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44화 (144/500)

144화. 대면(5)

VIP.

흔히 대통령을 이르는 말이었다.

선거로 선출되는 행정부 수반.

우리나라의 모든 실권을 쥔 사람.

명실상부한, 그 누구도 이견 없는 이 나라의 최정상.

나뿐만 아니라 전국의 그 어떤 공무원이든 명령 체계를 따라 올라가고 올라가서 쭉 끝까지 따라가면 그 위에 있는 것이 대통령이었다.

나 역시 청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몰려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공무원을 일반 회사원이라 치면 대통령은 회장이다.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보는 날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솔직히 다른 세계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굳이 말하자면 연예인 같았달까.

같은 대한민국에 있는 건 알지만 TV와 신문에서나 보는, 나와 다른 차원의 사람.

지금 심정을 말로 표현하자면…… 그래, 길 가던 연예인이 나에게 악수를 청해온 기분이다.

나는 어딘지 붕 뜬 느낌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라는 말은, 없으셨습니까?”

평범하게 말하려 했는데 내가 내뱉은 숨에 말이 한 번 끊겼다.

인정해야겠다.

나는 지금 굉장히 흥분해 있다.

그것이 전화 너머로도 느껴졌는지 청장은 애써 차분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 말씀은 없으셨다. 하지만 전국민의 관심이 쏠린 건이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짧게 대답한 후 청장은 일부러 기대감을 낮추려는 것처럼 말했다.

-VIP께서 직접 보자고 하신 건 아니야. 현직 장관을 치는 일이고 여론이 난리니 실무자의 보고서를 보고 싶으신 거겠지.

“그만큼 관심이 있으신 건이군요.”

-VIP의 연락이 왔다고 부담가질 것 없어. 원래도 장관을 치려고 했을 때부터 이런 주목은 예상했던 것 아냐? 뉴스 안 보는 정치인은 없어.

“평소처럼 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괜히 특출나게 할 필요도 없어. 근거 잡고 때리는 거. 그거면 충분해.

“그거라면 자신 있습니다.”

대화를 하다 보니 들뜬 기분이 가라앉았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의욕이었다.

“증거는 잡았습니다. 곧 좋은 소식 보고 올리겠습니다.”

-반가운 얘기군. 기대하지.

전화를 끊자 팀원들의 시선이 내게 몰려 있었다.

“방금 무슨 얘기에요?”

“팀장님이 그렇게 흥분하신 거 처음 봐요.”

“아니지, 탈세범 쥐어팰 때 말고는 처음 본 거지.”

“그게 그거죠.”

팀원들끼리 쑥덕거리는 것을 보고 나는 아직 내 숨이 들쑥날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민치호 국장을 만났을 때도, 서울청장 앞에 섰을 때도 이렇게 긴장되지는 않았는데.

나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그래, 놀랄 것 없다.

몇 년 후 민치호 국장은 국세청장이 될 것이고, 나는 지금보다 더한 놈들을 때려잡을 것이다.

국회의원의 관심도 받아봤는데 그깟 대통령이 대수인가.

나는 탈세범이냐 아니냐로 사람을 판단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이런 일에 흥분하다니 아직 멀었다.

나는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번 보고서는 우리 청 내부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유출될 겁니다. 깔끔하게 정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외부요? 설마 언론에 흘리시게요?”

강혜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요. 저희 보고서는 청와대로 올라가게 됩니다.”

“청…… 뭐?”

“뭐, 뭐뭐뭐라고요?”

팀원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허억허억, 지금 청와대라고 했어요?”

“우리가 사고를 크게 치긴 쳤나보다. 국회도 아니고 청와대라니. 청와대 누가 보고서 달래? 총리실? 정책실? 아니다, 그런 데서 연락 올 리가 없지. 수석인가?”

아니, 폭발적이라고 표현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장세훈이 진지한 얼굴로 묻는 것을 보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VIP에요.”

“흐어억!”

안길진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았다.

의자도 아니고 맨바닥이었다.

“VIP가 그 말로만 듣던 대, 대통령 맞죠? 지금 내가 뭐라고 한 거야, 대통령이라고 한 거야?”

강혜원은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가장 차분한 황민우조차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저 얼굴로 보건대 침착해서 말이 없는 게 아니다.

말이 안 나오는 상태다.

“자, 진정하세요. 우리는 국회의원도 보고 장관도 봤잖습니까. 우리 꼭대기에 계신 회장님일 뿐이에요. 일만 잘 하면 됩니다.”

“류석호는 2선이었죠! 어떻게 2선 의원이랑 대통령이랑 같아요?”

“이야, 너는 어떻게 이렇게 침착하냐…….”

장세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아까 청장이 왜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는지 알게 되었다.

여기서 나까지 흥분하면 오늘 아예 일을 못 할 기세였다.

왜 아까 청장이 그 중요한 얘기를 전화로 하나 했더니, 혹시 표정 관리가 안 되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아니지, 아직 정신이 덜 들었구나.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실없는 생각을 얼른 지워 버렸다.

팀원들의 상태는 더 심각했다.

“세, 세법은 잘 모르실 테니까 법조문 첨부해야 할까요? 주석으로 달까……?”

“불복청구서에 세무대리인이 근거 법령 달듯이? 그럴까? 왜 이 법령 적용했는지도 달아두자.”

“경찰들 수사 자료 보면 증거 사진 붙여놓던데, 우리도 현장 사진만 따로 백데이터로 철하죠.”

“오오, 좋은 생각이다!”

진지하게 한마디 보탠 황민우의 말에 찬동하는 팀원들까지.

제정신이 아니다.

나는 박수를 한 번 쳐서 주목을 모았다.

“청와대에 비서진이 몇 명인데 세법 그걸 모르겠습니까? 거기서 알아서 설명해 드리겠죠. 우리는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하지만 현장 사진은 필요하겠군요. 대상이 미술품이니까.”

거래 기록 없이 같은 미술품이 장관의 집에 있다는 것이 현재 중요 증거였다.

“저, 진짜로 얼른 사진 뽑아 올게요!”

“나도 얼른 가야겠다. 안길진! 갤러리 박스 뜯으러 가자!”

“옙!”

팀원들의 의욕이 하늘을 찔렀다.

물론 나도였다.

“팀장님, 아주 깔끔하게 조져 보죠.”

둘만 남게 되자 황민우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건 처음이라 피식 웃고 말았다.

“네. 시작해보죠.”

***

“후…… 장관이 된 지 반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내쳐질 순 없어.”

사무실에 홀로 남은 장관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장관이 수명이 짧은 건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최대한 오래 버티고 싶었다.

버티면 버틸수록 곧 부와 명예로 이어진다.

장관 중에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로 옷을 벗은 사람이 많았다.

재산 누락이 걸려서, 위장 전입이 걸려서, 자식의 특례입학이 걸려서, 말실수를 해서…….

그리고 그 오명은 두고두고 따라붙는다.

차라리 임기 내에 실적도 없고 사고도 없이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퇴진하는 것이 좋았다.

뇌물수수와 탈세로 6개월 만에 강제퇴임 당한 장관이라니 그 불명예를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장관은 좋은 소리가 하나도 없을 것을 알면서도 홀린 듯 자신에 대한 기사를 눌렀다.

국세청에 인맥이 없는 이상 정보를 얻으려면 결국 기사밖에 없었다.

무언가 발표가 있었다면 속보로 뜰 것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났는데도 기사는 여전히 의혹과 심증뿐이었다.

국세청 내부자가 정보를 흘릴 만도 한데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기사 내용은 틀에 박힌 듯 비슷했다.

현직 장관에게 무슨 혐의가 있다는 둥, 사실은 무슨 특혜를 봐준 것 아니냐는 둥.

“음모론이야, 음모론! 어떻게 좋게 쓴 기사가 하나도 없어!”

장관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게 다 그 신재현인가 하는 놈 때문이야.”

조사를 진행한 공무원은 전적이 화려하다 보니 일단 그놈이 쳤다 하면 ‘혹시……?’하는 여론이 더 우세했다.

“왜 하필 나야…… 다른 놈 많은데 왜 나냐고!”

장관은 이를 부득 갈았다.

하필 자신인 것, 그리고 하필 조사하겠답시고 들이닥친 것이 신재현인 것.

여러모로 불운이 겹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엔 야당의 국회의원을 치더니, 이번엔 왜 같은 공무원인 자신을 공격한단 말인가.

장관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기사를 내려 댓글을 확인했다.

[BEST] 멋있다! 작년에 국K-1 칠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장관이고 나발이고 범죄자 새끼들은 다 목 씻고 기다려라!

└조사팀이 어디라고? 신재현? 이건 100%지.

└첨엔 뭔 또 드러운 정치싸움인가 했더니 공무원 이름 보고 납득.

└아 구린 데가 있으니까 조사하겠지. 자신 있으면 아니라고 하던가.

[BEST] 방금 장관 놈 기자회견 보고 왔는데 왜 저래요ㅡㅡ? 지가 뭔데 찍지 말라고 그래?

└딱 봐도 구리잖아

└찔리는 게 있다는 뜻임ㅇㅇ

“아아악!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역시 그러면 그렇지.

좋은 말은 없었다.

죽여라, 체포해라, 험악한 댓글을 본 장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게 욕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악플은 사회의 악이야. 정치, 연예 면 뿐 아니라 뉴스란 전체에서 댓글을 막으라는 의견을 내야겠군.”

장관은 자신이 이 자리에서 내려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기보다 더한 놈도 많다.

하다못해 몇 년 전 국토부 장관이라는 놈은 어느 시골이 재개발 된다는 정보를 갖고 미리 땅을 사들여 대박을 쳤다.

땅을 되팔아 한몫 단단히 챙긴 후 지금은 어느 대학교 교수로 있다고 들었다.

그뿐 아니다.

알음알음 뒷돈을 챙기는 놈들은 수두룩 했고 자신이 한 짓은 그저 새 발의 피일 뿐이다.

구체적으로 나열한다 해도 몇 가지 안 된다.

그림?

그거야 자신만 받은 것도 아니다.

자기를 잡을 거면 국회의원들도 다 잡아야 한다.

혜택?

어차피 허가 날 것, 실무적으로 충족하기 어려운 조건은 조금 느슨하게 해준 것뿐이다.

이건 엄연히 문체부 장관의 업무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가.

자리를 잃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뇌를 마비시켰고, 곧 장관은 자기합리화에 들어갔다.

“그래! 세상에 이상한 놈 많잖아!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돼!”

어차피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있다.

옆에서 자르라 마라 난리 쳐도 대통령이 침묵하면 장땡인 것이다.

지금이야 시끄럽지만 국민들은 눈앞의 것만 좇는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준다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국민들은 잊을 것이다.

문체부 장관이 조사 중이라는 것을.

결국 칼자루를 쥔 건 대통령이 아닌가?

여론이 급박해지면 자를 수밖에 없지만 잊히면 그걸로 끝이다.

조용히, 그리고 가늘게 장관직을 수행하다 물러나면 되는 것이다.

“그럼 어쩌지, 기자회견? 인터뷰?”

어떻게든 결정권자인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독대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이니 다짜고짜 쳐들어가 봐 달라고 할 수는 없고.

장관은 머리를 굴렸다.

아직 국세청은 조용하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도록 새로운 입장표명이나 별다른 증거가 터지지 않은 걸 보면 아직 한창 조사 중인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그쪽에서도 부담스러워하고 있던가.

그렇다면 소문으로만 듣던 여론전이 필요한 때다.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인 이상 구경은 많이 해 봤다.

심증이 확실한 국회의원들도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요리조리 빠져나가지 않았던가.

결심한 장관은 전화기에 손을 갖다 댔다.

저번 기자회견은 너무 갑작스럽게 하는 바람에 실패였다.

이번엔 아예 대변인실을 총동원할 생각이었다.

-띠리리.

마침 걸려온 비서실 전화에 장관이 반갑게 수화기를 들었다.

“어, 잘됐네. 대변인실 연락해서…….”

-장관님. 급한 전화입니다. 꼭 받아보셔야겠습니다.

“국세청이야?”

-아니요. BH(Blue House)입니다.

“뭐야, 갑자기 뭔데!”

갑작스러운 비서의 말에 장관의 뇌에 부하가 걸렸다.

뒤늦게 이해 한 장관이 기다리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이미 겁에 질린 비서는 전화를 연결했다.

짧은 신호 대기음 뒤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명운 장관님. 차태석입니다.

진짜 대통령이다.

장관은 눈을 질끈 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