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1)
회식은 자고로 금요일 저녁이 최고의 선정이다.
다음 날 술병이 나도 이틀간 드러누워서 굴러다닐 수 있으니.
내일은 출근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런 의미에서 특조 2팀의 회식 날은 만장일치로 금요일로 정했다.
이선균 과장과 먹은 것이 수요일이었으니 나로서는 꽤 괴로운 목요일이었다.
목요일에 의자에 늘어져 빌빌대는 나를 보며 강혜원이 정말 회식을 해도 되겠냐고 물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숙취에서 벗어났다.
청장의 허락 하에 당당하게 술을 먹을 수 있는 날은 많지 않다.
또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한참은 사건 쫓는답시고 자체 금주일 텐데 당연히 달려줘야지.
그렇게 금요일 저녁, 팀원들과 또 고기를 먹은 다음날.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슬슬 깨워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12시 다 됐는데.”
“숙모, 제가 가볼게요.”
익숙한 목소리.
사촌누나 신효정과 동생 신수정 자매다.
집에 혼자 있어 심심한 어머니와 꽤 친해진 후로는 주말마다 종종 놀러 오는 친척이었다.
동생인 신수정은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 매주 찾아오지만 누나인 신효정이 오는 건 드물다.
“어? 일어났네?”
누나인 신효정이 내 방 문을 열다 말고 눈이 마주쳤다.
“누워서 뭐 해?”
“하루는 똑같은 24시간인데 왜 주말은 짧을까, 나는 잠을 잤을 뿐인데 왜 토요일 반나절이 지나갔을까. 잃어버린 내 시간은 어디에 있을까 고민 중이었어.”
“방금 깼나 보네.”
나를 깨우러 온 게 누나라 다행이었다.
만약 신수정이었다면 당장 발차기가 날아왔을 것이다.
“얼른 나와서 밥 먹어.”
신효정은 내가 옷 갈아입을 걸 생각해서인지 도로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나 나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머리가 쾅쾅 울렸기 때문이다.
머리 안에는 사실 공간이 있는 게 아닐까?
뇌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다 두개골에 부딪혀서 울리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는 것 아닐까?
물론 헛소리다.
한참을 누워 미동도 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자 이번엔 신수정이 문을 열었다.
누나와 달리 조심성이 없는 수정이는 쾅 소리가 나도록 확 열어젖히더니 발끝으로 이불을 확 걷었다.
“야. 얼른 나와! 육개장 끓여 놨어!”
“수정아, 오빠한테 야가 뭐니.”
“아, 왜! 반년 차이밖에 안 나는데!”
수정이와 누나가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나는 또 끙끙 앓았다.
“제발 목소리 좀 줄여 줘…….”
“그러게 누가 그렇게 술 먹으래? 어젠 새벽 3시에 들어왔다며? 일어나! 밥 먹어!”
“알았으니까 제발 나가…….”
나는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술도 안 먹으면 주량이 줄어든다.
그래도 이선균 과장과 먹으면서 간에 알코올을 넣어줬으니 어제는 좀 달려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소맥은 좀 무리였나 보다.
“으으.”
도로 드러눕고 싶은 마음을 접고 비척비척 일어나서 나가니 거실에 펼친 상에 칼칼한 육개장이 차려져 있었다.
이미 식사를 시작한 셋 옆에 앉아 뜨끈하고 매운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배 속이 요동치며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흰밥까지 말아 퍼먹고 나니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이었다.
주방에서 한 그릇 더 퍼와 자리에 앉자 수정이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오빠. 오늘은 제사 갈 거야?”
“할아버지 제사?”
올해는 유난히 시간이 빨리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꼬박꼬박 찾아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친가와 거리가 생겼다.
정확히는 큰어머니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3남 1녀를 두셨는데, 우리 아버지가 막내다.
큰아버지들과 고모 입장에서는 일찍 떠난 막내가 눈에 밟히기도 하셨겠지.
그렇다고 어머니에 대한 비난을 참아줄 이유는 없다.
-남편 먼저 보내놓고 뭐가 잘났다고 뻔뻔하게 찾아와?
그래서 큰어머니가 소리 지른 순간 제사를 지내다 말고 어머니와 함께 그 집을 뛰쳐나왔다.
그 후론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안 가고 우리끼리 따로 차리려고 했는데.”
“우리 아빠가 오라고 그랬어.”
“둘째 큰아버지가?”
내가 탐탁지 않게 대답하자 사촌 누나가 수정이에게 눈빛으로 면박을 줬다.
물론 수정이는 그 눈빛에 가만히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 언니! 돌려서 말한다고 좋은 얘기로 둔갑하는 거 아니잖아! 그냥 깔끔하게 말하는 게 낫지.”
“수정아, 미쳤니?”
“오빠, 잘 들어봐. 큰엄마가 사람이 좀 얄밉긴 한데 큰엄마 때문에 큰집 못 가는 건 이상하잖아. 거긴 큰아빠네 집이기도 하다고.”
“야, 신수정.”
“가만있어 봐, 언니. 솔직히 말해서 오빠가 뭐가 꿀려? 큰엄마가 막말하는 게 나쁜 거지. 피하면 더 기고만장할 사람이야.”
효정 누나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수정이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짝, 소리가 나는 것이 꽤 아파 보였다.
“숙모, 죄송합니다. 재현아, 미안해. 수정이가 말재간이 없어서.”
누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머니에게 사과했다.
어머니는 괜찮다며 자매를 말리더니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그래, 가자. 까짓 거 피할 이유가 뭐가 있니.”
“엄마, 진짜 가게?”
나는 육개장을 그릇째 들이마시다 말고 놀라서 물었다.
“그럼, 진짜지. 그때는 나도 놀라고 겁먹어서 쫓겨나듯 나왔는데, 굳이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의 말도 맞긴 하다.
뭘 잘못했다고 집안 행사에 발도 못 들인단 말인가.
물론 명절에 어머니가 고생 안 하는 건 좋긴 한데, 안 가는 것과 못 가는 건 다르니까.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니 이대로 계속 모른 척 살아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큰어머니에게서 들은 비수 같은 말은 내내 어머니를 괴롭히겠지.
그러니 언젠가 한 번은 당당하게 부딪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머니 스스로가 준비되었다면 더더욱.
나는 육개장 그릇을 내려놓고는 비장하게 말했다.
“가보자.”
한 마디 되받아치지도 못하고 그저 어머니 손을 붙잡고 뛰쳐나오는 것이 전부였던 때와는 다르다.
나는 각오를 다졌다.
***
신 씨 문중의 맏며느리인 임순자 여사는 현관에 들이닥친 일행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근 몇 년간 왕래는커녕 안부 전화조차 없었던 병약한 동서와 조카 신재현이 신발을 벗고 올라서고 있었다.
“형님, 오랜만에 뵈어요.”
“큰어머니. 잘 지내셨습니까.”
못 본 사이 아프다던 막내 동서는 꽤 살이 올라 있었다.
혈색도 좋아 보이는 것이 요즘 많이 나아졌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임순자 여사가 못마땅한 눈으로 흘끔거리자 먼저 와서 있던 둘째 동서가 눈치를 줬다.
신재현에게 있어서는 둘째 큰어머니가 되는 사람으로, 매번 막내네 집을 감싸고도는 사람이었다.
‘형님, 막내 동서 너무 고깝지 보지 마세요. 일찌감치 남편 그렇게 가고, 큰아들까지 연 끊고 나갔는데 얼마나 안됐어요. 친척인 우리가 의지할 곳이 되어 줘야죠.’
둘째 동서는 대낮부터 찾아와 음식을 장만하며 그렇게 달랬다.
물론 임순자 여사는 딱히 막내 동서를 괴롭힐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야 자신이 맏며느리고 상대는 막내 동서니 기를 잡으려고 그랬던 거고.
그다음엔 남편이 죽었는데도 큰집에 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잔소리를 좀 했다.
듣는 사람에게는 평생 잊히지 않을 말이었지만, 임순자 여사에게는 그저 잔소리 조금일 뿐이었다.
남편이 먼저 죽은 것은 며느리의 잘못이니까.
임순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몇 마디 구박했다고 뛰쳐나가다니.
둘째 동서의 간곡한 부탁이 아니었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임순자 여사는 현관에 서 있는 모자에게 툭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에휴, 뻔뻔하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네. 그렇게 뛰쳐나가 놓고 꾸역꾸역 기어들어 와?”
순간 거실에 있던 친인척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둘째 동서가 주방에서 나물을 무치다 말고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형님, 왜 그러세요. 돌아왔으니 보듬어 줘야지요.”
“뭐가 예쁘다고 보듬어?”
임순자 여사는 툴툴거리면서 비켜섰다.
둘째 동서가 얼른 막내 집안의 모자를 얼싸안으며 집안으로 들였다.
“잘 왔어, 동서. 오면서 멀미 안 했어?”
“지하철 타고 와서 괜찮았어요.”
“다행이다. 어이고, 재현이는 못 알아보게 컸네. 정장 잘 어울린다, 야!”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둘째 부부의 인사를 시작으로 친척들이 모여들어 안부를 물었다.
그 모습을 본 임순자 여사의 눈빛이 매서워지자 이번엔 셋째인 신재현의 고모가 얼른 그녀를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임순자 여사를 제외한 다른 가족의 노력 덕분인지 제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일이 많아서 바쁜 것도 있지만 새로 합류한 막내네 가족이 적극적으로 집안일을 도왔기 때문이다.
지방을 모시고 제사상을 치우고 밥을 먹으려 삼삼오오 자리를 잡았을 때 문제가 일어났다.
“일찍 와서 도왔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형님.”
어색한 분위기에서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병약한 막내 동서였다.
“아냐. 아픈 사람이 와 준 것만 해도 고맙지. 제수씨, 편하게 와요.”
집안의 장남이자 큰아버지로서 안쓰러운 마음으로 얘기했지만, 옆에 앉아 있던 맏며느리 임순자 여사는 남편의 발등을 세게 꼬집었다.
그걸 눈치챈 차남, 신재현의 둘째 큰아버지가 얼른 대화를 받았다.
“우리 딸내미가 자주 폐를 끼친다면서요? 귀찮을 텐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효정이랑 수정이가 와줘서 집안이 얼마나 활기찬지 몰라요.”
“아이구, 효정이는 몰라도 수정이는 그 말괄량이가 얼마나 집을 헤집고 다녔을지 생각만 해도 부끄럽네. 동서가 잘 좀 봐줘요. 아직 어려서 망둥이야.”
“어휴, 효정이가 너무 밝아서 부럽던데요. 저희는 아들내미라 칙칙하기 그지없어서.”
여느 집안과 다름없는 친척다운 대화였다.
비록 맏며느리가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고 있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맏며느리 임순자 여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순조로운 대화에 쾌재를 불렀다.
“재현이는 요즘 많이 바쁘지?”
“재현이 못 본 사이에 많이 어른스러워졌더라. 아까 보고 깜짝 놀랐어.”
“에이, TV에서 자주 보는데 놀라긴 뭘 놀라.”
“여보. TV에서 본 거랑 실물이랑 다르지. 화면발이라는 말도 있잖아. 재현이는 TV보다 실물이 더 훤칠하고 멋있어.”
“그치? 나 학교에서 신재현이 사촌 오빠라고 자랑하고 다닌다니까? 아, 말 나온 김에 오빠, 사인 좀 해주면 안 돼?”
모인 친인척 중 가장 어린 신수정이 장난스럽게 말하다 다시 등짝을 맞고 말았다.
“오빠한테 신재현이 뭐니? 너 설마 숙모 댁 가서도 그러고 다니는 거 아니지?”
“아, 괜찮아요. 형님. 애들 나이도 비슷한데 그럴 수 있죠.”
마지막으로 다 함께 모였던 친척 모임이 맏며느리의 막말로 파투났던 걸 생각하면 꽤 성공적인 저녁이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장손, 신태현도 슬쩍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혹시 다음에 기업체도 칠 거야?”
“탈세 정황이 보이면 아마 치겠지.”
“그럼 혹시 새전 그룹에 조사 나올 일 있으면 미리 알려 주면…… 안 되겠지?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신태현이 질문하다 말고 아차 한 얼굴로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미안하다는 뜻이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새전이라는 대기업에 입사해 친척들 사이에서 주목을 잔뜩 받는 장손이었다.
임순자 여사에게는 어디다 내놔도 꿀리지 않는 소중한 외동아들이었고.
그런 아들이 신재현에게 약한 소리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
임순자 여사는 못마땅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냈다.
“공무원 그게 대수인가? 평생 해 봤자 기껏해야 6급? 잘해야 5급이라며. 월급도 박봉이고 잘못하면 지방 날아가잖아. 그거 뭐 하러 해?”
밥상머리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당황한 친척들이 뭐라 수습할지 고민할 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엄마! 그런 말을 왜 해!”
장손인 신태현이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신재현의 눈치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