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60화 (160/500)

160화. 선을 넘었어 (3)

-청장님, 본청의 민치호 조사 1국장님 오셨습니다.

비서의 내선 전화에 오낙현 서울청장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와중에 방문이라니.

세종시에서 서울까지 왔다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까짓 거리야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뭐가 대수인가.

문제는 민치호의 위치다.

어느 위치까지 올라간 자들은 그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의미가 생긴다.

지금이야 민치호가 차기 청장을 다투는 경쟁에서 물러났다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경쟁자였다.

과세기관의 수장 자리를 다투던 자가 독대를 한다?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당장 청장의 핸드폰에 민치호를 목격한 직원들의 보고가 시끄럽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들어오라고 해.”

눈을 뜬 청장은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비서에게 말했다.

비서의 대답과 동시에 청장실의 문이 열리고 민치호가 들어왔다.

청장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 무게감이었다.

민치호는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청장실 한가운데까지 다가온 후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청장님.”

“……오랜만이군, 민 국장.”

과거 한 팀이었으나 이제는 너무나 멀리 온 사이.

오낙현 청장과 민치호 국장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상대에 대한 경계가 섞여 있었다.

“앉지.”

“예.”

청장은 소파로 손님을 안내했다.

그리고 둘이 앉자마자 청장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로 할 것이지, 왜 일부러 여기까지 왔나?”

청장은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안 그래도 내부가 시끄러운 와중에 민치호의 등장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장님이 잘못된 길로 가시는 것을 막으러 왔습니다.”

“…….”

청장이 말없이 민치호를 노려보았다.

물론 민치호는 눈썹 하나 꿈쩍이지 않았다.

“서울청 내부에 용서해선 안 될 일이 벌어졌다면서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김상민 조사 2국장 말입니다.”

“쯧.”

청장은 혀를 차며 한 청년을 떠올렸다.

김상민 국장의 일탈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민치호에게 그 일을 보고할 사람은 더더욱 많지 않다.

“신재현 2팀장에게 들었나? 그놈이 이렇게 입이 싼 줄은 몰랐군.”

“나무라실 일은 아닙니다. 신재현은 완벽하고 깔끔한 해결을 바랐고, 청장님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을 뿐입니다.”

“내부 정보를 외부에 말했으니 하는 말이야.”

“설마 김상민 국장과 같은 경우라고 하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 제가 외부인이라니 섭섭합니다.”

민치호는 들어올 때와 다름없이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예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청장은 민치호가 가벼운 농담을 건넨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청장님 말씀대로 하지요. 신재현은 청장님이 이번 일을 해결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저는커녕 이선균 과장에게도 일언반구 없었습니다. 제가 서울청에 일어난 일을 알게 된 건 바로 어제입니다.”

“그건 의외로군. 바로 보고했을 줄 알았는데.”

“본청에 있는 청장님의 사람이 보고하듯 말이지요?”

타다닥, 하고 청장의 손가락이 팔걸이 위에서 자그마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청장은 노려 보듯 민치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는 정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일만 터지면 청장님께 바로 보고하는 거,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

“내가 민 국장을 그렇게 얕볼 리가 있나. 내 사람들 알면서 놔둔 거 알고 있어.”

청장은 테이블을 바라보며 눈에서 힘을 풀었다.

서울청에는 오낙현 청장의 사람만 일하는 것이 아니듯, 본청에는 민치호의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낙현과 민치호 모두, 자기 사람이 아니라고 멀쩡하게 일하는 사람을 배척할 정도로 편협한 인물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정도로 파벌 싸움이 심화하였다면 국세청장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는 일만 잘하면 청장님의 사람이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렇다고 청장님께 곤란한 정보가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 민 국장 많이 컸군.”

“다 청장님께 배운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신재현을 청장님께 맡긴 것이기도 하고요.”

“이젠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군. 하긴 서울청에 특수팀 만든다고 작업 칠 때부터 느끼긴 했다만.”

“과찬이십니다.”

둘은 가볍게 인사라도 건네듯 서로에 대한 응수를 끝냈다.

누가 옆에서 들었다면 식은땀을 흘렸을 법한 가시 돋친 대화였지만 둘에게는 이제 시작이었다.

“시답잖은 얘기나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그래서 일부러 여기까지 행차한 이유가 뭔가?”

“김상민 조사 2국장을 유배로 끝낼 생각이시라면서요?”

“유배는 무슨, 지금이 조선시대인가?”

알맞지 않은 비유에 청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방의 실권 없는 한직으로 보내 잠잠해지면 옷 벗게 하는 게 유배가 아니면 뭡니까? 다른 좋은 표현이 있으면 가르침을 주시지요.”

“이 사람이 그래도…….”

청장이 노려보았지만 민치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 청장을 마주하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항상 무뚝뚝한 민치호에게는 꽤 오랜만의 표정 변화였지만, 그것은 미소가 아니었다.

옛 부하 직원의 비웃음에 청장이 주먹을 쥐었다.

“지금 국세청은 너무 큰 주목을 받고 있어. 그게 다 자네가 아끼는 신재현 때문이지. 여기서 김상민의 일이 터지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더 큰 주목을 받겠죠. 욕도 먹을 것이고.”

“그걸 알면서 지금 이렇게 쳐들어왔나? 지금 민 국장 일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것 같은데. 민 국장이 뭐라 말해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청장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래서 민치호는 나직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청장이 되시더니 겁이 많아지셨습니다.”

“민치호……!”

도발은 효과적이었다.

청장은 핏발 선 눈으로 민치호를 노려보았다.

“이번 일은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처분해야 합니다. 청장님의 사람이 청장님께 본청의 대소사를 보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에요. 서울 28개 서를 관할하는 지방청의 조사국에서 조사 내용이 새어 나갔습니다. 그것도 조사 대상자에게. 이게 가당키나 한다고 보십니까?”

“누구는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주목받지 않는 상황이었으면 나도 징계위 회부하고 깔끔하게 처리했어. 지금 이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신재현이 이목을 끌었기 때문에 덮어놓고 처리할 수밖에 없다.

청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민치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신재현 때문에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고 하신 겁니까? 잘못을 저지른 건 김상민 국장입니다. 그를 처리하지 못하는 건 청장님이고요.”

“처리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은밀히 처리하는 거야. 민 국장이 그 차이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청장과 민치호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청장은 딱 잘라 말했다.

“지금 민 국장은 월권을 하고 있어. 함께 일한 정이 있어서 지금 가만히 놔두는 거야. 여긴 서울청이고 청장은 나야. 민 국장의 왈가왈부할 여지는 없어.”

더 이상 설득의 여지는 없었다.

청장의 굳은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느낀 민치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역시 청장님에 대한 정으로 설득했던 겁니다. 헌데 청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이제부터 한 파벌의 수장으로서 제안드리겠습니다.”

민치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원래도 무뚝뚝하고 험상궂은 인상이었지만, 그래도 방금 전까지는 말하면 통할 것 같은 부드러움이 있었다.

그랬던 민치호가 이제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처럼 차가운 얼굴로 청장을 응시했다.

“신재현은 제 사람이기도 하지만 청장님의 부하 직원이기도 합니다. 그는 국세청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본보기로 김상민 국장을 철저하게 처벌할 것을 원했습니다.”

민치호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청장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청장님께서 그 요청을 소화하지 못하시니 제가 이렇게라도 해결하려고 합니다. 청장님, 지금 즉시 김상민 국장의 직무를 정지해 주십시오.”

“민 국장……!”

“국세청에 김상민 국장의 파면 요청서를 제출하고 내부 정보 유출에 대해 검찰에 고발해주십시오. 그리고 내일 아침 기자회견으로 김상민에 대한 것을 발표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본보기를 보여주십시오. 그자는 명예롭게 퇴직할 가치도 없는 놈입니다.”

민치호의 말은 부탁이 아닌 요구였다.

그 말투에 청장이 벌떡 일어섰다.

“네가 지금 나에게 명령을 해? 아까 분명히 말했을 텐데. 여긴 서울청이고 청장은 나야!”

청장의 분노에 찬 외침에 민치호는 목소리를 높였다.

“충분히 가능하시잖습니까!”

“지금 네가 날 죽이려고 작정한 거냐! 기자회견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저라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당장 신재현이 청장님 밑에 있는데 제가 왜 지금 청장님을 죽이겠습니까! 오히려 도왔으면 도왔지요!”

민치호의 말에 청장이 우뚝 선 채로 굳었다.

“지금 뭐라고……?”

“제가 미는 사람은 분명 다음 국세청장이 될 겁니다. 저는 아직 어느 분을 모실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게 보여주십시오. 청장님께서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청장은 이 말이 진심인가 싶어 민치호를 직시했다.

그러나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진지한 얼굴로 청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정말 자신을 밀어줄 것이냐고 묻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청장은 신경 쓰이는 또 다른 것을 질문했다.

“너라면 그렇게 했을 거라고……? 진심이냐?”

“당연합니다. 제가 하지 못하는 것을 청장님께 어떻게 권하겠습니까.”

그 순간 청장은 눈앞의 옛 부하와 자신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생겼음을 실감했다.

청장이 조용히 처리하는 걸 최선이라 생각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언론의 뭇매를 버티며 서울청을 지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부 싸움을 하며 정치질에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국세청 밖으로 나가면 차원이 다르다.

각계각층에서 서울청을 비난할 것이고, 불씨는 국세청 전체로 번질 것이다.

청장으로서는 그것을 완벽히 막아낼 수 없었다.

“그걸 할 수 있다 이 말이지…….”

청장이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자 민치호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현재 청장님께는 신재현이라는 패가 있지 않습니까.”

“신재현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도 한계가 있어.”

“예전에 용산 세무서에서 신재현이 비리를 저지른 공무원을 적발한 적이 있습니다. 그거랑 똑같습니다.”

민치호는 무덤덤하게 설명했다.

“청장님의 명령으로 특수조사 1팀과 2팀이 내사에 착수했으며, 슬프게도 썩은 부분을 발견했으나 과감한 판단으로 발본색원하였다. 앞으로도 법을 어기고 공무원의 직무를 잊은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관용으로 처벌할 것이다. 이것은 본보기다. 이렇게 하시면 되잖습니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에 청장이 말을 잃었다.

“……민 국장이 신재현을 품은 이유가 있었군.”

“예?”

“아니, 혼잣말이야.”

청장이 허허 웃자 민치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느 조직이든 썩은 부분은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잘라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다. 원래라면 그것도 비난을 받겠지만 지금 국민은 신재현에게 호의적이니까요. 통할 겁니다. 그리고…….”

민치호가 말끝을 흐리자 청장이 눈짓으로 재촉했다.

민치호는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저라면 그것을 이용해 중부청장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갔을 겁니다. 이것은 청장님께 드리는 제 호의입니다.”

청장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민치호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청장이 입을 열었다.

“선택지는 하나로군.”

승낙이나 다름없는 대답이었다.

민치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민치호는 더 머물지 않았다.

왔던 때처럼 바람처럼 사무실을 나가는 민치호의 뒷모습을 보며 청장은 쓰게 웃었다.

“저 머리를 잘못된 곳에 쓰지 않아서 천만다행이군.”

민치호가 수장이 된 국세청은 어떤 모습일까.

거기에 이선균과 신재현까지 더해진다면.

민치호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청장의 눈빛에는 걱정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