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53화 (153/500)

153화. 각자의 선택(3)

“허, 안 되겠구만.”

굳게 닫힌 국장실 문을 바라보던 2국장은 연신 혀를 찼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 방금 전의 태도만 해도 그랬다.

팀장이 국장실에 대놓고 찾아와 1:1로 얘기하는 건 그렇다 치자.

국장이 하는 말마다 한 마디도 안 지고 대드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싹수부터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애초에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했겠는가.

전부 조직의 미래와 서울청장을 위해서다.

정작 서울청장이 알면 ‘윗사람씩이나 되어서 아랫사람을 괴롭힌다’며 고까워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훈계, 그리고 제 분수를 알게 해 주는 것.

조직에서 튀어나온 못을 정으로 내리쳐 조직 내부로 밀어 넣어 주는 것.

그것이 윗사람이 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약간의 사심이 섞인 건 맞다.

고졸에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도 모르는 놈이 기고만장하여 뛰어다니는 꼴을 보면 속이 뒤집혔으니까.

“쯧. 너는 지금 마지막 기회를 찬 거야.”

대선 후보 역시 언제까지 후보만 하고 있겠는가.

언젠가는 대통령이 될 테고, 그런 줄을 잡게 된다면 국세청만이 아니라 더 넓은 곳으로 나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발을 들이게 되면 좋고, 하다못해 청장 자리도 괜찮다.

“크흠. 김칫국을 너무 마셨네. 원래 이런 일은 서로 주고받으면서 신뢰를 쌓아야 하는 법이지.”

국장은 기꺼운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단 한 번 통화 대기음이 울렸을 뿐인데 상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 국장님.

‘예절이 되어 있는 친구로군.’

볼수록 아까의 신재현과 비교가 된다.

“아, 유 보좌관. 보좌관이 제안한 대로 손발은 묶어 뒀습니다.”

-과연 시원시원한 행동이십니다. 국장님께서 어련히 잘 알아서 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어떤 식으로 하셨습니까?

보통 이런 것까지 묻나?

왠지 보고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국장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이다.

자신의 방식이 궁금할 수도 있다.

“그쪽 팀이 인원이 적어요. 항상 일손 부족에 시달리거든. 그래서 조사국에 협조 요청을 하는데 이제부턴 조사국에서 2팀에서 손 떼기로 했습니다. 1국과 3국도 동참하기로 했고.”

-오…… 뒤끝이 없겠군요. 역시 제가 다른 분도 아닌 국장님께 전화 드렸던 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 그렇게 다른 팀도 협조 요청을 합니까? 말이 협조지 어쩐지 하청 같은데요.

하청이라는 말에 국장은 기분이 나빠졌다.

하고 많은 말 중에 하청이라니.

그런데 그렇게 듣고 보니 정말 하청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사 지휘는 어차피 특조 2팀이 한다.

핵심 조사는 보안상 외부로 흘리지 않으니 공을 세우면 역시 특조 2팀이 먹는다.

조사국은 인력과 시간만 제공할 뿐 얻는 것이 없지 않은가.

이건 그의 말대로 하청이나 다름없다.

국장이 잠시 말이 없자 유진환이 다급히 덧붙였다.

-아, 제가 잘 몰라서 생각나는 대로 말했습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국장님.

“아, 아니에요. 우리 업무를 잘 모르니 그럴 수도 있죠. 큰 규모의 조사가 있거나 하면 힘을 합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국장님이 잘못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도 입장이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은데요. 팀장이 오히려 국장님을 도와야죠. 안 그렇습니까?

유진환은 국장이 가려운 곳을 정확하게 긁었다.

국장은 ‘이놈 봐라.’하고 생각하면서도 한결 풀린 목소리로 통화를 이었다.

“허허, 유 보좌관은 정세를 잘 읽는군요. 하동문 의원님께서 아주 든든하시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국장님, 혹시 이번에 특조 2팀이 뭘 조사하고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유진환이 원하는 것은 노골적이었다.

정보를 달라.

그것도 현재 조사 중인 대상에 대한 정보였다.

“아무리 신재현이 마음에 안 든다지만, 조사 정보는 함부로 외부에 말할 수가 없어요.”

-저번에 장관을 조사한다는 건 알려주셨잖습니까. 조사 대상으로 따지자면 장관이 더 극비 아닙니까?

“그거야 일개 팀이 장관씩이나 되는 거물을 치다 삐끗하면 청이 쑥대밭 될 것 같으니 그랬지요. 나는 청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금은 다르지요. 정말로 장관을 치는 데 성공했는데. 내가 정보를 흘리는 것이 과연 청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국장으로서는 진심이었다.

딱 반만.

나머지 반은 협상을 원한다는 표시였다.

정보를 원한다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구미가 당길 만한 것을 내놓아라.

또한 서로 필요에 의해 손을 잡은 사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정보를 내놓으란다고 순순히 내놓는 바보는 아니니까.

과연 유진환은 침묵에 빠졌다.

국장은 느긋한 자세로 대답을 기다렸다.

상대가 저울에 무엇을 올릴지 기대감과 함께.

-국장님, 잠시 통화가 길어져도 되겠습니까? 옆에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유진환이 들고 온 것은 국장의 예상 밖이었다.

‘지금 나한테 새로운 인맥은 절실하지 않은데.’

국장은 인맥보다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받고 싶었다.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디까지 올려 줄 수 있다는.

어차피 하동문은 이미 자신이 돕지 않아도 유력 대선 후보다.

공신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은 알았다.

그래도 떡 한 조각이라도 나눠 받길 원하는 건 무리한 요구는 아니다.

하지만 저울에 더 큰 것을 올리라고 큰소리칠 수는 없었다.

상대는 자신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상대는 다른 국장에게 눈을 돌릴 수도 있었다.

국장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느 분이실지 기대가 됩니다. 바꿔주시죠.”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국장은 크게 기대하지 않으며 기다렸다.

잠시 후,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힘 있는 목소리가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통화는 처음이지요? 국회의원 하동문이라고 합니다.

“하, 하동문 의원님!”

국장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새로운 동아줄이 되어 줄 사람을 이렇게 빨리 소개받을 줄은 몰랐다.

-항상 공무 보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희 국회의원은 국세청의 노고에 감사하고 있어요.

“별말씀을요. 저희 업무입니다.”

국장은 진땀을 흘리며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와 반대로 하동문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보좌관에게 듣자니 국장님이 국세청에 계시기엔 아까운 분이라고 하더군요.

“그, 그렇게 말했습니까?”

-예. 유진환 실장이 사람 보는 눈은 좋은 사람이에요. 유 실장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저도 국장님께 관심이 가는군요.

“영광입니다, 의원님.”

-유 실장에게 언제 한 번 자리를 마련하라고 하겠습니다. 다음에 뵈었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저 역시 뵙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예.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하동문과의 통화는 짧았다.

그러나 국장은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에 대해 ‘국세청에 있기는 아까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건 즉 국세청이 아닌 다른 곳으로 불러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좋아! 됐어!’

확약은 아니더라도 국회의원과 직접 통화를 했다.

직접 보자는 말도 들었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었다.

-국장님, 유진환입니다. 전화 바꿨습니다.

“아, 그래요.”

국장은 유진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음을 굳혔다.

지금 국세청의 내부 정보니 뭐니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술이라도 들이켠 듯 사고 회로가 붕 뜨는 느낌이었다.

국장은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특조 2팀에서 조사국에 협조 요청한 명단이 있습니다. 그걸 알려드리죠.”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대신 국세청에는 피해가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가 원하는 건 신재현 혼자만의 파멸입니다.”

-조직을 위하시는 국장님의 충심에 감명 받았습니다. 국장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소속 직원이 찍혀 나가는데 조직이 무사할 리 없다.

어떻게든 피해를 받게 되어 있었다.

국장은 그것을 알면서도 유진환의 구두 약속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

“예, 감사합니다. 의원님께서도 국장님의 협력에 기뻐하실 겁니다. 추후에 의원님께 시간이 나는 대로 제가 일정을 잡아 보겠습니다. 예, 연락드리겠습니다.”

유진환은 더없이 정중한 말투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아까 국장과 대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바로 앞에 앉아 차를 마시던 하동문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비싸. 나까지 팔았으니 결과가 있어야 해.”

“그만큼 가치 있는 정보였습니다.”

“자네가 그렇다면야. 그런데 그렇게 국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아까는 왜 ‘하청’이라는 말을 들먹였나? 일부러 도발한 것 같던데. 맞지?”

유진환은 비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2국장 말고도 사람은 많지만, 한번 뚫어놓은 굴을 막히게 둘 순 없으니까요. 국장이 절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습니다. 이제 저와 관계를 끊지는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국장은 앞으로 신재현을 볼 때마다 제 말이 생각나겠죠.”

유진환의 대답에 하동문이 찻잔을 내려두고 기분 좋게 웃었다.

“자존심 있는 작자니 우리와 일이 틀어져도 신재현에게 가진 못하게 하겠다? 크, 내가 이래서 자네를 좋아해.”

“별말씀을요.”

하동문은 손수 유진환 앞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그래서 이번에 누굴 치겠다던가?”

하동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이미 장관을 쳐 본 놈이니 이제 누굴 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달리는 폭주 기관차가 어느 방향으로 머리를 틀었는지 아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유진환은 국장에게 들은 이름을 말하기 전에 재밌어 미치겠다는 듯이 웃었다.

“하, 정말 볼수록 아까워요. 이런 대담한 행동력이라니. 정말 같이 일해보고 싶은데.”

“한 번 차여 놓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하동문은 눈을 흘겼지만 유진환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선생님도 보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보세요.”

“그놈이 내 앞에까지 오는 날은 내가 그놈을 죽이는 날일 텐데.”

“그건 그렇군요. 아쉽네요.”

신재현이 하동문을 마주하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신재현이 굽히거나, 신재현이 하동문을 치러 오거나.

유진환으로서는 자신이 모시는 사람을 지켜야 하니 후자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남은 것은 신재현이 굽히고 들어오는 길뿐인데,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것 또한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

“노는 것도 좋지만 봐주다 물리는 일은 없도록 해.”

“당연한 말씀입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밟아서 한번 꺾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면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않을까요?”

하동문은 굳이 위험한 다리를 건너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아끼는 인재의 재미를 방해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믿음과 염려를 담아 말했다.

“자네가 알아서 해.”

“예.”

그 말을 끝으로 유진환은 입을 다물었다.

겉으론 조용해도 저 머릿속에서 어떻게 상대를 죽일지 계획이 한창 세워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아는 하동문은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유진환은 믿음을 배신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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