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각자의 선택 (2)
청와대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오죽하면 황민우가 걸어가도 되겠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네이버 길 찾기로 찾아본 결과, 경복궁 옆길로 쭉 따라 걸어가면 불과 25분 남짓이었다.
“걸어갈까요?”
“산책가는 길이면 상관없는데 업무시간에 굳이 그 거리를요?”
“가깝잖아요. 전 이렇게 가까운지 몰랐는데.”
“원래 국세청 있던 자리니까요. 예전엔 청와대 근처에 정부청사 몰아서 지어놨었잖아요.”
강혜원과 안길진은 걸어가느냐 차를 타느냐에서 국세청의 역사까지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아 맞다, 여기 원래 국세청 본청이었죠?”
“네. 세종으로 이전하고 나서 서울청이 들어온 거죠.”
“원래는 어딨었대요?”
“서대문이요.”
둘의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장세훈이 덜컥 끼어들었다.
“역사 강의는 나중에 하고. 그래서 걸어갈 거야, 차 타고 갈 거야?”
“시간 남는데 구경할 겸 걸어가죠.”
“너 혼자 걸어와. 우린 차 타고 갈게.”
“아…….”
안길진의 걸어가자는 요청은 장세훈 선에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1층으로 내려와 보니 어차피 안길진의 희망 사항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청와대에서 차를 보내줬기 때문이다.
비싼 차는 아니고 승합차였는데, 정확히는 경제수석실에서 수배해 준 것이라고 했다.
“이런 것도 보내주네요.”
“택시 타고 가려고 했는데.”
“마을버스도 가더라.”
서울청에서 청와대까지는 대략 1.5km였다.
그 짧은 거리를 시시콜콜한 대화로 채우고 있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입구 검색대 통과한 후 본관까지 거리가 좀 됩니다. 어차피 차가 마중 나올 예정이었습니다.”
“아, 그래요?”
강혜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만 나는 의문이 생겼다.
“잠시만요, 본관이요? 여민관이 아니라 본관으로 갑니까?”
“네. 본관입니다.”
남자의 말을 듣고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마는 강혜원, 안길진과는 다르게 나와 황민우는 시선을 마주쳤다.
수석실은 입구와 비교적 가까운 여민관에 있다.
본관과 여민관은 거리가 500m 정도 되기 때문에 자연히 여민관에도 대통령 집무실이 있다.
그래서 간단히 사진만 찍는다길래 여민관으로 가게 될 줄 알았던 것이다.
본관 얘기가 나오는 순간, 내 생각보다 일이 크게 벌어진 것 아닌가 하는 예감이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본관 앞에서 내리자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서울청 앞처럼 무질서한 광경은 아니었지만 보자마자 놀라울 정도로 많긴 했다.
로비에서 기다리던 것은 임현승 경제수석이었다.
잠시 후 대통령이 2층의 계단을 걸어 내려오자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의 모습을 샅샅이 훑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정말 가슴을 졸였다.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탈세액이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칠 수는 있을까.
그런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긴장을 풀었다.
대통령과의 만남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지나갔다.
시간을 많이 뺏지는 않을 거라고 하더니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사진을 찍고 고맙다는 인사와 덕담 몇 마디, 그리고 대통령은 그린 듯한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동시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기자들도 어느 한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임현승 경제수석과 우리 팀이었다.
정신이 쏙 빠져 있는 팀원들과 악수를 한 후, 수석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작게 말했다.
“이번 일이 신 팀장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신경 써주신 만큼 더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좋은 일로 봅시다.”
그렇게 바쁜 오전을 보내고, 늦은 점심까지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자 벌써 3시였다.
“오, 신기해! 우리 진짜 사진 찍혔어요. 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 찍었으니까 찍혔지. 근데 청와대 들어가 본 건 두고두고 간직할 만하다. 자랑하고 다녀야지.”
팀원들은 잔뜩 들뜬 분위기였다.
이렇게 들뜨면 해이해지기 쉬운데.
나는 주의를 주려다가 멈췄다.
이런 날이 있는 것도 좋지 않을까?
우리 팀이 안 그래도 업무 강도가 높은데 공무원이라는 특성상 초과수당도 한계가 있으니까.
일반 회사처럼 성과급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탈세범을 보며 동기부여를 받듯이 팀원들도 성과에 따른 보람은 느껴봤으면 한다.
-국민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서울지방국세청의 특수조사 2팀이 지금 들어오고 있습니다. 팀장이 이 다섯 명 중 가장 젊은 분인 것이 아주 특이한데요, 나이가 28살이라고 했죠? 팀장뿐만 아니라 팀 전체가 매우 젊습니다. 젊은 피예요.
강혜원은 말릴 새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뉴스를 틀었다.
어떻게 저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자신이 나온 뉴스를 볼 수 있지?
나는 왠지 부끄러워서 뉴스에 내가 나올라치면 바로 채널을 돌려 버리곤 한다.
도저히 안 되겠다.
나는 이마를 짚고는 전자 팩스를 열었다.
22명이나 되는 대상들을 단 다섯 명이 빠르고 정확하게 조사하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조사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전부 떠넘긴 것은 아니다.
이미 조사한 6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중에서 반을 조사국에 맡겼다.
빠른 조사가 생명인데, 나눠서 하면 빠르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슬슬 곧 결과가 올 때가 됐는데.
“응?”
그런데 전자 팩스에 들어와 있는 문서는 딱 한 장이었다.
그것도 매우 단출했다.
-현재 조사 2국은 업무가 과다하여 여력이 없으며 특수조사 2팀의 업무에 협조할 의무가 없는바, 향후 모든 협조 요청을 거절함.
여력이 없어서 도와주기 어렵다는 말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 이후의 말투가 이상했다.
원래 별것 아닌 내용도 공문 투로 쓰면 이상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공문 투를 벗겨내고 보면 대충 이렇다.
-우리 바빠서 못 도와줌. 근데 원래 도와줄 의무 없으니까 앞으로 안 도와줄 것임.
앞으로 우리 팀의 모든 요청을 씹겠다는 것이 문제다.
뭐지? 뭐가 틀어졌나?
괜히 사무실 분위기를 흐리기는 싫었다.
그래서 말없이 혼자 기억을 뒤지고 있는데 문득 사무실이 조용해진 것을 느꼈다.
그냥 할 말이 없어서 조용한 것이 아니다.
뭔가 있는 분위기였다.
뭔데 말을 못 걸지?
내가 황민우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가 팀원들 대신 입을 열었다.
“팀장님. 조사 1국과 3국에서 앞으로 도와주기 어려울 것 같다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1국하고 3국이요?”
“네. 일전에 전수조사 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그쪽 직원하고 안면을 텄거든요. 방금 메시지가 왔는데 조사국장끼리 무슨 말이 오갔나 봅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이깨나 드신 분들이, 그것도 국장급이나 되는 분들이.
겨우 팀 하나를 상대로 왕따를 시키시겠다.
“진짜 할 짓 없는 사람들이네요. 4국도 마찬가지인가요?”
조사국은 1국부터 4국까지 있었다.
국제거래조사국은 그들만의 세계라는 느낌이었으나 1~4국은 나름 국장끼리 친했다.
“4국은 지켜보려는 것 같습니다. 잘못하면 서울청 내에서 패싸움이 날 것 같다고요.”
“무슨 이런 일로 패싸움입니까. 애들도 아니고.”
“원래 기관 간의 알력싸움이 제일 더럽고 치사합니다. 지금만 해도…….”
“지금만 해도 뭔가요? 혹시 뭐가 또 있습니까?”
황민우는 그답지 않게 잠시 주저하더니 말을 이었다.
“조사국이 전력을 다해 특수조사 1팀을 돕고 있다고 합니다.”
“허, 참…….”
정말로 날 뭉개고 싶었구나.
국 밑에 과, 과 밑에 팀.
상식적으로 봤을 때 체급으로 보나 직급으로 보나 상대도 되지 않는 팀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는 걸 보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파벌싸움 축에도 못 드는 일이었다.
부끄러워서 외부에 나가서 말 꺼내지도 못한다.
내 윗선들이 내부 싸움하는 걸 본 적은 있어도 막상 내가 해보는 건 처음이다.
그래도 질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제가 얘기해보죠.”
하지만 일단은 대화다.
다 함께 힘을 합쳐서 탈세범을 조져도 시원찮을 판국에 쓸데없는 곳에 힘을 빼고 싶지 않다.
할 수 있다면 좋게 풀고 싶었다.
나는 일어서서 재킷을 챙겨 입었다.
“담판 지으러 가시게요?”
강혜원이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요. 제가 가야죠.”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국장님이니까 화난다고 싸우고 그러지 마시고요.”
걱정의 포인트가 조금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강혜원의 걱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별일 없을 겁니다.”
셔츠와 재킷 단추를 잠그고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등 뒤에서 장세훈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 하나 따라가야 되는 거 아냐? 난리 날 것 같은데.”
“국장과 팀장 대화에 저희가 어떻게 낍니까. 팀장님을 믿으세요.”
과연 내가 없을 때 사무실을 수습하는 건 장세훈이 아닌 황민우였구나.
나는 든든함을 느끼며 발길을 옮겼다.
***
“특조 2팀장이 왔다고?”
비서의 안내 전화를 받은 조사 2국장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이 시간이면 사무실에 들어와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굽히기 위해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어서 들어오라고 해.”
압박하기 위해 움직인 건 맞지만, 이렇게 쉽게 굽히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국장은 거만한 표정으로 2팀장을 마주했다.
“국장님, 여쭐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신 팀장은 내가 물어보면 다 대답해주는 사람으로 보이나?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국장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기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신재현은 국장의 잔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앞으로 저희 팀의 모든 협조를 거절하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국장님은 저를 어떻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노골적인 질문에 국장이 흠칫했다.
국장 회의 때 탈세범을 잡겠다고 우기는 걸 보긴 했다.
고집이 센 놈이라고는 생각했지만, 1:1로 보니 더 미친놈이었다.
돌려 말할 생각 자체가 없는 놈이다.
‘굽히러 온 게 아니었나?’
국장은 상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말씀을 해주셔야 알죠. 제가 한 일이라고는 탈세범을 잡겠다고 뛰어다닌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탈세범을 잡겠다는 목적으로 조사국에 협조를 요청드렸죠.”
“허, 당돌하네.”
국장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그러나 신재현의 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간 조사국도 바쁘신데 저희 일을 도와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히 생각합니다. 앞으로 협조해주지 않으신다 해도 저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 됐네. 뭐가 문제야?”
“1팀만 노골적으로 밀어주시는 건 문제죠. 국장님, 정말 이 좁은 지방청에서 파가 갈려 싸우길 원하십니까?”
“그러니까 지금, 네까짓 게 나랑 싸움거리가 된다는 말이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국장님의 진노를 풀러 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화를 푸시겠습니까? 까마득한 부하직원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신재현은 저자세로 나왔지만 국장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국장은 호통을 쳤다.
“위계질서 다 무시하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어서 조사관들 허파에 바람이나 넣고! 네 존재 자체가 분란이야!”
“방금 하신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허파에 바람이나 넣다니요? 제가 조사관들에게 악영향을 줬단 말씀이십니까?”
“같잖은 공명심에 널 따라한답시고 여기저기 들쑤시는 조사관이 늘어나고 있으니 당연히 악영향이지!”
국장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신재현은 오히려 빙긋 웃었다.
“그런 조사관님들이 늘어나고 있단 말이죠.”
신재현의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뿌듯함이었다.
그 표정을 본 국장은 기가 막혔다.
“지금 기뻐하는 거야? 이거 안 되겠네. 앞으로 이 청에서 있는 동안 절대 다른 곳에서 협조받을 생각 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며 국장은 아예 의자를 돌려 앉았다.
얼굴도 보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그래도 내심 국장은 이렇게 하면 신재현이 무릎이라도 꿇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신재현은 담담했다.
“알겠습니다. 국장님 뜻이 그러하시다면 결과로 보여드리죠. 가보겠습니다.”
신재현은 국장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국장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국장은 경악하며 닫힌 국장실 문을 바라보며 외쳤다.
“뭐야, 저거! 싹싹 빌어보지도 않고 나가? 뭐 하는 놈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국장의 예상은 한 치도 맞지 않은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