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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167화 (167/500)

167화. 남은 3명(3)

나는 보란 듯이 화면을 가리켰다.

이양규라는 이름의 상세정보 칸에는 정확히 그의 주민등록번호와 집 주소가 쓰여 있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세무사사무실은 함부로 자료를 삭제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몇 년 전에 거래가 끊긴 거래처의 전산 자료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세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애써 만들어 둔 것을 삭제하려니 아까워서 그런 것인지, 5년간 무조건 보관해야 하는 법 때문인지.

나중에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무서워 보험 격으로 남겨 둔 건지.

어찌 되었든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국회의원의 자료를 발견했다는 것과 이 근무세무사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세무사님. 분명히 없다고 하셨는데요.”

“어, 없는 줄 알았어요.”

“본인 거래처고 세무사님이 계속 관리해 오셨을 텐데 없는 줄 알았다구요?”

말이 안 되는 변명이지만 이건 그렇다 치고 더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아까는 그냥 넘어갔는데, 세무사사무실에 전산 자료가 없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실물 자료는 정리해서 거래처로 보냈더니 거기서 관리 실수로 불탔다 칩시다. 그럼 세무사 사무실은요?”

나는 사무실을 훅 둘러보았다.

불탄 곳도 없고 자연재해를 입은 것도 아니다.

아주 멀쩡한 사무실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모든 자료를 파기했다면 그것 자체로 이상하다고 시인하는 꼴 아닙니까?”

“왜, 뭐가 이상하죠?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겁니다. 전산 자료도 관리 실수로 프로그램에서 안 보이게 되었을 수도 있죠.”

“세무사님, 저랑 말장난해도 소용없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세무사님이 의도적으로 자료를 숨겼으며 조사를 방해했다는 것밖에 안 되니까요. 그게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말장난이라뇨! 정말로 없어서 없다고 한 겁니다!”

“저희는 세무사님을 탈세의 공범으로 볼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세무사 시험에서 조세범 처벌법 같은 건 공부 안 하십니까?”

순간 근무세무사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벌렸다.

“거기서 조세범 처벌법이 왜 나와요?”

“당연히 나오죠. 세법을 모르는 일반인의 탈세보다, 세법을 잘 알면서 탈세를 돕는 전문가가 더 큰 벌을 받습니다. 아실 텐데요?”

근무세무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탈세를 돕기 위해 고의로 숨겼거나, 장부 보관 의무를 소홀히 했거나 둘 중 하나겠죠. 아, 전산 자료도 보관 대상인 건 알고 계시겠죠? 세무사님이신데.”

“자, 장부 보관을 못 한 겁니다! 잘 몰라서!”

당연히 그렇게 밀고 나가고 싶겠지.

하지만 쉽게 빠져나가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딱 봐도 고의로 프로그램에 숨긴 게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숨긴 방법은 세무 프로그램을 많이 써 봐야 아는 것이다.

보통 세무공무원은 세무 프로그램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니 조사하러 나와도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허다하다.

컴퓨터 서버를 통째로 뜯어가서 분석하면 몰라도.

아까 근무세무사가 말했듯 다른 납세자의 정보도 있는데 합당한 이유 없이 우리가 함부로 컴퓨터를 뜯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장담하는데, 조사 좀 많이 해 본 팀이 아니라 일반적인 조사팀이 나왔으면 이 자료는 못 찾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생각할수록 악질이다.

“제 생각에는 전자일 확률이 높다고 보거든요. 폴더 이름 바꾸려면 서버 컴퓨터에서 손대야 하는데, 실수로 이양규 의원 폴더만 이름을 바꿨다? 차라리 해킹 당했다고 하지 그러십니까.”

경력도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근무세무사가, 이런 상황에 임기응변을 발휘할 리 없다.

근무세무사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어차피 저 사람과는 처음부터 제대로 대화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을 찾았다.

“대표 세무사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까?”

“지금 상담 중이신데…….”

대답한 것은 막내 직원이었다.

과연 세무사 방의 문이 닫혀 있다 했더니 손님이 있었구나.

그렇다면 일이 좀 더 쉽게 풀릴 것 같다.

“실장님, 선택지를 드리지요. 지금 제가 저 문을 열고 들어가서 대표 세무사님께 탈세를 도운 자초지종을 캐묻는 것, 아니면 지금 실장님께서 이양규 의원의 자료를 챙겨주시는 것. 어느 쪽이 좋겠습니까?”

방에서 상담 중인 손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내가 들어가서 탈세 운운하는 순간 그 상담은 파투날 것이다.

그리고 손님의 입에서 이 사무실에 대한 소문이 퍼지겠지.

이번엔 근무세무사가 말을 잘라먹지 않았다.

실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의원님 자료를 넘겨드린다고 저희 평판이 멀쩡하겠습니까? 거래가 끊어지는 건 물론이고 잘못하면 소송도 당할 텐데요.”

“이게 고민하실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얼마나 꼭꼭 숨겨두셨든 털면 나옵니다. 서로 시간을 아끼자는 말인데 이게 거래처럼 들리셨나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실장이 긴장하며 내 말을 기다렸다.

“저희가 직접 찾아내면 세무사사무실의 적극적인 탈세 방조.”

“……잠시만 기다리세요.”

실장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구석에 있던 캐비닛을 열었다.

앞에 세워둔 책자를 꺼내자 그 뒤의 공간에 꾹꾹 눌러 넣어둔 서류 봉투가 몇 개 나왔다.

“소득세 신고 부속 자료입니다. 영수증의 경우 사무실 공간이 부족해서 의원님 사무실로 보낸 게 맞아요.”

“주고받은 메일하고 메신저, 거래처 폴더에 보관하고 있는 파일들도 주세요.”

실장은 군말 없이 근무세무사의 자리로 가서 컴퓨터를 열었다.

근무세무사가 펄쩍 뛰기에 내가 몇 마디 보탰다.

“음? 뭐 얼마나 대단한 자료가 있는데 세무사님이 극구 반대하시죠? 지금 안 주셔도 나중에 다 자료 받을 수 있는 거 아시죠?”

시간이 걸리고 귀찮기야 하겠지만 검찰 통하면 방법은 있다.

메일은 해당 회사에 요청하면 볼 수 있고, 컴퓨터 안에 있는 자료도 삭제한 건 복구할 수 있으니.

세무사 역시 거기에 생각이 닿았는지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다.

실장은 한참 동안 무언가를 뽑더니 두꺼운 책 한 권 정도 될 만한 분량을 인쇄해 건네주었다.

“주고받은 메일을 포함해서 저희가 갖고 있는 모든 자료입니다. 이 정도면 될까요?”

“감사합니다. 세무대리인 측의 적극적인 협조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팀원들이 먼저 빈 상자를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가장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가려던 나는 뒤돌아서 근무세무사에게 말했다.

“실장님께 감사하세요. 세무사님 방금 자격증 날아갈 뻔했습니다.”

의뢰인을 지키는 세무대리인, 말은 좋지.

그렇다고 탈세까지 도와줘 가며 국세 행정을 방해하는 거라면 그런 세무대리인은 필요 없다.

나중에 경력 차서 더 큰 탈세를 돕기 전에, 차라리 지금 쳐서 자격 정지의 쓴맛이라도 보여줄까 했다.

의뢰인 핑계 대고 머리 굴려서 탈세나 돕는 놈이라면 나중에 유진환처럼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저 겁먹은 표정을 보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모양이다.

입술을 파르르 떠는 근무세무사를 뒤로 하며 우리는 사무실을 나섰다.

***

제2야당의 초선의원 이양규는 자신의 의원 사무실에서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처음 유진환이라는 놈에게서 전화를 받았을 때는 이게 웬 개소리인가 싶었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동문의 보좌관이란다.

다음에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유력한 후보자!

이양규는 지금이야 제2야당 소속이지만 국회의원이 선거 전에 당을 갈아타는 경우는 흔하다.

더군다나 발언권 없는 거수기에 불과한 초선이니 더더욱 줄을 잘 잡아야 했다.

“이야, 그건 그렇고 신재현 그놈 진짜 막 나가네. 진짜로 날 치려고 했다 이거지?”

유진환의 전화를 받고 바로 믿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신재현은 진짜로 국회의원을 친 전적이 있다.

작년에 친 것이 2선이었으니 초선인 자신 정도면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국회의원을 이렇게 막 쳐도 되는 거야? 국민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이양규는 의자를 빙글 돌리며 자신을 타겟으로 삼았던 젊은 세무공무원을 욕했다.

일개 세무공무원이 건드릴 정도로 국회의원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는 한탄과 함께 그 세무공무원의 자만심에 대해서였다.

“하동문 의원님이 대통령 되시면 게임 끝나는 거야. 신재현, 너는 너무 설쳤어. 상황을 봐가면서 나댔어야지.”

하동문이 정말로 깨끗한 자라면 보좌관을 통해 미리 자신에게 탈세 조사 정보를 줬을 리 없다.

그리고 신재현은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물어뜯는다.

아마 그것은 하동문이 대통령이 된 후여도 변치 않을 것이다.

하동문의 꼬라지를 보건대 그가 앉힐 인사는 구린 놈들일 테고, 그걸 신재현이 가만히 보고 있을까?

그러니 하동문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신재현 쳐내기가 될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혈기 넘치는 세무공무원은 불쌍하면서도 어리석어 보였다.

“사람이 너무 깨끗하기만 해도 못 써. 어느 정도 진창을 밟을 줄도 알아야 길을 걸을 수 있는 법이야.”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운이 좋았다.

신재현의 타깃이 되고도 살아남았으니.

TV에서 국세청이 어쩌고, 조사 대상이 어쩌고 할 때 좀 불안하긴 했지만 결국 승리자는 자신이다.

하동문 의원의 귀띔으로 미리 손을 써 뒀고, 자료 부족으로 당분간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국회의원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섣불리 건드리려다가 역공을 당하기 쉽기 때문에 확실한 자료 없이는 과세하지 못할 것이다.

몇 년 후에는 또 새로운 증거가 쌓일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이미 하동문이 대통령이 된 후다.

자신은 위기를 잘 피해낸 것이다.

“으하하! 역시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해. 뭐하러 고생하면서 착하게 살아? 착하게 사는 놈들이 다 병신이야!”

이양규가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며 다리를 뻗을 때였다.

-똑똑똑.

이양규는 ‘국민에게 헌신하는 국회의원’답게 자세를 바로 하고 넥타이를 조였다.

“네, 들어오세요.”

사무실로 들어온 것은 이양규의 비서가 아닌 익숙한 얼굴의 청년이었다.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

피해갔다고 생각했던 저승사자.

“시, 신재현!”

“네, 의원님. 알아봐 주셔서 영광입니다. 서울지방국세청의 신재현이라고 합니다.”

예의 바른 인사와 함께 신재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또 다른 공무원 한 명과 대동한 상태였다.

신재현의 주특기인 기습 조사라면 줄줄이 사탕처럼 부하들이 상자를 들고 쳐들어왔을 것이다.

신재현의 뒤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이양규는 표정을 풀었다.

“어이구, 유명 인사께서 제 사무실을 찾아주셨으니 제가 더 영광이죠.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아니요, 지나던 길에 잠깐 들린 거라서요.”

슬쩍 떠보려고 했으나 그 전에 신재현의 말투에서 이양규는 무언가를 느꼈다.

지나던 길이라면 자신에게는 별 볼 일이 없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역시 세무조사 때문은 아닐 것이다.

“신 팀장님께서도 많이 바쁘실 텐데 일부러 들려주셨으니 바로 용건을 듣겠습니다. 설마 인사차 오신 것은 아닐 테고요.”

“인사차 온 것이 맞습니다. 다른 분들께서는 요청에 따라 청에 출석해 주셨는데 의원님께서는 출석하질 않으셔서요. 바쁘신 것 같으니 제가 직접 찾아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 제가 가도 소용없어서 안 간 겁니다. 슬프게도 자료가 모두 타서 소실되었지 뭡니까? 저도 정말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알면서 서로를 떠본다.

이양규는 이 대화에서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

‘조사는 실패했고 더 손 쓸 도리가 없어서 내게 경고하러 온 거야! 분명해!’

애써 표정관리를 했지만 이양규의 입꼬리가 실실 올라갔다.

이양규는 웃음을 참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팀장님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군요. 슬슬 몸을 사리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신재현은 가만히 이양규를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못 참겠다 이거냐? 그래 봤자 넌 공무원이야! 경고는 내가 너한테 해야지!’

이양규가 뭐라 경고를 날릴까 고민하고 있을 때 신재현이 문득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뭡니까?”

“지나던 길에 들렸다고 했잖습니까. 의원님의 조사는 다 끝나서요. 고지서만 전달하면 끝나는 문제라, 대체 어떤 분인데 출석도 거절하셨나 싶어 한 번 보러 와 봤습니다.”

이양규가 어리둥절하며 봉투와 신재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고지서요?”

이양규는 화들짝 놀라 봉투를 받아들었다.

발신인에 서울지방국세청이 찍힌 연초록빛 봉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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