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포석 (2)
나는 가만히 종이를 보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거 실화냐?
그런 뜻을 담아 바라보자 장세훈이 찰떡 같이 알아먹고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에 잡힌 종이를 와락 구겼다.
이 새끼들이?
기본적으로 세무서든 국세청이든 납세자를 믿는다.
모든 납세자는 성실하게 장부를 관리하고 성실하게 세금을 계산해서 세법대로 신고했다고 믿는다.
국세청에서 모든 납세자의 자료를 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납세자가 제출한 신고서와 부속서류, 그리고 금융기관과 카드사 등에서 제출받은 금융기록은 우리가 볼 수 있다.
그러나 장부는 다르다.
평소 사업할 때 장부는 납세자가 작성하고, 신고기한에 맞춰 납세자가 작성한 신고서가 들어오면 국세청은 그것을 검토한다.
납세자가 제출한 자료가 맞게 작성되었다는 전제하에 모든 조사가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가 조사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세무대리인에게 전화하여 장부를 제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부가 소실되었다고?
조사를 하려면 비교하고 검증할 자료가 필요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자료가 소실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하필 국회의원과 재벌 3세 이 두 놈만 자료가 소실됐다고?
물론 우연히 장부를 보관하던 창고에 불이 날 수도 있다.
태풍이 와서 침수될 수도 있고.
그런데 시기가 공교롭지 않은가.
특히 다른 사람들은 멀쩡히 장부를 제출하고 있는데 가장 구설수에 오를 사람들이 출석을 거절하다니.
이건 뭔가 있다.
나는 앞에 앉아 있는 이현석을 의식하여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시기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 중에도 이런 예가 있는지 조사해 주시고.”
“예.”
평소엔 내게 반말하는 장세훈이지만, 지금은 짧게 대답한 후 서둘러 회의실을 나갔다.
황민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장세훈에게 맡겨 뒀으니 괜찮다.
지금은 눈앞의 조사에 집중할 때였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시 여쭙겠습니…… 응?”
내 앞에 앉아 있던 이현석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는 거만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쳐들어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뭐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어리둥절해서 바라보자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뭐가 잘못됐나 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사람을 예단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얼마나 정직하게 사업하는지 아십니까? 매출에서 월세 빼고 인건비 빼면 밑지는 장사라고요.”
우리가 심각하게 대화한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표정이 안 좋았으니 우리가 불리한 것처럼 보였나?
응, 아냐.
나는 세무사사무실에서 제출받은 장부를 들이밀었다.
“선생님, 여기 기록된 매출이랑 통장에 입금된 금액이 다르거든요. 거기다 부인 명의로 된 통장에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입금했던데 물건 판매 대금 받으신 것 맞죠?”
이현석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가끔 보면 이런 사람이 있다.
자신 외의 사람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한 일이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은근슬쩍 팔짱을 푸는 이현석에게 나는 씨익 웃어 주었다.
“이거 말고도 많으니 걱정 마세요. 정직하게 영업하셨다고 하니 구석구석 다 파 보겠습니다.”
“뭐, 뭘 아는데요?”
“선생님께서 숨기신 모든 것이요.”
이현석의 눈동자가 떨렸다.
***
이현석과의 질답을 마치고 나는 바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조사 대상자들의 출석은 매우 빡빡한 일정으로 잡아두었기 때문에 지금도 막 한 명의 조사자가 회의실에 들어온 참이었다.
그래서 회의실은 급한 대로 황민우와 강혜원에게 맡겨 두었다.
둘 다 나와 일한 지도 오래됐고, 단순히 경력만 따져보자면 나보다 오래 되었다.
조사를 맡겨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사무실에서는 장세훈이 안길진과 함께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장세훈은 잠시 기다려 보라는 시늉을 한 뒤 전화를 이었다.
“예. 우편 말고 일단 팩스로 먼저 보내주세요. 어려우시면 스캔해서 메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년 치 전부 있죠? 네, 감사합니다.”
장세훈이 전화를 끊자마자 거친 손짓으로 넥타이를 풀어헤치더니 책상 위에 내동댕이쳤다.
“더러운 놈들이야! 그 두 놈 말고도 하나 더 있어. 22명 중에서 셋이나 자료를 소실했다는 게 말이 돼?”
장세훈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리쳤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안길진이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자료 소실한 건 누구누구입니까?”
“재벌 3세 놈은 출장이 있다고 아예 외국에 나갔대. 그러다 회사 사무실에 합선으로 불이 나서 자료가 탔다고 하고. 제2 야당의 국회의원은 사무실에서 페인트칠하다 실수로 불 났대고. 마지막으로 공기업 임원은 세무사사무실 이관 과정에서 택배가 분실됐대. 이게 말이나 돼?”
장세훈은 체크한 명단을 들어 세차게 흔들었다.
“22명 중에는 일반 사업가도 있고, 그림 개인 소장자도 있는데, 왜 하필 자료가 소실된 게 국회의원에 재벌 3세에 공기업 임원이냐고. 이게 지금 우연의 일치야?”
나는 명단을 훑어보고는 길길이 날뛰는 장세훈에게 물었다.
“언제 소실됐답니까? 우리가 공문 보낸 이후에 장부가 없어진 거면 고의성 있다고 볼 수 있잖아요.”
장부는 무조건 5년간 보관해야 한다.
실수로 잃어버렸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세무서가 자료를 요청했을 때 정당한 사유 없이 자료를 내놓지 못한다면 처벌도 받을 수 있는 사항이다.
물론 저 셋이 이 간단한 사실도 모르고 멋대로 장부를 파기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게 이상한 점이에요.”
안길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저희가 공식적으로 공문을 보내기 전에 소실됐어요. 제가 혹시나 해서 소방서에도 요청해서 알아봤거든요. 실제로 화재 신고가 접수됐고, 재산 피해에도 적혀 있어요.”
“더 이상한데요.”
나도 자연스럽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간상으로 맞지가 않는다.
기사가 뜬 것도 공식적 발표가 있은 후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된 것이다.
“이게 정말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뉴스 보면 불 자주 나잖아요.”
안길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두 가지 가능성 중 믿고 싶은 것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이라는 걸.
나머지 하나는 떠올리기도 싫은 것이었다.
공문이 뜨기 전에 미리 수작을 부렸다는 것은…….
“이거 어디서 새어 나간 것 아닙니까?”
아무도 감히 입에 담지 못한 그것을 내가 묻자 장세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장부를 고의로 파기하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문제였다.
나는 외부인에게 구체적인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
나학진조차 누가 조사 대상인지는 모른다.
그렇다면 내부의 누군가가 흘렸다는 뜻이다.
장세훈은 굳은 얼굴로 사무실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우리 팀에서는 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가장 믿어야 할 팀원들 사이에 금이 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지금 팀워크는 딱 좋다.
새로 이런 멤버 구하기도 쉽지 않고.
그러나 장세훈은 침울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검증은 해야 해. 그래야 서로를 믿을 수 있어. 우리 팀에서는 일말의 의심이라도 남기면 안 되니까.”
장세훈의 의견은 타당한 것이었다.
본래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이니.
그러나 나도 무작정 팀원을 믿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우리 팀원 중에 범인이 있었다면 세 명으로 끝날 리 없습니다. 나머지 명단 중에도 밝혀지면 난리 날 인물이 몇 있잖아요.”
“오히려 그래서 셋만 유출한 걸 수도 있지. 의심을 벗어나려고. 검증은 필요해.”
“섣불리 의심하는 건 위험합니다.”
장세훈은 슬쩍 안길진을 바라보더니 그답지 않게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인 너는 그렇게 하면 돼. 팀원을 의심하는 걸 겉으로 보여 주면 팀이 깨지니까. 검증은 내가 할게. 원래 황민우가 이런 역할이었잖아? 근데 걔는 8급이니까. 이번 일은 내가 나쁜 역할을 맡는 게 낫겠다.”
장세훈은 아예 결심한 얼굴이었다.
그냥 다혈질인 줄 알았는데 이런 생각도 할 줄 아는구나.
의외의 면이다.
마음은 매우 고마웠지만, 지금은 팀원들에게 의심의 화살을 돌릴 때가 아니었다.
“아뇨, 검증은 잠시 미뤄 두세요. 더 의심 가는 곳이 있잖습니까.”
“우리 말고 아는 놈들이 누가…… 아! 성실납세국?”
장세훈의 외침에 안길진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장세훈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먼저 돕겠다고 찾아왔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제 보니까 꿍꿍이가 있었네!”
음, 감탄했던 건 취소다.
성격이 급한 건 바뀌지 않았다.
“성실납세국은 아닙니다. 우리가 넘긴 10명 중에는 공기업 임원이 없었어요.”
“그럼 누구…… 설마 조사국?”
“네. 조사국에 처음 협조 요청하면서 넘긴 자료에는 이번에 자료 소실한 세 명 모두 들어있습니다.”
“아니, 설마…… 아무리 그래도 조사국이?”
조사국은 말 그대로 세무조사를 주 업무로 삼는 곳이다.
보안이야 어느 과든 중요하지만 조사국은 특히나 보안이 생명인 곳이었다.
같은 과에서조차 서로 무슨 조사를 하는지 비밀로 하는 판국에 조사 정보를 외부에 흘린다니.
청이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기분 나쁜 고요함이 사무실에 내리 앉았다.
문득 안길진이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정말 조사국이면 어떻게 해야 하죠?”
“바로 쳐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증거를 모아야죠.”
“잠깐, 너 청 내에서 주먹질은 안 된다.”
굳이 조사국이 아니라 어떤 국에서든 내부자가 정말로 정보를 흘린 거라면 조용히 넘어갈 자신은 없는데.
내가 대답이 없자 장세훈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황민우한테 따라 다니라고 해야겠네.”
“일단 다시 확인 좀 해 보죠. 현재 미리 수를 쓴 세 명이 조사국에 보냈던 명단에 있는 건 맞죠?”
“확실해.”
“우리한테서 직접 명단 받아간 사람은 몇 국입니까?”
“갤러리 조사할 때 안면 튼 팀장 있어. 3국에 내가 직접 넘겼는데.”
“3국이라…… 하지만 3국이 그렇게 멍청할까요? 당장 지금만 해도 가장 먼저 의심받는데.”
내 말에 장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3국에 넘기긴 했어도 3국에서 전담하는 건 아니랬어. 워낙에 다들 바쁘니까 손 비는 팀에서 가져간다고 하더라.”
“그럼 1국과 2국도 생각은 해 둬야겠네요.”
나는 생각에 잠겼다.
정보를 흘린 대가로 뭘 받았을까.
단순히 나를 엿 먹이기 위해서 내부 정보를 유출한다는 위험을 감수했을까?
뭐라도 받았으면 내 눈에 보일 텐데.
당장 내일부터 청 안을 샅샅이 뒤져서 모든 사람을 내 눈으로 봐야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고개를 들자 장세훈이 질린 얼굴로 만류했다.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다시 차분히 생각해 봐. 너 눈에 살기 돈다.”
“얼굴만 볼 겁니다. 얼굴만.”
“아냐. 너 분명히 얼굴만 본다고 하고 얼굴 들이받고 올 거야.”
“그러면 멀리서만 볼게요.”
장세훈과 안길진이 불안해하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황민우와 강혜원이라면 카드로 문을 열고 들어올 테니 아니고.
요즘 우릴 돕고 있는 성실납세국인가?
“갑니다!”
서둘러 문을 연 순간 나는 더욱 의아해졌다.
“권 팀장님. 어쩐 일이세요?”
바로 옆 사무실의 권현아가 감정이 격해진 얼굴로 서 있었다.
권현아는 내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거친 발소리를 내 가며 사무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저번에 청장실 앞에서 만났을 때 많이 심란해 보였지만 곧 극복할 줄 알았는데.
권현아는 아까 장세훈이 그랬던 것처럼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주먹을 쥐고 나를 노려보았다.
“신 팀장님! 저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요!”
“누구를…… 저를요?”
권현아는 분노로 입술을 파르르 떨며 외쳤다.
“2국장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