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학과비의 행방 (2)
수정이가 보낸 문자는 짧았다.
-인문사회대 2층 학생회실로 와! 빨리!
위치만 적어 보낸 것으로 딱 봐도 다급해 보였다.
게다가 오라는 곳이 학생회실이다.
“설마…….”
수정이가 혼자서 위풍당당하게 학생회실로 쳐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뭔가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걸 테지.
대학교 캠퍼스는 처음이라 느긋하게 둘러보려고 했는데 안 될 것 같다.
나는 지도를 검색해가며 인문사회대로 달렸다.
한낮의 캠퍼스에는 대부분 후줄근한 차림의 학생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의 학생도 있었다.
와, 대학교의 분위기는 고등학교와 굉장히 다르구나.
나는 달리면서도 주변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졸업생인가?”
“대학원생 아냐?”
“멍청아, 대학원생은 초췌해. 생긴 것부터가 말끔하잖아.”
인문사회대에 도착해 숨을 고르자 건물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정장 차림으로 달리는 20대 후반의 남자는 눈에 띄었나 보다.
나는 느슨해진 넥타이를 가다듬은 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
물론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중앙에 있는 계단을 오르자 스쳐 지나가던 학생 몇이 나를 가리키더니 은근슬쩍 내 뒤를 따라왔다.
2층에서도 구석진 곳에 있는 학생회실 앞에 선 후 노크하려는 순간, 안에서 웬 여자의 고함소리가 났다.
웅웅거려서 잘 들리진 않았다.
아까 문자 내용도 그렇고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나는 다급하게 학생회실의 문을 열었다.
“헉, 당신!”
막 여학생과 드잡이질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멱살을 잡은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자 남학생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당신이 여기는 왜…….”
***
어문학과 학생회실은 인문사회대의 2층 구석에 있었다.
학생회실로 쓰일만한 작은 방이 2층에만 있기 때문이다.
평소엔 편해서 학생회가 좋아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2층에 있다는 것이 악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뭐야? 2층에 무슨 일 있어?”
윗층에서 강의를 마치고 내려가던 학생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단순히 신재현을 목격한 학생들 대여섯이 모인 것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복도에 서 있는 것을 본 다른 학생들이 모여들고, 무리가 점점 커지자 지나가던 학생들까지 발길을 멈췄다.
“뭐야, 무슨 일인데 이러고 있어요?”
막 합류한 사람이 앞줄의 학생을 향해 물었다.
“신재현 알죠? 국세청에서 탈세범 잡는 걸로 유명한 공무원이요.”
“당연히 알죠. 우리나라에서 이제 신재현 모르는 사람은 없을걸요.”
자기 지역구 국회의원의 얼굴과 이름은 몰라도 신재현은 안다는 말이 나오는 세상이었다.
뉴스에서 다룰 뿐 아니라 온갖 커뮤니티에도 ‘어느 공무원의 탈세범 사냥 업적’이라는 짤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덕분에 뉴스를 보지 않는 학생들까지도 신재현이라는 이름 석 자는 알고 있었다.
“신재현 왔어요.”
“어? 진짜요? 미쳤다!”
“신재현이 왔다고? 지금 여기에?”
“왜 왔대? 누구 탈세한 놈 있는 거야?”
화제의 인물이 왔다는 소문은 복도에 모인 학생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단톡방에 있는 동기들을 부르는 학생도 있었다.
-지금 학교에 있는 놈들 2층으로 와봐라ㅋㅋㅋ
-피씨방임. 바쁨.
-지금 겜이 문제가 아님. 잼는 거 터짐
-먼데
-머임?
-어문 학생회실에 신재현 뜸ㅋㅋㅋㅋㅋㅋㅋ
-개꿀잼 예약ㅋㅋㅋ 당장 간다ㅋㅋㅋㅋㅋ
2층 복도에는 점점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만한 숫자가 모여든 것 치고는 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각자 학생회실에서 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후배를 때리려고 한 겁니까?”
신재현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복도에 선 학생들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학생회에서 후배 때리려고 햇나 봄
-실황이냐?
-왜 때리려고 함?
-ㄱㄷ 지금 듣는중
“제가 학우님을 왜 때립니까?”
“그럼 방금 제가 본 건 뭐죠?”
“멱살 잡은 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 후배님들 잘못도 있어요.”
“그래요? 구체적으로 제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오 밀어붙인다
-머임 2층 왜 이래
-이제 왔냐? 닥치고 조용히 들어봐
2층의 복도에 새로 합류한 학생들도 주위의 눈치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학생회장의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우리 학교의 선후배 간 문제입니다. 그쪽이 끼어들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나오시겠다.”
학생회장은 밀리지 않으려는 듯 신재현의 개입 여지를 원천 차단했다.
신재현은 한차례 혀를 찼다.
“애들 싸움도 아니고 다들 성인이니, 그건 뭐 알아서 해결하시게 넘어가겠습니다. 애초에 전 이 학교 학생도 아니니.”
“잘 생각하셨네요.”
학생회장의 목소리에는 안도가 섞여 있었지만 복도의 학생들 얼굴에는 불만이 섞였다.
단톡방도 폭주하고 있었다.
-아, 뭐야. 실망이다.
-생각보다 쉽게 물러나네?
-나 방금 왔는데 개꿀잼 어디 갔어
-존버해라. 존버는 승리한다. 지금부터가 재밌을 것 같음. 내 감은 정확하다.
어느 학생이 입력키를 누름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신재현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학생들이 과비 사용내역 요구했죠? 저도 같은 걸 요청하러 왔습니다.”
-왔다!
-역시 저놈들 과비 떼먹은 게 맞구나
-대자보가 어설프다 했음ㅋㅋ
-경제과 애들 하는 거 좀 보고 배우지
-대자보 글씨체는 예쁘더라
-총무가 국문학과라 그래. 자랑스럽다! 국문학과!
시시껄렁한 대화와 농담이 오고 가면서도 이들의 주의는 학생회실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학생회장이 머뭇거리는 사이 날카로운 총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 분이 왜 그런 걸 요구하시죠?”
총무는 한치의 물러남도 없었다.
“저희는 알아서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과비 내역이 대단한 기밀이거나 내부정보인 것도 아닌데 왜 못 보여주냐는 말입니다.”
신재현이 내던진 말에 총무는 바로 미끼를 물었다.
“기밀은 아니지만 내부정보인 건 맞습니다.”
“아하, 내부정보다…… 그럼 이해관계인이 요청하면 보여주는 게 맞네요. 여기 국문과 학생들이 요청했잖습니까.”
“그건…….”
총무는 이야기가 궁한지 말을 흐렸다.
기회를 잡은 신재현이 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니면 내부정보여도 제가 볼 방법은 있습니다.”
“뭡니까?”
긴장한 총무가 저도 모르게 되묻자 신재현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학생들이 횡령 혐의로 고발하게 한 후에 경찰과 함께 와서 세무조사를 하거나, 아니면 지금 당장 국세청으로 돌아가서 여러분의 개인 계좌를 털어보는 방법이 있지요.”
“마, 말도 안 돼요!”
-어엌ㅋㅋㅋㅋ 인생은 실전이다ㅋㅋ
-후배도 아닌데 사회인한테는 억지가 안 통하죠? 이제 머라 할 거임?ㅋㅋㅋ
-이것이 국세청이다.
-한두 번 털어본 짬이 아니네ㅋㅋㅋ
단톡방의 반응이 뜨거웠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메시지가 입력되고, 또 밀려 올라갔다.
남의 메시지를 읽을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
“거기 둘, 학과비 떼먹었죠?”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딱 보면 아는데. 혹시 두 분은 국세청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신재현의 목소리는 은근했지만 회장과 총무,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둘 다 감히 국세청을 속여넘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세무조사 받아보시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두 분이 자진해서 보여주고 끝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윽…….”
“왜 사람들은 기회를 줄 때 그걸 잡으려고 하질 않지? 지금 입 다문다고 해결될 것 같아요? 싹 뒤지기 시작하면 일이 커질 텐데.”
“……드리겠습니다.”
이내 회장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와ㅋㅋㅋㅋㅋ 회장이 바로 항복함
-후배들 앞에서나 무게 잡는 거지 누가 국세청에다 비빔?
-그동안 이상하다 했다. 영수증 공개 안 할 때부터 알아봤음
-근데 이중에서 따진 사람 있었음? 없었잖아.
-아니 그럼 어떻게 선배한테 따지냐? 너 같으면 하냐?
-그동안 따지러 간 애들 몇 명 있긴 했는데 다 울면서 나옴
-머야 회장 쓰레기네
-총무도 만만치 않음. 과비 안 낸 신입생들 따라다니면서 머리통 때리고 그랬음.
이때가 기회란 듯이 평소 행실에 대한 제보가 속속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야. 국문학과에 따진 애들 4명 있음. 아까 따지러 간다고 한 거 들었음.
-ㄹㅇ?
-나 학생회실 바로 앞에 있는데 저 말이 맞음. 회실 안에 여자애 4명 있음.
-이것이 국문학과다!
-가문대의 자랑 국문학과!
그리고 한동안 안에서는 조용했다.
가까운 곳에 서 있는 학생들은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안에 머함? 조용한데
-장부 뒤지고 있음
-오 영수증 꺼냈다. 학과생 네 명이 아예 바닥에 자리 잡고 앉아서 도와주고 있음
-아니지, 반대임. 공뭔이 학과생한테 조언해주는 거임.
-얜 뭐냐? 요즘 말하는 깎아내리기 그런 건가?
-아무리 학과 회장이 횡령했어도 공문 없이 세무조사 하는데 절차상 문제없을 것 같냐? 이건 공무가 아니고 학생들 자체조사에 조언해주러 온 걸로 해야 됨. 그래야 신재현 징계 안 먹음
-와…… 개쩐다.
-쟤 요즘 공무원 공부해서 그래.
-그럼 저 안에 있는 애들이 조언 듣는 걸로 나중에 입 맞춰. 국문과 애들 ㅇㅋ?
-ㅇㅋㅋㅋ
단톡방에서 모의를 꾸미는 동안 빠른 속도로 장부와 통장을 훑은 신재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수정아, 여기 보면 학과비 관리 통장에서 21만 원 빠져나갔지? 그리고 이쪽 영수증 보면 MT 계약금이라고 써 있어. 이런 식으로 출금 금액과 영수증을 하나하나 맞추는 게 1차 관문이야. 단, 이런 식의 간이영수증은 안 돼. 적어도 상대 계좌가 적힌 송금 영수증은 있어야지.”
-머야. 진짜 조언해주는데.
-애들 멋모르고 또 당하지 말라고 알려주나보다
-멋! 있! 다!
-크, 물고기를 주기보다다 낚시법을 가르쳐주는 참공무원…….
신재현은 4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계속 설명했다.
최대한 간략하게, 그러나 요점을 전달하려 노력하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다음엔 이 영수증이 진짜가 맞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야. 세금계산서나 계산서, 신용카드, 현금영수증이면 일단 믿어도 돼. 간이영수증이나 거래명세서, 송금증 같으면 직접 발품 뛰면서 확인해. 실제 납품된 물건과 금액이 맞는지 사이트 같은 데서 확인도 하고.”
-발품…… 메모…….
-실제로 저러고 다닌다는 거잖아
-공무원 극한직업인데;
그렇게 때아닌 강의가 이어졌지만 복도에 모인 학생들은 떠날 줄을 몰랐다.
한참의 설명이 끝난 후, 짧게 한숨을 내쉰 신재현이 말했다.
“두 분도 방금 한 설명 들으셨죠? 사용금액에 대해 영수증 첨부해서 다시 게시하세요. 사적인 용도로 쓴 돈이 있으면 채워 넣고.”
“네에?”
“그럼 그대로 꿀꺽할 생각이었어요?”
“아, 아닙니다!”
잔뜩 풀죽은 회장이 외치듯 말했다.
“여기 수정이가 제 사촌 동생이거든요. 상황은 실시간으로 얘한테서 들을 테니 깔끔하게 뒤처리 하세요. 내가 그동안 탈세범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봤다면 이게 정말 많이 봐주는 거라는 걸 알 겁니다.”
-그러게? 난 아예 조져 버릴 줄 알았는데.
-아직 학생이라 봐주는가 봄ㅋㅋ
-이야, 뉴스에서 말하는 것처럼 저승사자인 줄 알았더니 이런 섬세함도 있네.
“그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수습하세요. 빈 돈은 당연히 채워 넣고, 학생들 모두에게 횡령 사실을 알리고 사과하세요. 지켜볼 겁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회장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끝으로 신재현은 복도로 나왔다.
“어?”
그리고 복도를 가득 메운 인파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