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74화 (174/500)

174화. 학과비의 행방(1)

“우와, 우와우와! 진짜 신재현이야?”

가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학년인 박은하는 신수정이 내민 핸드폰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신수정이 당당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올렸다.

“내가 진짜 사촌 오빠라고 했지? 너희 오천 원씩 내놔.”

신수정은 책상에 둘러앉은 친구 셋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강의도 듣고 밥도 먹는 대학교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내기한 거 아닌데.”

“안 믿는다고 찍어오라며!”

“그렇게 말해야 찍어올 거 아냐.”

“아오…… 내가 이것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수정이와 친구들이 투닥대는 동안 박은하만은 눈을 반짝거리며 사진첩을 뒤지고 있었다.

“은하가 제일 신났네. 이거 은하한테 제일 유리한 내기였던 거 아냐?”

박은하가 신재현의 팬이라는 것은 친구라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언제부턴가 박은하는 매일매일 신재현의 이름으로 된 뉴스를 검색했으며,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은 모두 저장했다.

흡사 아이돌 팬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수정아. 이 사진 나한테 좀 보내주면 안 돼?”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아?”

신수정은 진심으로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봐온 사촌의 입장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멋있잖아. 용산 세무서에서 출발해서 2년 만에 삼성 세무서를 거쳐 서울지방국세청까지 간 것도 그렇고. 상대가 누구든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서울지방국세청에서는 특수팀을 이끌고 있다며! 저번에 뉴스에서 봤는데 탈세범 불러다가 가차 없이 세금 때렸다고!”

박은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무용담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사촌인 나보다 네가 더 잘 아냐? 오빠가 용산 세무서에 있었던 건 어떻게 알았어?”

“기사 찾으면 다 나와. 연혁은 다 조사했어.”

“와…… 내가 3년 전에 아이돌 따라다닐 때 우리 엄마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친구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박은하는 진지했다.

“잘 생각해봐. 알바 해봐서 대충은 알잖아. 점장님이나 손님한테 막 큰소리 칠 수 있어? 마음속으로야 100번이고 하지만 실제로는 무서워서 못 하잖아. 그런데 재현 오빠는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거리낌 없이 친다니까?”

21살의 여대생에게 있어서 28살이면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여대생들이 복학생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박은하는 거리낌 없이 신재현을 오빠라고 불렀다.

“우리도 그 오빠가 대단한 건 알아. 특히 공무원이라는 점이 독특하지. 보너스 받는 것도 아닌데.”

“그치? 게다가 잘생겼어. 똑똑하고 정의감 넘치는데 잘생겼다고!”

박은하가 소리 지르자 신수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막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아닌데…….”

“연예인 급은 아니지만 일반인 중에서 그 정도면 상위권이야! 그럼, 수정아, 앞으로도 오빠 사진 좀 부탁할게. 많이 찍어줘라.”

박은하는 신수정의 손을 꼭 붙잡으며 간곡하게 말했다.

신수정은 질겁하며 손을 뺐다.

“으엑! 주말에만 잠깐 보는데? 주말의 신재현은 완전 아저씬데?”

“그것도 좋아! 레어 사진!”

“미치겠군…….”

신수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너 오빠 직접 보면 기절하겠다.”

“뭐, 뭐라고? 재현 오빠가 학교에 오신대?”

이번에는 박은하뿐 아니라 친구들도 놀란 얼굴을 했다.

“왜? 너 때문에 오는 거야?”

신수정은 강의실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과, 과비 사용 내역이 이상하다고 그랬더니 직접 와서 보겠대.”

“대박! 진짜?”

친구들은 일제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들에게 있어 신재현은 친구의 사촌 오빠이기도 했지만 TV에서 자주 보는 유명인이기도 했다.

친숙함보다는 유명인을 대하는 감정이 더욱 컸다.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신수정이었다.

“그건 못 들었는데. 어차피 퇴근하고 들를 테니까 저녁에 오지 않을까? 일찍 온다고 해도 한두 시간 일찍 퇴근하는 정도겠지.”

“아, 맞다. 평일에 오겠지?”

“응. 과대 만나 봐야 할 테니까. 근데 과비 조사하면서 연차 내고 오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번엔 박은하뿐 아니라 친구들도 일제히 실망감을 내비쳤다.

“아쉽다. 막 조사하고 세금 때리고 그러는 거 보고 싶었는데.”

“실제는 어떻게 하려나? 탈세하는 회사 쳐들어가서 끌고 나오나? 경찰처럼?”

“오빠 말로는 그런 권한은 없어서 자료 갖고 조사하고 나중에 고지서 보내는 게 다라던데.”

“……저녁까지 기다려서 볼까?”

“시간 될 때 들르는 걸 텐데 언제 올 줄 알고.”

신수정이 친구들끼리 얘기 중일 때 깊게 고민하던 박은하가 손뼉을 쳤다.

“언제 오시든 상관없게 내가 조사 해둘게.”

“너 회계 잘 모르잖아. 어떻게 조사하려고.”

친구들이 말렸지만 박은하의 의지는 단단했다.

“기사에서 봤는데 무슨 영수증 같은 거랑 장부랑 통장 조사하면 된댔어. 그 정도는 우리도 요구할 수 있는 거잖아.”

박은하의 설득에 친구들은 솔깃함을 느꼈다.

자신들이 낸 돈이다.

사용처를 요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무척이나 재밌어 보였다.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우리 과니까 오히려 외부인보다 우리가 가야 하는 거 아닐까?”

“그치? 일부러 시간 내서 오는 거니까 우리가 좀 도와 드리자.”

여기에 여대생의 행동력까지 더해지면서 이들의 계획은 순식간에 정해졌다.

오후 수업이 끝난 후 4시경.

이들은 학과별 학생회에 쳐들어가기로 결정했다.

***

여대생 4명의 계획은 학생회실에 들어가서 질문을 던지자마자 틀어지고 말았다.

“대자보에 공개한 그대로예요. 뭘 더 알고 싶은데요?”

학생회실에 있던 것은 둘이었다.

회장인 남학생과 총무인 여학생.

그중 총무는 네 학생을 입구에 세워둔 채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과비 총 얼마에 사용금액 얼마, 남은 돈 얼마. 다 적어놨잖아요. 혹시 숫자 못 읽어요?”

총무의 말투는 지극히 퉁명스러웠다.

환영하는 분위기도 아닌 데다 상대는 선배였기에 네 학생은 단숨에 주눅이 들고 말았다.

대학교는 학번이 깡패다.

선배가 노려보는 순간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가장 앞에 있던 신수정이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 상세 내역 같은 거 있잖아요. 장부라던가 영수증이라던가.”

“그걸 내가 왜 보여줘야 해요?”

“……네?”

신수정은 당혹스러움에 고개를 들었다.

원래는 활발하고 잘 들이대는 성격이었지만 막상 선배가 노려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선배는 하늘 같다는 소리만 주구장창 들어온 2학년들이었다.

평소엔 선배가 뭐 어떠랴, 하다가도 막상 따지려니 주눅이 드는 것이다.

“저희도 국문학과고…… 저희가 낸 과비니까 어떻게 쓰였는지 궁금해서요.”

신수정이 떨면서도 꿋꿋하게 대답하자 총무가 눈을 치켜떴다.

그것만으로도 눈매가 한층 더 매서워졌다.

“어떻게 쓰였는지 궁금해요? 다 너희들 처먹이고 놀게 해 주는 데 쓰였어요. 학우님, 학생회가 장난 같아 보여요? 과비 겨우 10만 원 내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총무의 반응에 네 학생은 더욱 당황했다.

친절하지는 않더라도 납득이 가는 설명은 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딱 봐도 이상한 게 확실한데 뻔뻔하게 나오니 오히려 말문이 막히는 것은 이쪽이었다.

‘세상엔 합리적인 사람만 있는 게 아니구나.’

적어도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니 말은 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겨우 10만 원이라니 말씀이 심하세요. 엄연히 안 내도 되는 걸 걷어가시는 거잖아요. 그럼 어떻게 쓰였는지 알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

“안 내도 되는 걸 냈다…… 우리가 무슨 삥 뜯는 것처럼 얘기하네요. 학우님 이름이 뭐죠? 앞으로 학우님은 과비 내지 마세요. 대신에 학과의 모든 행사도 참여하지 마세요.”

국문과에서는 MT 때문에 강의를 빠지게 되면 교수들이 출석 인정을 해 준다.

그렇다고 MT에 가지 않는 인원끼리 모여서 강의를 듣는 것도 아니다.

모든 행사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은 학점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았다.

이쯤 되자 신수정은 무서움보다 분노가 앞섰다.

“저희가 대단한 걸 요구한 것도 아니고, 과비 사용 명세쯤은 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까 그걸 왜 보여줘야 하냐고요. 학칙에 쓰여 있던가요? 아니면 무슨 법이 있나요? 뒤에 있는 학우님들도 같은 생각인가요? 요즘 후배님들은 겁대가리가 없으시네.”

네 학생은 주춤했다.

겨우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날 텐데 눈앞의 총무가 거대한 산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주눅 들게 하는 분위기도 한몫해서 논리적인 대처가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이들의 머릿속에 신재현의 활약이 적힌 기사가 스쳐 지나갔다.

‘그 오빠는 항상 이런 상황에서 싸웠겠구나.’

학과 학생회라는 아주 작은 공동체에서도 감투를 쓰려는 놈이 있고 그걸 이용하는 놈이 있다.

감투를 쓰면 곧 권한이 손에 들어온다.

그 권한은 크지 않지만 다른 자들에게 휘두를 땐 충분히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이런 작은 학생회에서마저 이럴진대 사회에서는 어떻겠는가.

‘오빠는 진짜 어떻게 한 거야?’

신수정은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다리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꾸만 피하려는 시선을 정면에 두고 총무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뒤에서 주춤하고 있던 박은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박은하 역시 이 순간 신재현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도 할 수 있어. 잘못한 건 저쪽이고 나는 당연한 요구를 하는 거잖아. 재현 오빠처럼 되고 싶다면 지금이 그 기회야. 오빠, 힘을 주세요!’

박은하는 신수정 옆에 나란히 섰다.

몇 번이고 돌려본 인터뷰와 세무조사 장면의 영상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리고 신재현을 따라 하듯 도발적으로 말했다.

“그러는 선배님은 무슨 권리로 정보 공개를 안 하세요? 당당하면 공개하시면 될 거 아니에요. 뭐가 문젠데 이렇게 저희 같은 떨거지 후배랑 씨름하고 계세요?”

혹자는 신재현의 방식을 싹수없다고 한다.

상대를 너무 도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뱉은 순간 알 수 있었다.

발뺌하는 상대가 항상 논리적이고 말이 통한다는 보장은 없다.

자신을 보호하고 상대의 빈틈을 끌어내기 위한 떠보기.

거기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분노가 합쳐진 결과가 이것이다.

물론 박은하의 말은 정도가 없었다.

총무는 빈틈이 아니라 분노를 터뜨렸다.

“학우님, 후배님 하면서 존대해줬더니 이것들이 끝을 모르네. 누가 선배한테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어?”

“여기서 선후배가 중요한가요? 애초에 저희한테 장부 보여줬으면 바로 끝날 일이었잖아요. 보여주세요! 그럼 저희가 무릎을 꿇고서라도 빌 테니까!”

“이것들이 아직도!”

신수정과 박은하가 나서자 나머지 두 친구도 힘을 얻었다.

넷이 한꺼번에 달려들기 시작하자 도리어 밀리는 것은 총무였다.

총무가 어어, 하고 있자 안쪽 책상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렸다.

-쾅!

회장이 던진 책이 바닥에 떨어져 낸 소리였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그렇게 보고 싶다던 장부다.”

박은하가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주우려 하자 회장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거 보는 순간 국문과는 앞으로 모든 혜택에서 너희 넷을 배제할 거다. 단톡방 알림, 사물함, 뒤풀이 행사 모두 다.”

엄연한 협박이었지만 이젠 흔들리지 않았다.

박은하는 장부를 집어 들어 첫 장을 넘겼다.

-팔락.

한 장, 두 장.

종이가 넘어갈수록 박은하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아, 맞다. 봐도 잘 모르는데…… 기사에서 뭐라고 했더라? 장부 다음에 영수증이랑 통장인가?’

박은하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장부 보는데도 힘들었는데 영수증이랑 통장 달라고 하면 보여줄까? 진짜 산 넘어 산이네.’

교양이라도 회계를 들어둘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박은하가 어쩔 줄 몰라하자 회장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부웅.

침울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낸 신수정이 화면을 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너넨 다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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