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각자의 선택(5)
국장은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마시려던 캔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계실 텐데요.”
“그렇죠.”
왕따 당하는 놈을 도와주다 덩달아 왕따 당하는 건 초등학교나 회사나 똑같다.
그놈이 커서 된 게 그놈이니까.
게다가 지금은 각자 사람들을 이끄는 입장이다.
자연히 아랫사람들도 강제로 싸움에 끼어들게 된다는 뜻이다.
그나마 지금 상황이라면 수십 명이 작은 팀 하나를 짓밟겠다며 나선 상황인데, 여기서 성실납세국까지 끼어든다면…….
그때부터는 정말 패싸움이 될 수도 있다.
내전인 것이다.
나야 조사국의 국장들이 뭔 짓을 하든 깨부술 생각이 가득한데, 여기에 성실납세국장까지 끼면 구도가 미묘해진다.
내전에서 지면 성실납세국장이 승진에서 떨려날 수도 있다.
본인의 싸움도 아닌데 끼어들어서, 나에게 자기 미래를 거는 꼴이다.
그렇다고 국장이 이 사실을 모를 리는 없었다.
여기까지 직접 왔다는 것은 나름의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냐고는 내가 물어야지요.”
“어떻게 보이실지는 모르지만 저희는 정말 괜찮습니다. 피곤한 게 가장 큰 문제일 뿐이죠.”
국장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하긴 장관까지 잡아낸 사람인데 이 정도 견제는 애들 싸움 같아 보이겠지요.”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할 필요까지야.
물론 내 눈에 유치해 보이는 것은 맞다.
내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자 국장이 쓰게 웃었다.
국장은 무언가를 털어낸 듯한 시원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동안 내가 뭘 무서워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방청, 그것도 서울청의 국장 자리까지 왔으면 더 욕심낼 필요도 없는데. 남들 눈치나 보고 참…….”
“다수의 사람이 죽이자고 작정하면 버티기 힘듭니다. 저야 막 나가기로 결심했으니 신경 안 쓰지만 국장님은 책임질 아랫사람도 많잖습니까.”
“신 팀장이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요. 그래서 이제는 나도 눈치를 안 보려고 합니다. 서울청 국장까지 왔으면 됐지, 그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 나도 신 팀장처럼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국장은 후련한 얼굴로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 거라면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지.
매우 환영이다.
“국장님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함께 일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국장은 허허 웃더니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지금 바로 조사가 필요한 명단 넘겨주세요. 우리 국에 일손 비는 팀이 좀 있습니다.”
“예.”
내가 팀원 쪽으로 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황민우가 명단을 가져왔다.
“총 22명 중 저희가 끝마친 것이 8명입니다. 나머지 14명 중 반만 맡아 주셔도 수월할 것 같습니다.”
“아니요, 더 줘도 됩니다.”
“괜히 저희 때문에 야근하는 일이 생기면 죄송해서요.”
“걱정 말아요. 인원수가 몇인데. 이왕 돕기로 했으니 2팀이 한숨 돌릴 수 있도록 해 주겠습니다.”
국장 너머로 얼굴에 화색이 도는 팀원들이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피곤에 절어 있었는데, 지금은 금방이라도 환호성을 지를 것처럼 기쁜 표정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즉석에서 펜을 들고 명단을 빈 종이에 옮겨 적었다.
총 10명의 이름이었다.
아무나 적은 것은 아니고 나름 중요도를 생각해 분배했다.
절대 다른 과에 맡길 수 없는 4명을 제외한 이름이다.
그러나 국장은 명단을 받아보더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거 혹시 가수 아닙니까?”
“네. 예명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아들이 팬이라서요. 기사 뜨면 아들이 실망하겠네요.”
“이런…….”
내가 짧게 중얼거리자 국장이 가볍게 종이를 툭 쳤다.
“뭐, 어쩔 수 없죠. 봐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예. 그렇습니다. 누구든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다짐하듯 굳은 어조로 말했다.
국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엄연히 불법인데, 저지른 사람이 잘못한 거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명단에 있는 사람의 직업이 어떻든 간에 철저하게 조사 부탁드립니다.”
나는 재차 강조했다.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신 팀장이 하는 걸 봤는데 우리 국에서 봐주기가 나오면 내 낯이 살지 않지요.”
국장은 허허 웃고는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이선균 과장에게 들은 그대로네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선균 과장은 성실납세국의 과장이었다.
소득재산과의 과장.
업무상 국장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겠구나.
“사고 잘 친다고 하시진 않았나요?”
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국장 역시 장난기 도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웬만한 강심장 아니고서는 품기 어려울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번 22명 조사 발표도 매우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국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작업 끝나는 대로 보낼 테니 나중에 봅시다.”
“살펴 가십시오, 국장님.”
국장이 일어나자 문에서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안길진이 헐레벌떡 달려 나와 사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다른 팀원들도 벌떡 일어나더니 자리에서 90도 각도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다른 국장한테는 이렇게까지 안 하는 사람들인데.
야근을 덜 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렇게도 기쁜가 보다.
“팀장님! 이제 그럼 우리 4명만 조사하면 끝나는 거죠!”
환하게 웃는 팀원들을 보자 괜히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앞으로 4명. 해 봅시다.”
***
성실납세국장이 나를 돕는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워낙에 좁은 곳이라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조사국은 아예 대놓고 우리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1팀을 밀어주기도 하고.
성실납세국의 직원들이 업무상 조사국에 자료를 넘기면 조사국은 백데이터가 부족하다며 빡빡하게 추가 자료를 요청하기도 했다.
누가 봐도 필요 없는 추가 자료를 요청하는 것이, 일부러 성실납세국을 귀찮게 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국장급 회의에서는 대놓고 날 선 비판이 오갔고, 청장은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지만 일단 지켜보고만 있었다.
청 내부가 점점 시끌시끌해질 때 22명의 모든 자료 조사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실사 조사와 납세자 소환 조사였다.
결재가 필요한 일이라 내 직속 상관인 청장실 문을 두드렸을 때, 청장실에는 1팀장 권현아 역시 있었다.
요즘 권현아도 굉장히 많은 실적으로 세우고 있어서 청장실에 드나드는 일이 많다고 들었다.
조사국이 전심전력으로 도와준 결과이긴 하지만, 내 예상 밖으로 대단한 건수였다.
권현아도 아예 작정하고 실적 경쟁에 돌입한 것이다.
“청장님. 결재 부탁드립니다.”
내가 결재판을 청장에게 내밀자 청장은 서류를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요즘 청이 시끄러운데.”
엄연히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청장은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신 팀장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
나는 솔직히 청장이 국장들과 권현아를 감싸고 돌 줄 알았다.
나는 반대 파벌의 사람이고 날 견제하는 사람들은 청장의 사람들이니.
그래서 번쩍 고개를 들자 청장은 반개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작이 누구 때문인지,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
청장실에 앉아 있는데 아랫층에서 실무자들끼리 일어난 알력싸움까지 다 파악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렇게 볼 것 없어. 내 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 당연히 내가 알아야지.”
내 얼굴에 의문이 드러났나 보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지웠다.
“죄송합니다.”
“이 일로는 사과하지 마라. 신 팀장이 사과하면 국장들 조율을 안 한 내 책임도 되어버리니까.”
청장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아무래도 화가 난 것 같았다.
그것이 나에 대한 분노인지 국장에 대한 분노인지는 모르겠다.
“막지는 않을 거다. 적어도 아직은 생산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이렇게 각자 실적도 내주고 있고 말이지.”
청장은 내가 준 것 외에 또 하나의 결재판을 들어 올렸다.
권현아가 올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너희 둘이라면 알아들었겠지? 이 이상 내부 싸움이 격화되면 내가 나설 거다.”
서울청 전체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알아서 자중해라.
나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우리 둘의 대답을 들은 청장은 결재판을 열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꼼꼼하게 내용을 훑어보았다.
“이번에도 시끄럽겠군.”
“계획은 세워 뒀습니다.”
“그럼 됐다.”
펜을 들기까지가 오래 걸렸지, 막상 펜을 든 청장은 거침없이 사인을 새겨 넣었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다.
청장실을 나온 내가 먼저 뛰어가려고 한 발짝 내디뎠을 때 뒤에서 권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신가요?”
깊게 잠긴, 무언가 고뇌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웬만하면 대충 대답하고 사무실로 얼른 달려가려고 했는데, 권현아의 목소리를 들으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슨 일 있냐고요? 지금 피해 보는 건 2팀이잖아요. 국장님들의 치사한 수법에 놀아나서!”
실적을 많이 올려서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권현아의 목소리는 오히려 울먹거렸다.
“당연히 2팀을 이기고 싶었죠.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싸우고 싶진 않았어요! 신 팀장은 항상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해 왔으니까, 그렇게 팀장 자리를 따냈으니까 나도 내 힘으로 경쟁하고 싶었다고요!”
권현아는 울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왜 청장님한테 따지질 않으세요? 청장님이라면 말 한 마디로 종식시킬 수 있어요. 왜 청장님에게 부탁하지 않느냐고요.”
권현아 역시 젊은 나이에 여자 몸으로 특수팀 팀장을 따내는 데 수많은 노력이 있었다고 들었다.
이렇게 일이 꼬일 줄은 몰랐지만.
아마 이번 국장들의 과시는 권현아에게 있어서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권현아가 노력해 쌓은 실적이 ‘국장들이 밀어줬다’라는 말 한 마디로 격하되고 있으니.
뭐라 말을 해 줘야 할까.
나 같으면 지금 무슨 말이 듣고 싶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위로의 말은 필요 없다.
달래주는 것은 오히려 권현아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주위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 역시 권 팀장님의 선택입니다. 지금 이것은 권 팀장님이 선택한 결과구요.”
권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그러나 결코 달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주위를 이용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은 언제나 바뀌잖아요. 유리할 수도 있고 불리할 수도 있고. 저는 권 팀장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권현아는 꾹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최선인가.
나는 가볍게 묵례하고 뒤로 돌았다.
뒤늦게 권현아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결심이 섰습니다.”
목소리가 살짝 젖어 있길래 나는 뒤를 돌지 않은 채 손만 살짝 흔들었다.
“그럼 다음엔 팀장님다운 선택하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똑똑한 사람이니 금방 떨쳐내고 일어나겠지.
다음에는 평소대로의 권현아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나는 발걸음을 빨리 했다.
사무실에서 조사 대상에게 보낼 공문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