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56화 (156/500)

156화. 포석(1)

손에 들어온 정보는 무엇이든 무기가 된다.

그것이 유진환의 모토였다.

삶의 방식이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서 유진환이 새로 얻은 정보는 이용해 먹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전화만 해도 그렇다.

“아,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어이구, 보좌관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유진환은 공식적으로는 국회의원 보좌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동문 의원을 아는 사람들은 다 유진환을 보좌관이라 불렀다.

공식 직함은 아니더라도 유진환이 하동문의 오른팔임을 알기 때문에 높여 불러 주는 것이었다.

“요즘 이사님 연락이 좀 뜸하시길래 많이 바쁘신가 했지요.”

상대는 어느 대기업의 상무이사였다.

상무라면 5선 국회의원의 오른팔이 먼저 전화하기엔 급이 맞지 않는 직함이다.

그러나 현재 전화 상대는 그 대기업 재무팀의 실세였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차기 재무이사가 될 거라는 말이 도는 사람이라 유진환이 공을 들이고 있기도 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현 재무이사와는 달리 유진환을 껄끄럽게 본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정치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는 행보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 예…… 먼저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바쁘신 분이신데 제가 당연히 이해를 해야죠.”

이사는 어투는 정중했으나, 유진환은 바로 이사가 자신을 꺼려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지금도 ‘국회의원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린다’며 떨떠름해 할 것이 분명했다.

이사가 어리숙하게 티를 낸 것은 아니다.

유진환의 눈치가 빠른 것이었다.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이사님이 성화 물산의 재무이사로 내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재무이사는 속된 말로 곳간 지기라고 불릴 정도로 요직 중의 요직이다.

때문에 유진환이 일부러 전화까지 한 것이었다.

“저희 의원님께서도 이사님의 영전 소식에 기뻐하셨습니다. 언제 한 번 자리를 마련하시면 좋겠네요.”

원래 이런 대화는 노골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혹시 녹음이라도 되었다간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절대 서로를 믿지 않기 때문에 비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애매한 화두를 던지고 선문답처럼 머리를 굴려 찰떡 같이 알아먹는다.

그래서 유진환의 제안에 이사가 잠시 당황했다.

-제가 감히 의원님과 겸상을 할 수야 있겠습니까. 괜히 의원님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완곡한 거절이다.

그리고 대표이사도 아닌 상무이사의 거절은 또 처음이었다.

상무가 더 크기 전에 지금 전화하길 잘했다는 생각과, 먼저 숙이고 들어와도 모자랄 판에 일개 상무가 감히 거절을 하나, 하는 가소로움이 들었다.

‘정치권에 휘말리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나? 정치권 연줄 없이 경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재계 인사는 없을 텐데. 아니면 평사원부터 시작해서 이런 관계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인가?’

상무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진환은 머리를 돌렸다.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그리고 하동문 의원에게 유리할까.

결과는 금방 나왔다.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것이 있다면 두려움을 알려 주어야 한다.

거기에 두 번 다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유진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유진환은 먼저 타이밍을 끌어냈다.

“상무님. 의원님과 만나 뵐 수 있는 자리는 쉽게 생기는 게 아닙니다. 아실 텐데요. 제가 일부러 상무님을 챙겨 드리는 겁니다. 제 호의를 거절하다니 섭섭합니다.”

-어허허, 말씀은 감사합니다. 보좌관님의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유진환이 보여 줄 예의는 끝났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의 거절이다.

나중에 일이 어떻게 되든 유진환은 할 말이 있는 셈이었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우위를 잡기 위해 유진환은 슬쩍 미끼를 던졌다.

“그나저나 상무님도 참 힘드시겠습니다. 승진하시는 건 축하드릴 일인데 하필 이럴 때 재무이사로 가시니…….”

-보좌관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사는 유진환의 경고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이사의 목소리가 침잠하자 유진환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글쎄요. 상무님의 승진 선물로 제가 정보를 하나 드릴까 했는데, 상무님은 영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아서요.”

이렇게 던져 두면 무시하고 전화를 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딱 봐도 불길한 말투, 큰일이 닥칠 거라는 암시다.

‘물어보면 낚이는 거고, 물어보지 않으면 회사를 책임지는 임원 입장에서 신경 쓰이겠지. 혹시라도 내 말을 무시했다가 사고가 터지면 난 당신을 탓할 테니까.’

그러니 이사가 정말 자신과 연을 끊어도 상관없다.

그 결정은 나중에 돌고 돌아 유진환과 하동문에게 유리하게 쓰일 것이다.

자, 보아라. 우리의 충고를 듣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이사가 어느 쪽을 택하든 유진환은 그것마저 유리하게 이용할 자신이 있었다.

잠시 이사가 침묵에 잠기자 유진환은 가볍게 한 마디를 추가했다.

“성화 그룹의 둘째가 지금 부사장으로 있죠? 한동안 사고 치고 다니시는 것 같더니 잠잠하십니까?”

-정원근 부사장님에 대한 일입니까?

“제가 단언하죠. 지금 못 들으면 후회하실 겁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꽤 심각한 건이라는 거 아시죠?”

힌트는 적게, 그러나 듣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모두 유진환이 이끄는 대로였다.

이사가 전화 너머로도 들릴 듯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그간 의원님과 보좌관님께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조만간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뵈려 하는데 언제가 좋으십니까?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

유진환에게 있어 즐거움이자 삶의 원동력이었다.

“의원님이 바쁘시지만, 이번 건은 시급을 다투는 일이니 제가 한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아니요, 의원님께는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그 전에 보좌관님을 뵙고 싶군요. 편하신 날짜와 장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한번 굽히기로 마음먹은 상무는 더욱 아래로 숙였다.

유진환은 쾌재를 부르며 달력을 보았다.

“그럼 오늘 저녁에 보시죠. 장소는 문자 보내 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거기서 뵙겠습니다.

한 명은 끝났다.

유진환은 조사2국장이 불러준 이름들을 훑으며 전화를 들었다.

이번엔 다른 당의 초선 의원이었다.

비록 힘없는 거수기에 불과한 초선 의원이지만, 끌어들여서 나쁠 것은 없다.

써먹는 방법이야 다양하니까.

“신재현. 너는 같은 기관에 있는 배신자를 언제쯤 눈치챌까? 눈치챈다 해도 상대는 국장인데…… 과연 어떻게 나올까?”

이 역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재밌을 것 같았다.

유진환은 기대감을 품고 초선 의원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모든 일은 순서가 있는 법.

아쉽지만 지금은 전화가 먼저였다.

***

[속보] 서울청 특수조사 2팀, 22명에게 일괄 출석 요청

[상보] 탈세 혐의자 22인, 서울청의 일제 조사 시작

-서울지방국세청의 특수조사 2팀의 신재현 팀장(7급, 주사보)은 작년 국회의원과 올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이어 새로이 조사에 착수한 탈세 혐의자 22인에게 출석 요구서를 발송했다. 자세한 명단은 공개하지 않았으나, 개중에는 제2야당의 국회의원과 재벌 3세 및 유명 배우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사는 기다린 것처럼 일제히 기사를 터뜨렸다.

물론 내가 의도한 대로다.

나학진은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기자들을 끌어들였다.

내가 직접 기자들과 접촉하는 것보단 기자인 나학진이 정보를 흘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선택한 방법인데 꽤 괜찮았다.

앞으로는 차라리 나학진에게 맡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스크롤을 내리자 뜨거운 반응의 댓글창이 보였다.

└[BEST] 출석 요구서 받은 놈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나가라. 안 나가면 탈세범으로 간주함

└당당하신 분들은 당연히 나가겠죠? ^^

└조사 떴다! 다 싹 쓸어 버려라!

└명단에 국회의원 있는 거 실화냐? 우리나라 국회의원 중에 멀쩡한 놈이 있긴 해?

└정신 차려라!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는 망나니 놈 칼에 이 중 누가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응 탈세범 어서 오고. 나는 탈세 안 해서 괜찮은데?

정확히 내가 원했던 구도다.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일수록 언론의 포화를 비껴 가기 어렵다.

그렇다고 잠잠해지길 기다리기도 어렵다.

이렇게 온 나라가 떠들썩하니 당분간은 잠잠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서울청에 출석할 수밖에 없다.

“팀장님! 첫 번째 출석자 도착하셨습니다.”

강혜원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며 손님을 안내했다.

우리 특조팀 사무실에는 자료가 널브러져 있어서 조사차 많은 사람을 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청장의 허가를 얻어 자그마한 회의실을 하나 빌린 것이다.

강혜원의 안내를 받은 남자는 죽상을 하고 터벅터벅 회의실로 걸어 들어 왔다.

회의실 안에 있는 책상은 전부 치워 두고 딱 두 개만 놓여 있었다.

나는 내 바로 앞의 의자에 손짓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앉으시죠.”

“하, 고생?”

남자는 앉자마자 인상을 팍 썼다.

“이 난리를 쳐 놓고 고생이요? 지금 잘못하면 전국에 내 이름이 팔리게 생겼는데? 지금 고생이라고 했어요?”

남자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얼굴로 씩씩거렸다.

나는 대답 없이 천천히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그럼 그렇지.

[136,908,260]

매우 선명히 보이는 숫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남자가 뭔가를 오해했는지 벌떡 일어났다.

“지금 약 올려요? 조사받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첫 손님이 아주 다혈질이시다.

중고 매물을 싸게 사들여 수리 후 소비자에게 되팔며 서민들 등쳐먹던 사람인데, 장부를 보니 더 악질이었다.

그런 주제에 신문에 자기 얘기가 오르락내리락할 생각에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다.

그래서 개인정보 유출 같은 걸로 소송당할까 봐 일부러 이름은 절대 흘리지 않았다.

직업도 딱 세 명만 흘렸다.

국회의원, 재벌 3세, 배우.

이들은 워낙에 이름값 있으신 분들이니 반쯤 협박하는 심정으로 얘기해 준 거였고.

“기사에 개인정보는 없었을 텐데요. 혹시 어떤 피해를 보셨습니까?”

“와이프가 출석 요구서를 봤다고요! 어제 내가 얼마나 들들 볶였는지 알아요?”

아하, 부인에게 안 좋은 일을 들켜서 불편하시다 이거구나.

나는 오른쪽 책상에 놓여 있던 종이 뭉치를 내 앞으로 끌어왔다.

옆에 앉아 있던 황민우가 펜을 들고 서류를 챙겼다.

“이현석 씨, 자리에 앉으세요. 지금 조사받으러 오신 겁니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저희가 밑 작업으로 조사해 놓은 자료입니다. 여기 포스트잇 붙여 놓은 거 보이시죠? 이게 전부 이현석 씨께 여쭤볼 사항입니다. 전부 탈세의 혐의가 보이는 부분들이라구요.”

“어…… 그렇게 많을 리가 없는데.”

남자는 이제야 상황을 깨달았는지 슬금슬금 자리에 앉았다.

남자의 눈동자가 자료에 붙은 포스트잇에 박히듯 고정되었다.

“저희 역시 아무 혐의 없는 분을 오시라고 하진 않습니다. 더군다나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어요. 이현석 씨, 제가 누굴 잡았는지 알고 계시죠?”

나는 지그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뚝뚝 끊기는 움직임으로 천천히 고개를 든 남자가 나와 눈동자가 마주쳤다.

남자는 꿀꺽 침을 삼키더니 손끝을 떨었다.

“제, 제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설명하셔야죠. 그러라고 모신 겁니다. 먼저 이것부터 봐 주시죠. 이현석 씨가 사들인 미술품 목록입니다. 전부 현재 갖고 계신 것 맞죠?”

나는 자료를 펼쳐 남자가 볼 수 있도록 내밀었다.

남자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쳤다.

신고서는 안 들어왔던데.

세금 안 내고 어디다 팔아먹었군.

내가 남자의 표정을 살피며 다음 자료를 펼치려고 할 때, 회의실 문을 열고 장세훈이 다급한 걸음걸이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강혜원이 올 텐데.

사무실에서 일하던 장세훈이 뛰어 내려오다니.

장세훈은 내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의식해서인지 미리 적어 온 종이를 내게 건넸다.

[이번 조사 대상자 중 국회의원과 재벌 3세, 화재로 장부가 모두 소실되어 조사에 응하기 어렵다고 연락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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