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선을 넘었어 (4)
-드르륵
조사 2국장 김상민은 책상 서랍 윗칸을 열어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는 봉황이 새겨진 두 개의 도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금속 특유의 묵직함에 날카로운 은빛이 감도는 인감도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상아색의 결재인이었다.
언뜻 봐도 값싼 것은 아니라는 티가 나는 물건이었다.
“백금에 상아라. 뭘 좀 아는군.”
2국장은 행여나 손때가 묻을까 싶어 도장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서랍을 밀어 닫았다.
며칠 전 국장은 드디어 유진환을 만났다.
생각 같아서는 바로 하동문 의원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국회의원이 얼마나 바쁜지는 국장도 잘 안다.
다음번에는 의원님을 뵙길 바란다는 말에 유진환은 작은 케이스를 내밀었다.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국장님께서는 앞으로 이름을 떨칠 분이시니 그에 어울리는 도장을 쓰셔야지요.’
국장은 한눈에 도장의 재료와 가격을 파악했다.
이것은 당연히 뇌물이다.
그리고 자신을 길들이려 한다는 것도 알았다.
다짜고짜 현금을 주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 작은 물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국장은 그것을 알면서도 받았다.
‘어차피 붙기로 한 이상 확실하게 붙는다. 대선주자가 있는데 국세청 같은 좁은 물에 연연할 필요가 없지.’
정보도 줬고 도장까지 받은 이상 빼도 박도 못하고 한편이라는 것을 어필했다.
이제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서 가치를 올릴 차례였다.
‘그럼 일단 신재현을 깔끔하게 눌러야겠군.’
마침 2국장이 부른 국장들이 하나둘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일이 커진 것 때문인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김상민 국장님. 권 팀장과 제대로 얘기가 끝난 것 맞습니까?”
3국장은 들어오자마자 2국장을 질타했다.
“권 팀장이 지금 조사국의 협력을 다 거절하고 있는 거 아시죠? 2팀과 똑같은 조건에서 일하겠다고요. 팀장 하나 간수 못 하면서 뭘 하시겠다는 겁니까?”
노골적인 비난에 김상민 2국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필요했기에 끌어들이긴 했지만, 이제 김상민의 눈에 지방청의 국장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김상민은 즉시 맞받아쳤다.
“그럼 3국장님이 다뤄보시지 그러셨습니까?”
“무슨 말이 그렇습니까? 어디까지나 2국장님이 도와달라고 해서 우리가 거든 것 아닙니까.”
“제가 총대를 멨을 뿐이지요. 여기 계신 국장님들도 다들 신재현을 눈엣가시로 여기지 않으셨습니까. 언젠가 한 번은 밟아둬야 한다고 말씀하신 건 다름 아닌 3국장님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 신재현만 밟는 게 아니라 청이 시끄러워졌잖아요! 청장님이 아시면 우릴 가만 두시겠습니까!”
3국장의 외침에 김상민은 코웃음을 쳤다.
“청장님이 몰라서 내버려 두는 거겠습니까? 3국장님은 아직도 청장님을 모르시는군요. 우리가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청장님이 봐주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마음 놓으시고 좀 더 확실하게 2팀을 밟으세요.”
책임을 묻는 3국장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인지 김상민의 말투는 시종일관 날카로웠다.
게다가 명령조이기까지 하자 가만히 있던 1국장까지 나서서 김상민을 제지했다.
“2국장. 말씀이 과하십니다. 우리는 2국장의 명령을 듣는 위치가 아닙니다. 청을 위해서 필요하다기에 도움을 드린 것뿐이죠.”
“그럼 이제 와서 빠지시겠습니까?”
“이야기가 왜 그리로 튑니까? 2국장, 요즘 들어 사람이 이상해졌어요.”
국장들 사이에서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날 선 분위기를 깬 것은 4국장이었다.
4국장은 본격적으로 2국장의 편을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리지도 않았다.
한 발짝 물러서서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이제는 성실납세국까지 껴서 청이 양분되게 생겼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 그만두면 꼴이 우스워집니다!”
“이미 우스워지셨습니다. 조사국의 도움 없이도 2팀은 조사를 끝낸 모양이던데요.”
“벌써 끝냈다고요?”
2국장의 눈동자가 살벌해졌다.
“오면서 보니 기자회견 준비 중인 것 같았습니다. 서울청에서 기자회견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4국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김상민에게 찬동했던 나머지 두 국장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좀 더 일찍 발을 뺐어야 했네요.”
“1국장님. 지금 이 상황에서 물러나면 직원들이 우습게 볼 겁니다!”
김상민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말했으나 1국장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청을 전쟁터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다음 기회를 기약하세요.”
1국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머지 국장들도 따라서 일어났다.
김상민은 으득 이를 갈았다.
“지금 이렇게 가시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겁니다.”
김상민의 반응에 당황한 것은 다른 국장들이었다.
“2국장님, 요즘 정말 이상합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무슨 일이 아니라 신재현을……!”
김상민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려고 할 때 문득 국장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뭐 하는 짓이냐, 들어가야겠다, 이런 고함이 국장실 안까지 여과 없이 들렸다.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잠시만요.”
익숙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린 후에 국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청년은 안에 있던 4명의 국장을 보더니 눈에 이채를 띠었다.
“신 팀장은 이제 위아래도 모르나? 어디 국장실을 노크도 없이 함부로 열어?”
김상민이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김상민 국장님께 꼭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먼저 왔습니다만…… 다른 국장님까지 계실 줄은 몰랐군요.”
“신재현 팀장, 자네의 이런 태도가 2국장을 화나게 만든 거네. 아무리 자네가 불합리한 일로 화가 난다 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지.”
1국장이 나무라듯 말하자 신재현은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세 분 국장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아니, 그 인사가 아니라 예고도 없이 국장실을…….”
훈계조로 얘기하던 1국장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 세 분?”
“이왕 뵌 김에 세 분 국장님께도 여쭙겠습니다. 국장님들께서는 김상민 국장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손을 잡으셨습니까?”
억울함을 토로하러 온 것이라 생각한 1국장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 팀장에겐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청의 질서를 지키는 것도 국장의 일이야. 안 그래도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잘 되었군.”
“경청하겠습니다.”
1국장은 조금도 동요가 없는 신재현을 지긋이 응시했다.
국장급 회의 때도 느꼈지만 난 놈은 난 놈이었다.
‘성격만 좀 죽이면 좋을 텐데. 역시 지금 상태에서는 우리 청에 어울리긴 어려워.’
1국장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2국장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자네는 그 막 나가는 성향을 고쳐야 해. 지금 이 자리에서 2국장에게 사과한다면 내가 둘 사이를 중재하지.”
1국장으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까마득한 아랫사람과 국장의 사이를 중재한다니.
게다가 요구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고개만 숙이면 조사국과의 불화가 모두 해결되는 것이다.
“1국장님! 저는 사과 받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럼 언제까지 끝도 없는 싸움을 계속할 겁니까! 여기선 2국장이 윗사람답게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세요.”
김상민은 씩씩거리며 신재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신재현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신재현의 고개는 여전히 빳빳했다.
“국장님의 배려, 감사합니다. 저도 원만히 해결하고는 싶었습니다만 김상민 국장이 선을 넘어서요.”
“신 팀장! 2국장에게 그 무슨 말투인가!”
신재현이 중재를 거절하자 난감해진 것은 1국장이었다.
그는 노호성을 터뜨렸다.
“신재현! 숙일 줄도 알아야 해!”
신재현은 가만히 1국장을 쳐다보더니 오히려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1국장님께서 청을 생각하고 저를 생각하시는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청장님께서도 허락하신 사안입니다.”
“청장님이 뭘 허락했다는 건가?”
1국장은 신재현에게서 스멀스멀 풍겨오는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
신재현은 휙 고개를 돌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김상민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외쳤다.
“김상민 국장! 당신은 뭘 얻고 싶은 겁니까! 저를 밟고, 법을 어기고, 손을 더럽혀서 대체 뭘 이루고 싶었던 겁니까!”
“이 미친 새끼가!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야! 청장님이 가서 따지라고 허락하셨는지는 몰라도 국장한테 그따위로 하란 뜻은 아니셨을 텐데!”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김상민!”
신재현은 독기가 가득한 눈으로 김상민을 훑으며 소리쳤다.
이에 놀란 것은 다른 국장들이었다.
“신 팀장, 자네 무슨 짓이야! 아무리 화가 나도 국장이야!”
“김상민은 지금 이 시간부로 국장이 아닙니다!”
신재현은 거친 손길로 종이를 내밀었다.
가장자리가 구겨진 종이를 펼치자 나온 것은 김상민에 대한 인사 발령서였다.
“보, 보직 해임? 청장님이 2국장을 보직 해임 하셨다고?”
“뭐라고요? 이리 주세요.”
김상민이 헐레벌떡 달려와 1국장의 손에서 빼앗다시피 하며 종이를 건네받았다.
그러나 글자가 바뀔 리는 없었다.
“너, 너 이 새끼! 청장님 옆에서 알랑거리더니…… 네가 날 모함했지!”
김상민이 덥석 신재현의 멱살을 잡았다.
꽤 거친 손길이었지만, 그 누구도 김상민을 말릴 수 없었다.
당장 2국장이 보직 해임당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무언가 잘못된 것이란 생각이 국장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 이유가 뭔가?”
1국장이 황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신재현은 국장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김상민의 손을 콱 잡았다.
그리고 멱살을 잡은 손을 조금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멱살 잡고 복도로 냅다 던져 버리고 싶은데 지금 참고 있는 중입니다. 이유는 김상민, 이 작자가 아주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말을 해 줘야 알 것 아닌가! 신 팀장, 2국장! 둘 다 진정하고 떨어지게!”
1국장에 이어 4국장까지 달려들어 둘을 떨어뜨렸다.
신재현은 순순히 김상민의 손을 놓고 물러났지만 김상민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비켜! 지금 당장 청장실로 갈 테니까! 내가 직접 말해야겠어!”
“청장실로 가봤자 소용없습니다!”
“신재현, 이 새끼가!”
신재현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듯 한차례 주먹을 꽉 쥐었다 푼 뒤, 리모컨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국장들이 물러났다.
신재현은 TV를 켜고 어느 한 채널에 맞춘 후 소리를 키웠다.
“뭐야, 청장님이잖아.”
“오늘 기자회견은 청장님이었어?”
수군거리는 국장들에게 설명하듯, TV 속의 청장이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에 책임을 통감하고, 즉시 조사 2국장 김상민의 보직을 해임함과 동시에 검찰청에 고발을 진행하였습니다. 철저한 조사와 무관용 원칙으로 사건을 투명하게 밝혀내 한 점 숨김도 없이 일벌백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 증거로 이 모든 과정은 특수조사 2팀, 즉 신재현 팀에게 일임하였습니다.
청장의 침통한 목소리가 국장실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국장들이 입을 쩌억 벌리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2국장님, 대체 뭘 했는데 청장님이 저러는 겁니까?”
국장들의 질문에 김상민은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라고요! 이건 저 망나니 새끼가……!”
“그만 좀 하세요!”
김상민의 말을 막은 것은 신재현이었다.
그는 한 대 칠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가 깊은 심호흡과 함께 김상민의 팔을 붙잡았다.
김상민이 화들짝 놀라 팔을 빼려 했지만 어찌나 힘을 줬는지 미동도 없었다.
“조사 정보를 유출해 조사를 무산시켜놓고, 그게 용납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조사 국장이나 되시는 분이 조사 대상자에게 정보를 흘려요?”
김상민이 불에 덴 듯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정작 비명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저, 정보 유출이라고?”
“이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리야!”
국장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김상민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