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2)
-공무원 그게 대수인가?
나는 밥에 나물을 넣고 비비다 말고 멈칫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모든 사람들이 경악한 얼굴로 큰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밥상에 앉은 7명의 인간이 일제히 바라본 탓인지 큰어머니가 움찔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훈훈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나는 조용히 밥그릇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덜어 넣고는 큰어머니를 응시했다.
삭삭, 밥이 비벼지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허둥지둥하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사촌 형인 신태현이었다.
형은 기겁하며 큰어머니를 말리더니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라 나는 싱긋 웃어주며 소고깃국을 한 입 떠 먹었다.
“흐억!”
그냥 웃었을 뿐인데 형의 반응은 심각했다.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벌어지더니 손에 든 숟가락이 덜덜 떨렸다.
그걸 모르는 큰어머니는 시큰둥하게 말을 이었다.
“태현아, 넌 좀 가만히 있어. 요즘 재현이가 TV 좀 나온다고 신난 건 이해해. 나도 재현이 잘되는 거 좋아. 근데 공무원이 그렇게 막 뉴스 타도 되는 거니?”
잘되는 거 좋긴 뭘.
표정하고 목소리에서부터 떨떠름한 게 드러나는데.
저렇게까지 싫어해 주면 오히려 나도 대하기 편하다.
“타도 된다고 하시더라구요.”
“얘는. 공무원이면 행실이 똑발라야 되는 거 아니야? 어느 윗대가리가 그런 걸 허락해? 큰엄마도 젊을 때 큰 회사 다녀 봐서 아는데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답게 조용하게, 구설수 오르지 않게 행동해야 되는 거야. 재현이 너는 지금 몇 달 째 신문에 뉴스에…….”
원래부터 탐탁지 않게 보이던 내가 유명세도 타고 친인척 모임에서도 화제가 되니 눈꼴시었던 모양이다.
원래 친척끼리 자식 자랑 하는 건 연례행사라 상관없긴 한데 너무 대놓고라 웃음만 나왔다.
내가 피식 웃으며 잘 비빈 밥 한 숟갈을 크게 퍼먹자 신태현이 큰어머니를 말렸다.
“어, 엄마. 잠깐만, 나랑 얘기 좀 해.”
“엄마 얘기하는데 왜 그래. 넌 좀 가만히 있어. 잔소리 기분 나쁘다 생각하지 말고, 어른이 하는 얘기니까 잘 새겨들으렴. 공무원 그거 철밥통이라 딱 재현이가 하기엔 좋겠더라. 그러니까 괜히 눈에 띄었다가 잘리지 말고, 있는 자리나 잘 지켜. 우리 태현이는 말이야.”
“엄마…….”
“우리 태현이는 번듯하게 대기업 들어가서 승승장구하고 있잖니. 혹시 공무원 힘들면 태현이한테 말 해보렴. 어디 생산직 라인 들어가면 월 300은 넘게 번다더라.”
“엄마, 제발…….”
신태현이 흐느끼다시피 하며 큰어머니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큰어머니는 근 몇 년간 못 했던 말을 쏟아내려는 듯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재현이가 열심히 한 건 이 큰엄마도 잘 알아. 국회의원도 치고 장관도 치고, 그런 거 하려면 뒤에서 막 얼마나 많은 거래가 오고 갔겠어. 근데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던 거지. 앞으로는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말고 철밥통 일이나 해.”
결국 안절부절못하던 신태현이 고함을 질렀다.
“엄마!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아이구,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
“하지 말라고 내가 옆에서 그렇게 말렸잖아! 제발 좀 그만하라고!”
답답해하며 소리 지르는 신태현과는 다르게 큰어머니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얘가 왜 이렇게 난리야? 그럼 나는 이런 말도 못 하니?”
“어! 하면 안 돼! 하면 안 된다고!”
“아니, 쟤가 무슨 대단한 나라님이라도 돼? 아들, 대체…….”
“재현이 손에 모가지가 날아간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TV에 안 나온 사람도 수두룩해.”
“그래 봤자 뭐, 중소기업 사장이나 초선 국회의원 그런 거잖니. 장관은 애초에 대통령이 버리려고 계획한 걸 쟤가 덥석 문 거고. 대기업을 어떻게 한다고…….”
신태현은 허벅지를 퍽퍽 두드렸다.
“미치겠네, 진짜. 쟤 때문에 우리나라 거대 그룹 전략실이 초비상이야. 언제 누굴 때릴까, 다음엔 누구 모가지가 날아갈까! 재현이가 쳐다보기만 해도 다들 몸을 사린다고!”
“에이, 돈으로 못 하는 게 없는 놈들이 대기업이야. 아들, 너무 겁먹은 거 아냐?”
“그룹 총회장 전략실에서 관리할 정도면 어느 정도 급인 줄 알아? 3선 이상의 국회의원, 장관, 청와대, 10대 재벌 3세들, 선거로 뽑힌 지방자치단체장. 이런 놈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고, 재현이는!”
“으, 응……?”
큰어머니의 표정에 눈에 띄게 당황이 늘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재현이가 우리 회사 조사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야. 쟤 별명이 저승사자라고! 엄마,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큰어머니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와 신태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큰어머니가 조용해지자 신태현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재현아, 내가 정말 미안하다. 어머니가 막말한 건 내가 대신 사과할게.”
나는 말없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신태현의 목소리가 더욱 처절해졌다.
“내가 정말 이런 말 하기는 부끄러운데, 나도 살아야 되니까 낯 뜨거운 거 감수하고 물어볼게. 혹시 새전 칠 거니……?”
이렇게까지 물어볼 정도라면 내 악명이 기업 내에 퍼졌거나 정말 궁금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내 어머니에게 싫은 소리를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엔 대상이 나일뿐더러 사촌 형이 저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따질 생각은 진작 시들어 버렸다.
“형.”
“어, 응! 재현아.”
“나는 사적인 감정으로 절대 조사 안 해. 그렇게 마음먹었어. 그리고 조사 내용은 친인척이라도 흘릴 수 없지만…….”
말끝을 흐리자 신태현이 긴장한 얼굴로 내 말을 기다렸다.
“새전 그룹은 요즘 법인세 잘 내고 있지?”
“당연하지! 우리 회사 깨끗해!”
“그럼 걱정 없지 않을까?”
신태현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나는 이번엔 차게 굳은 큰어머니를 향했다.
“큰어머니, 저를 걱정해서 쓴 말 해 주신 거로 생각하겠습니다. 다행히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앞으로도 탈세범 모가지는 시원하게 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큰어머니 말씀도 있고 하니 조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 그, 그래. 조심해라.”
큰어머니는 혼이 나간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일단락되었지만 한번 깨진 분위기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곤란한 얼굴로 앉아 있자 눈치를 보던 수정이가 내 옷자락을 당겼다.
“그래서 사인 해 줄 거야, 안 해 줄 거야?”
“…….”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시도라면 어설프고 진심이라면 놀랍다.
“이 상황에서 꼭 그 말을 해야겠냐?”
“아, 사인 없으면 그냥 네 이름 석 자만 써 주면 되잖아! 친구들한테 증거를 가져가야 된다고!”
“수정아, 오빠한테 또!”
수정이와 효정 누나 덕분에 다시 부산스러운 분위기로 돌아왔다.
나는 슬쩍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아까 큰어머니의 잔소리가 있었을 때는 어머니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왠지 뿌듯함이 차오른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끼리 불편해지는 것 아닌가 했는데 이 정도면 잘 끝난 것 아닌가 싶다.
그래도 큰어머니인데 큰소리 내고 싶진 않았으니까.
나는 고마움과 멋쩍음을 담아 수정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분위기 전환시키려고 그런 거지?”
하필 사인 얘기한 것이 좀 어색하긴 했지만, 그 상황에는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내뱉었다고 하면 이해는 간다.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담아 멀리 있던 갈비찜을 수정이 쪽으로 밀어주자 수정이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분위기? 아닌데. 장난하지 말고 이따 사인하고 가. 까먹으면 안 돼. 오늘 제사라고 했더니 당장 인증하라고 했단 말이야.”
“……진심이었어?”
“어. 이따 사진도 좀 찍자. 내가 몰래 찍으려다가 특별히 미리 알려주는 거야.”
수정이는 더없이 진지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
“오빠, 좀 웃지?”
저녁을 먹고 난 후 잽싸게 도망치려 한 나는 결국 수정이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베란다 한쪽에서 수정이의 셀카에 풍경이 되어 주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몇 장 째냐, 그만 좀 찍어라.”
처음엔 한두 장 찍고 말겠거니 했는데, 수정이는 절대 녹록한 아이가 아니었다.
사진이 10장을 넘어갔을 무렵, 나는 세는 것을 포기했다.
“나중에 여자친구 생겨도 사진 안 찍을 거야? 미리 연습한다 생각하고 빨리!”
“못 해. 안 돼! 꺼져!”
“아오, 각도별로 찍어야 합성 얘기 안 나온다고.”
“야. 어느 사촌이 같이 셀카를 그렇게 많이 찍냐? 미친 거 아냐? 너 지금 나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도 인증만 아니었으면 너랑 안 찍거든?”
한 마디를 안 진다.
나는 욱해서 소리쳤다.
“차라리 친구를 데려오는 게 빠르겠다!”
“아!”
수정이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손뼉을 쳤다.
“오빠, 혹시 다음 주에 시간 돼?”
“나 출근해야지. 왜? 설마 친구들한테 나 데리고 나간다고 했어?”
수정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묻자 다행히 수정이는 고개를 저었다.
“평일에 오빠한테 그렇게까지는 말 못 하지. 근데 좀…… 에휴, 아니다.”
하지만 수정이의 반응이 꽤 껄끄러웠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나도 마음이 약해진다.
“뭔데? 사인은 못 해도 사진이라면 한 장만 더 찍어 줄게.”
“아니, 그건 이제 됐고. 우리 학교가 좀 이상해서.”
“뭐야, 횡령이라도 하는 거야?”
이상하다는 말만 들으면 자동으로 횡령, 이중장부, 탈세를 떠올리는 건 내 직업병이다.
물론 세상에는 성실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고.
그렇기에 나는 장난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수정이는 진지하게 끄덕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진짜 횡령이야?”
“자세히는 모르겠어. 나야 오빠처럼 회계 이런 거 잘 아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거 아냐?”
수정이는 회계와 아무 관계도 없는 국어국문학과다.
회계라는 것이 따로 공부해야 하는 건 맞지만 일반 학생까지 느낄 정도면 꽤 많이 곪았다는 뜻이다.
이건 어쩌면 꽤 큰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재단의 문제야?”
“아니, 국문과가 재단의 비리 같은 걸 어떻게 눈치채겠어. 학교 문제가 아니고 학과 문제야. 과대표가 돈을 걷어갔는데 뭔가 이상해.”
“과대표가 돈을 왜 걷어가? 등록금 내면 끝 아니야?”
나야 대학교를 안 다녀 봐서 모른다.
그러자 수정이는 아차 하더니 다시 설명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걸 보니 이럴 땐 섬세한 녀석이다.
“과비라고 해서 학과마다 한 십만 원씩 내거든. 그거 갖고 사물함 수리도 하고 MT 가는 데 보태고 교수님 선물도 사고 그래. 근데 사용 내역 공지한 게 이상하단 말이야.”
“장부나 영수증 같은 거 있어?”
“그런 건 우리한테 공지 안 해. 그냥 이런 식이야.”
수정이는 핸드폰에서 사진 하나를 찾아 내밀었다.
-MT 숙소비 1,200,000
-뒷풀이 248,600
-장기자랑상품 121,000
하얀 전지에 손 글씨로 쓰여 있는 숫자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세금계산서나 카드명세서, 하다못해 영수증마저 없었다.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이게 지금 사용내역이랍시고 써서 붙인 거냐?”
“응. 납득이 안 가서 물어봤더니 원래 계속 이렇게만 공지하는 거래.”
원래는 상황 봐서 수정이에게 조언만 해 주려고 했다.
이 금액은 맞고, 이 영수증은 좀 수상하다 등등.
그런데 이건 그런 걸 짚어 줄 수준이 아니었다.
요 며칠 느슨해졌던 내 투지가 확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야. 다음 주에 당장 너네 학교 갈게.”
“으응? 오빠가 직접 쳐들어오기엔 금액도 너무 작은데.”
“금액은 아무 상관 없어. 불법이냐, 아니냐만 있을 뿐이지.”
게다가 아직 20대 초반인 놈들이 벌써부터 이런 수작질이라니.
몇 자리 숫자를 머리 위에 띄우고 있을지 사뭇 기대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