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70화 (170/500)

170화. 보이지 않는 뒤에서(2)

-쪼르륵.

작은 잔에 투명한 액체를 따라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피곤에 찌든 상태에서 알코올이 들어가자 금방 술기운이 올라왔다.

뇌가 노곤하게 녹는 느낌이 들고 긴장이 확 풀렸다.

소주 특유의 역한 알코올 냄새도, 씁쓸한 뒷맛도 더없이 황홀하게 느껴졌다.

비싼 술 다 필요 없다.

지금 이 순간, 이 소주 한 잔이 최고다.

“천천히 마셔요. 피곤한 상태에서 달리면 금방 뻗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선균은 빈 잔에 소주를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한입에 털어 넣기 좋도록 딱 7부 선까지만 채운 잔이었다.

“그동안 이게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나와 이선균 사이에는 돼지고기 한 판이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팀원들과 함께 오면 좋았겠지만, 그들은 단칼에 거절하고 퇴근했다.

과장인 이선균과 함께 먹기엔 부담스러워서인지, 아니면 나와 이선균이 편하게 먹으라고 배려해준 건지는 모른다.

아니면 이런 것 자체가 내 괜한 걱정이고, 정말 퇴근하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조사 대상은 넘쳐나고 일은 쌓여 있고 싸움에 휘말려 도움도 못 받고.

말은 안 했어도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을 것이다.

아무리 세무직이 야근이 많고 힘든 직렬이라지만 서울청 와서는 꽤 고생했으니.

그래서 회식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밥이야 아무 때나 먹으면 되니까.

나는 반쯤 익은 돼지고기를 뒤집었다.

고기 익는 냄새와 함께 지글거리는 소리가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익는데 걸리는 시간 겨우 몇 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선균은 허허 웃으며 양파와 버섯을 불판 아래쪽에 올렸다.

“그 심정 이해합니다. 깔끔하게 일을 끝내고 먹으면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한지. 취해도 걱정 없겠다 싶죠.”

나는 가위를 들어 항정살을 자르며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일이 남아 있으면 술을 먹어도 제대로 취하질 않더라구요. 마음 한편에 찝찝함이 남아 있어서 그런가.”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사무실로 돌아가서 쌓여 있는 일거리를 생각하고 있죠. 앞으로 며칠 더 야근해야 끝날까, 하면서요.”

“오! 과장님도 저랑 비슷하시네요. 다음날 일하면서 계산 실수할까 봐 술도 마음껏 못 마십니다. 전 서울청 오고 나서 조사 기간에는 아예 술은 입에도 안 댔어요.”

나도 사람인지라 어지간히 술이 당길 때가 있다.

조사하다 보면 ‘이거 뭔가 숨기는 것 같다.’라고 감이 올 때가 있는데, 극구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을 볼 때나 민원실에서 난동부리는 사람을 볼 때, 그리고 세금 내기 싫어서 끈덕지게 들러붙는 악성 민원인을 볼 때였다.

게다가 이 정도면 양반이다.

동료 직원 중에서는 네가 뭔데 세금을 매기냐며 납세자에게서 욕을 먹은 사람도 있었다.

민원실에서는 한 달에 한 번은 우는 사람이 나왔다.

멘탈 약한 직원은 ‘사적 비용은 부가세 매입세액공제 안 돼요’라고 전화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부과를 포기한 적도 있었다.

세무서에서 부과를 포기하면 어떡하냐고 물었더니 ‘부가세 몇십만 원에 욕먹느니 안 하는 게 나아요. 탈세 심각하면 조사과에서 가져가겠죠, 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럴 땐 술과 담배가 절실하다.

그렇다고 술을 퍼마실 수도 없는 게, 다음날 숙취 때문에 멍한 정신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가 숫자를 잘못 적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술을 멀리했더니 자연적으로 담배만 늘었다.

“조사 기간에는 사리는 거 좋은 습관입니다. 차라리 조사 끝나고 마음껏 마시는 게 나아요.”

그렇게 말하는 이선균 역시 깔끔하게 술잔을 비우고는 말을 이었다.

“세무직은 면직률이 높은 직렬이에요. 신재현 팀장도 일 해봤으니 이미 이유는 잘 알 겁니다.”

면직률이 높다, 즉 스스로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고시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인생을 할애해서 한 공부인데, 그 시간과 돈과 경력을 모두 버리고 나올 만큼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담배가 많이 늘었습니다.”

내가 반쯤 장난기를 섞어 웃으며 말하자 이선균이 정색했다.

항상 웃는 낯인 이선균치고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아까는 술을 자주 안 마신다고 해서 좋아했더니, 담배로 풀고 있었군요. 스트레스를 푸는 건 중요하지만 술과 담배로 해결하는 건 안 좋아요.”

“몸에 안 좋은 건 알고 있습니다. 끊어야지, 하는데 도저히 안 되네요.”

녹슨 것처럼 뇌가 삐그덕거린다는 생각이 들 때, 니코틴 한 방의 효과는 굉장하다.

뿌옇게 낀 안개가 걷혀나가듯 뇌 주름 구석구석에 윤활유가 도는 느낌이다.

물론 폐는 죽는다고 소리치지만.

“단번에 끊으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줄여봐요. 이 일 오래 해야 하는데 몸이 축나면 씁니까.”

“언젠가 끊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금연해보겠습니다.”

요즘 쌀쌀한 아침에 잔기침이 늘어서 나도 나이를 먹나 싶던 참이다.

20대 초반에는 밤을 새워도 멀쩡했는데 요즘엔 퇴근하면 바로 씻고 잠들기 일쑤였다.

담뱃값도 부담스럽고.

이선균은 내 결심을 듣더니 반가워하며 활짝 웃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몸이 재산이에요. 특히나 신 팀장은 남들보다 배는 일하지 않습니까.”

“에이, 배는 아닙니다. 조사국도 매일같이 야근하는데요.”

“일을 만들어서 하는 거 다 압니다. 같은 과에도 있었는데요.”

나는 머쓱하게 웃고는 다 익은 항정살을 잽싸게 그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 사이 이선균은 굽고 있던 버섯과 양파를 뒤집었다.

삼겹살 기름에 표면이 노릇노릇하게 익어 있었다.

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고기를 집었다.

딱 먹기 좋게 익었는데 이야기한답시고 더 놔뒀다간 타게 생겼다.

소중한 고기를 타게 둘 순 없지.

나는 이선균이 먼저 먹는 것을 확인하고 내 앞에 있던 두툼한 항정살 한 점을 집었다.

기름기가 많아서 많이 먹으면 느끼하지만 빈속에 기름칠하기엔 딱 좋은 부위다.

맑게 찰랑이는 소주 한 잔으로 입 안을 헹군 후, 알코올 향이 사라지기 전에 고기 한 점.

“크어. 진짜 살 것 같네요. 이게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게 바로 행복이지.

불판 위에는 아직도 고기가 한가득이라는 사실에 침이 고였다.

나는 정신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저는 신 팀장의 업무 방식에 대해서는 이제 딱히 터치 안 합니다. 신 팀장은 자신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수없이 증명해왔으니까요. 신 팀장이 하고자 하면 저와 국장님은 어떻게든 도와드릴 겁니다.”

이번에도 알게 모르게 뒤에서 힘써준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처음 명단에서 지금 내가 쳐도 되는 놈들을 구분해 준 것은 당연히 날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서울청장이 김상민 국장을 조용히 처리하려 했을 때 민치호 국장이 직접 서울청에 행차한 것도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내가 김상민의 처벌을 원했기 때문에.

민치호 국장이 어떻게 서울청장을 설득하고 움직였는지는 모른다.

그 뒤에서는 수많은 머리싸움이 오갔을 것이고 그 안에는 나에 대한 배려가 있었을 것이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따로 말씀 주지 않으셔도 많이 신경 써 주시는 것 압니다. 과분할 정도로요.”

평소라면 오글거려서 못 했을 말이다.

아직 반병밖에 먹지 않았는데 이런 말이 내 입에서 쉽게 나오는 걸 보면 어지간히 피곤이 쌓였나 보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왕 말 나온 김에 조금만 더 술기운을 빌려 보기로 했다.

“뒤에서 애써주시는 만큼 얼른 성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공격해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요.”

지금도 나 하나 때문에 민치호 국장과 이선균 과장이 감수하는 것이 많다.

일이 터지면 수습해야 하고 때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에는 거래와 협상도 오고 간다.

어느 쪽이든 내가 끼어들 자리는 아니므로 당연히 이 모든 수고는 두 상사의 몫이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이선균은 잔을 든 채 눈을 깜빡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부터 독립하겠다는 선언입니까? 그건 좀 곤란한데요.”

“아니,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압니다. 무슨 마음으로,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알아요.”

이선균은 손에 든 잔을 비우더니 말했다.

“신 팀장은 조바심이 나는 거잖아요. 멀리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칠 수 없는 놈들이 널려 있으니까.”

“네…… 맞습니다.”

나는 서롱 갤러리의 세무조사에서 얻은 명단을 떠올렸다.

그중 우리가 지금 칠 수 있었던 것은 민치호 국장이 표시해준 22명 뿐이었다.

실적을 쌓고 경험을 쌓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서울청의 TF팀이 되어서도 못 치는 사람이 있다니.

봉우리 하나를 등산했더니 그 옆에 더 높은 봉우리를 발견한 느낌이다.

“조바심내지 말아요. 신 팀장은 겨우 2년 만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걸 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뭐, 물론 천재는 가능하겠죠. 하지만 우리는 천재가 아니고, 천재를 바라지도 않아요.”

“예, 알고 있습니다. 천재가 아니니 부지런히 달리는 수밖에 없죠.”

믿어주는 사람들, 그리고 팀원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달려야만 한다.

“작년, 재작년 같으면 부지런히 달리라고 채찍질하겠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신 팀장은 어깨의 힘을 조금 뺄 필요가 있어요.”

“아직 갈 길이 멀지 않습니까?”

“갈 길이 멀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간은 빠르게 달릴 필요가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1차 목표였던 서울청 TF팀은 이루었어요. 신 팀장은 여기서 서울 각 지역에서 들어오는 케이스를 보고 경험을 쌓으면 됩니다.”

“제가 여기서 우선적으로 둬야 할 게 경험 쌓기라는 말씀이신 거죠?”

“겸사겸사예요. 탈세범 잡아서 조세 정의도 구현하고 경험도 쌓고. 그러니 조급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 서울청에서 보내는 시간 모두가 신 팀장의 바탕이 될 겁니다.”

내가 마음이 급했던 걸까.

정말 이대로면 괜찮은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이선균은 고기를 뒤집고 술을 한 병 더 시켰다.

“신 팀장에게만 맡겨둔 짐 아닙니다. 장거리 마라톤이라고 생각하고 완급 조절해서 달려요. 나중에 국세청 가게 되면 말하지 않아도 달리게 해줄 테니까. 벌써부터 전속력으로 달렸다가 나중에 지쳐도 곤란합니다.”

이선균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익은 고기를 불판 주변으로 밀었다.

이번엔 목살이었다.

생각에 빠져있었다고는 해도 윗사람에게 집게를 맡기다니.

나는 얼른 고기를 뒤집었다.

“말씀 감사히 듣겠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열심히 달려서 속도 조절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는데, 힘을 아껴놓겠습니다.”

그제야 이선균은 만족한 듯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세무직은 안 그래도 힘든 직렬입니다. 일과 사생활을 잘 분리하세요. 집에서도 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이선균은 의심하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나는 얼른 부인했다.

“이건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집에 가면 회사 생각은 딱 끊어버립니다. 집에서는 쉬는 것만 생각해요.”

“음? 그건 아주 잘하고 있네요. 어디서 배운 겁니까? 아니면 혼자 터득했나?”

“예전에 사기업 총무팀에 있을 때 배웠습니다. 거기 경리가 사무실에서 나가는 순간 회사는 잊어버린다고 하더군요. 집에 가서까지 일 생각하면 야근하는 기분이 든다구요.”

이선균이 허허 웃었다.

“그럼 이제 더는 걱정거리가 없군요. 일도 끝났겠다, 잔소리도 다 했고요.”

이선균은 새로 딴 소주로 잔을 채워 주었다.

막 냉장고에서 나온 소주의 시원함이 잔 너머로도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민치호 국장님께서는 다음 청장으로 누구를 밀지 결정하셨습니까?”

슬슬 국세청장의 임기가 끝날 거라는 소문은 외딴섬이나 다름없는 우리 팀에도 들려왔다.

민치호 국장이 선택할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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