봐야 한다.
교수는 내 말을 듣더니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그랬죠…… 아이고, 공무원 하기 전에 우리 학교 왔으면 좋았을걸.”
그럴 사정이 안 되었으니 못 온 거지만 나는 웃음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학문과 실무는 전혀 다르다.
그러니 같은 회계를 기반으로 하더라도 나랑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회계사랑 세무사들이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지 알아요? 우리 과 출신 전문직 졸업생들이 연락 올 때마다 신재현 씨 얘기를 해요. 그러니 내가 처음 봐도 이렇게 반갑지.”
졸업생들이 절대 좋은 얘기를 하진 않았을 텐데.
“졸업생분들이 욕 많이 하셨겠네요.”
장난스럽게 묻자 교수가 허허, 웃었다.
“왜 그런 놈이 나와서, 왜 하필 제 거래처 세무조사하는지 모르겠어요, 교수님 살려 주세요…… 이런 말들이 오갔죠.”
“역시 그렇군요.”
“미안해할 건 없어요. 오히려 내 제자들이 좀 정신 차려야지. 그동안 얼마나 해이했다는 뜻이겠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교수는 자꾸만 아쉽다는 듯 내 손을 어루만졌다.
“시간 있으면 더 얘기해 볼 텐데. 좋아하는 세법이라든가 회계학적 접근이라든가, 이중과세라든가…… 지금 강의 들어가야 해서.”
말하는 느낌이 이선균 과장을 많이 닮았다.
아니면 세법을 좋아하면 다들 이렇게 되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좋겠네요. 학교도 멋있구요.”
“정말이죠? 이거 약속한 겁니다. 자, 여기 내 명함. 연구실은 3층에 있어요.”
교수는 시계를 확인하고 서둘러 내 손에 명함을 쥐여주었다.
건물로 들어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응? 아는 사람이야?”
막 도착한 수정이가 건물 안으로 사라져가는 교수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네 학교 진짜 괜찮네.”
“당연하지! 후문 쪽에 있는 학식도 맛있어! 가자!”
학교 구경은 덤이고 목적은 밥 얻어먹기였구나.
나는 교수의 명함을 지갑 안에 넣고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