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각자의 선택(4)
나학진은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꽤 남았지만, 나학진은 일부러 30분 먼저 카페에 도착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그만큼 바쁘기 때문이고, 나학진은 절대 상대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속 상대가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여기까지 온다는 것은 나학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상대가 정각에 오든, 10분 전에 오든.
자신이 기다리는 한이 있어도 상대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남는 시간 동안 그저 멍하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학진은 노트북을 꺼내 기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이 막히면 숨을 돌릴 겸 다른 기자들의 뉴스를 읽었다.
[정재계 인사들이 떨고 있다-국세청의 저승사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은 무엇일까. 바로 돈이다. 자세한 방법은 생략하겠지만,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많다.
그럼 소위 ‘돈 있는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권력기관은 무엇일까? 검찰? 경찰? 아니다, 바로 국세청이다.
제목이 굉장히 흥미로워서 클릭했더니 꽤 현실적인 내용으로 서두를 시작한 글이었다.
‘그렇지.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없지.’
나학진 역시 기자 일을 하면서 별 소문을 다 들어봤다.
목격자의 입을 막는 것도 돈이면 충분했고,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는 데도 돈만 한 것이 없었다.
가장 효과적인 수단.
그래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
나학진은 씁쓸한 얼굴로 기사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듯, 조사하면 다 나오게 되어 있다지만 세무조사는 기업에 있어 목숨을 건 시련이나 다름없다. 물론 기업 역시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는다. 큰 회사일수록 세무조사에는 이골이 났다. 따로 법률을 검토하는 인원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날고 기는 정재계 인사들마저 요즘 몸을 사리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이쯤 되자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았다.
슬슬 아는 이름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나학진은 기대감에 스크롤을 내렸다.
-국회의원부터 장관까지. 성역 없는 조사로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는 한 공무원 때문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정부의 그 누구도 그를 막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청와대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밀어주겠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슬슬 이런 얘기가 나올 거라는 생각은 했다.
아직 국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나학진으로서는 단숨에 관심이 샘솟는 구절이었다.
나학진은 눈을 크게 뜨고 기사를 읽었다.
-여당에서는 과감한 자정 작용에 찬사를 보낸다고 말하고, 야당에서는 국민 영웅을 이용해 먹으려는 꼼수라고 말하고 있다. 양쪽의 주장을 보면 알 수 있듯, 놀랍게도 그 누구도 국세청, 그리고 특수조사 2팀을 공격하지 않는다. 정재계의 관심은 이 팀의 행보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특수조사 2팀이 이 기세로 누구를 선택할지, 정재계 인사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주목하고 있다. 이들은 장관마저 잘려나가는 것을 보고 화제의 공무원을 ‘국세청의 저승사자’, ‘탈세 사냥꾼’이라고 부르고 있다.
“크아!”
나학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감탄사를 터뜨렸다.
누가 썼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나학진은 얼른 맨 마지막 줄로 스크롤을 내렸다.
-또한 이 기세를 몰아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썩은 부분을 모조리 도려낼 수 있을지 작은 기대를 걸어본다.
한대일보 김호섭.
‘호섭이였구나!’
나학진이 있었던 한대일보의 후배, 김호섭의 이름이 기사 끝에 떡하니 박혀 있었다.
‘이걸 한대에서 통과시켜 줬네. 요즘엔 바뀌었나?’
그러나 나학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분위기가 신재현에게 우호적이기에 허락해 줬을 것이 분명하다.
작년에 근거 없이 신재현을 정치 공작이라며 몰고 갔던 논조의 기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래도 김호섭이 애썼네. 마지막 사견은 한대 사장이 싫어할 만한데.’
한대일보의 사장은 철저하게 돈과 자신의 지위를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기자 출신의 사장이 아니기 때문에 실무는 더더욱 모른다.
어쩌다 보니 언론사를 경영하게 되었을 뿐, 언론인의 사명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꽤나 뒤가 구린 놈이라 신재현이라는 존재가 반갑지 않을 텐데, 용케 이런 기사가 통과됐다 싶었다.
‘이런 글엔 열렬한 댓글이 있어야지. 그래야 후속 기사가 나온다고.’
나학진은 후배 기자도 응원할 겸 댓글창을 열었다.
그런데 나학진이 댓글을 달기 전에도 이미 반응은 뜨거웠다.
└[BEST] 캬! 저승사자 나가신다! 이 기세로 개새끼들 다 치자!
└응원합니다! 숨어 있는 나쁜 놈들 다 깔끔하게 처리해 주세요!
└깔끔하게 처리하기는 개뿔, 저놈도 털어봐라. 분명히 뭐 나옴.
└이 위에 댓글 단 놈부터 조사하면 될 듯. 당당한 사람들은 다 응원하고 있는데ㅋㅋㅋㅋ 왜? 쫄리냐?
└나만 아니면 돼~~~~~
이미 댓글은 더하고 말 것도 없었다.
나학진은 뿌듯한 마음으로 댓글마다 추천을 눌렀다.
그리고 그 기분 그대로 자신이 쓰던 기사로 돌아왔다.
반쯤 채워진 한글창에는 오늘도 탈세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이제는 이런 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원래는 신재현이 혹시라도 작년처럼 언론의 공격을 받을 때를 대비해서 자신이 도우려 했다.
지금은 1인 신문사지만 점점 규모를 키워나갈 생각이었고.
그런데 신재현이 치고 나가는 속도는 나학진의 생각보다 빨랐다.
신재현은 이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섰다.
나학진은 뿌듯하면서도 시원섭섭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다고 게을리 할 생각은 없었다.
현재 자신의 사장인 심병철이 물심양면으로 신문사를 꾸리고 있으니 뒤늦게라도 따라갈 생각이었다.
-타다다닥.
나학진이 열심히 자판을 놀리고 있을 때, 더운 바람이 훅 끼쳐 왔다.
기다려온 약속 상대가 바람을 일으키며 바로 앞 의자에 앉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금방 왔습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 정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바빠도 신재현은 약속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지금도 서둘러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더니 반납대로 다가가 찬물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급히 나온 거라 다시 가봐야 합니다.”
그제야 신재현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잠을 못 잤는지 얼굴이 초췌했다.
그러나 피곤함에 찌든 가운데에도 눈동자만은 또렷했다.
작년 류석호 때 뛰어다니던 모습이 생각날 정도였다.
나학진은 자세를 바로 했다.
무언가 또 일을 벌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조만간 제가 22명의 이름을 까발릴 겁니다. 그걸 한꺼번에 터뜨려주세요. 될 수 있으면 많은 언론에 퍼지는 게 좋아요.”
“일전에 장관을 칠 때 언론과 안면을 터놓지 않으셨습니까? 요즘 언론 사이에서 팀장님 인기 많습니다. 인터뷰만 해도 특종이라고 할 정도예요. 연락하시면 바로 달려올 언론이 수두룩한데요.”
나학진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신재현은 자신이 기사로는 커버가 안 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굳이 자신이 기사를 쓰지 않더라도 신재현의 전화 한 통이면 기자들이 버선발로 달려올 것이다.
특종 밭.
입을 열면 특종.
그것이 현재 언론 사이에서 신재현의 평가였다.
그러나 신재현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언론과 협상할 시간이 없어요. 이번엔 나학진 기자님께 맡기려고 합니다. 괜찮으실까요?”
신재현의 질문에 나학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바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괜찮죠! 제가 아직 도움이 된다면야 뭐든 괜찮습니다! 이번에도 탈세범 기사입니까?”
“네. 아직 조사하려면 멀긴 한데 나중에 대상자들을 서울청으로 모조리 불러들일 거거든요.”
왜? 하고 묻고 싶었지만 나학진은 참았다.
그의 행동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외부인인 나학진이 물어봐서는 안 될 것이고.
대신 나학진은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러면 다른 언론에 전달하는 건 제가 맡으면 되겠습니까? 어디까지 알려 줘도 될까요? 22명을 조사했고 곧 결과를 발표하겠다, 이 선으로 할까요?”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이상 새로운 조사 결과가 곧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또 이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신재현은 더 큰 떡밥을 던졌다.
“한두 명이 아닌 데다 청 내부에서도 견제가 있어서…… 크게 터뜨릴수록 좋습니다. 서울청에 출석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받을 만한 상황을 만들고 싶습니다.”
“내부에 무슨 일이…… 아,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걸 물었습니다. 그러면 상대가 출석 요청을 거부할 만한 사람인가 보네요?”
“조사 대상에 유명인이 몇 포함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 이것까진 기자들에게 알리셔도 돼요.”
“유명인!”
나학진이 메모하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굽니까? 탈세범이요.”
“그것까지 말씀드리긴 어려워요. 기자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조사 중인 사안은 기밀이라 그렇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나학진은 바로 수긍했다.
경찰이나 검찰도 조사 중인 내용을 흘리고 다녔다가 정보 유출로 잡혀가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럼 필요할 때 연락 주세요. 언제든 터뜨릴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예.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얼마나 급한지 용건이 끝나자 신재현은 벌떡 일어서서 카페를 나갔다.
“누구부터 불러야 하나…… 그래, 김호섭.”
나학진은 핸드폰을 들었다.
그간 기자 일을 하며 쌓아 온 인맥을 발휘할 때였다.
***
나는 청으로 들어가는 길에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샀다.
요즘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가 새벽같이 나오는 일이 잦았다.
겨우 다섯 명이서 조사하려니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마음 같아서는 조사 대상 모두 쳐들어가서 싹 긁어오고 싶었다.
하지만 한꺼번에 덮치는 건 불가능했다.
서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도 있으니 한두 명 실사 조사 나가면 다른 대상들도 눈치채게 된다.
그러니 기각.
그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조사 대상을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눈으로 탈세액을 보기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조사가 대략적으로라도 다 끝난 이후여야 가능했다.
서울청으로 불러들인다는 것 자체가 조사 대상이라는 걸 알려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정석대로 조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열심히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을 팀원들에게는 미안했다.
팀을 만들고 일에 끌어들여 고생시키는 건 나니까.
그렇다고 지금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니 조금만 힘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양손에 간식거리를 싸 들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팀장님, 팀장님! 마침 잘 오셨어요!”
들어가자마자 격렬한 환영이었다.
내 손에 든 간식거리 때문인가 했는데, 테이블 앞에 웬 중년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외부인이라면 팀원들이 들여보내지 않았을 테고.
강혜원에게 간식거리를 넘기고 다가가자 남자가 휙 의자를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성실납세국장이다.
“국장님, 어쩐 일이세요?”
“저쪽 국장들이 나잇값을 못 하고 있다길래.”
저쪽 국장이라 함은 조사국의 세 국장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팀을 엿 먹이겠답시고 팔 걷어붙이고 나선 윗분들.
“아,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애초에 저희는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요.”
그때 강혜원이 음료수 두 개를 들고 다가왔다.
내가 방금 사 온 것이다.
“드시면서 이야기 나누세요.”
“아, 고맙습니다.”
성실납세국장은 주스 캔을 따서 벌컥벌컥 마시더니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저쪽에 가면 물 한 잔도 안 주는데, 여긴 대접이 좋네요.”
국장 중 유일하게 고시 출신이 아닌 성실납세국장은 다른 국장들과 잘 섞이지 못한다고 듣긴 했다.
그의 말대로 국장씩이나 되어서 나잇값 못 하는 양반들이다.
“목마르셨나 봅니다. 하나 더 드릴까요?”
국장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팀원들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주스 값은 해 드리죠.”
“예?”
“우리 성실납세국의 법인세과와 소득세과가 조사를 도와주겠다는 말입니다.”
나는 캔을 따던 자세 그대로 굳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