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대면(2)
유진환은 요즘 하루 종일 바빴다.
서롱 갤러리가 털린 여파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갤러리의 관리야 전적으로 관장이 했으나 유진환이 그를 통해 비자금을 세탁하거나 뇌물을 알선한 건도 꽤 되었다.
당연히 하나가 걸리면 주르륵 걸린다.
어떻게든 중간 연결고리를 끊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오랜만입니다. 예, 안 그래도 일전에 있었던 거래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의원님 건은 제가 특별히 신경 써서 세팅했습니다.”
간혹 먼저 전화 오는 사람도 있었다.
나름 국회에서 큰소리 좀 치는 사람이다.
TV에서는 근엄한 얼굴로 무게 잡던 사람인데, 갤러리 하나 털렸다는 말에 이렇게 깜짝 놀라 전화가 오다니.
저렇게 간이 약해서 어떻게 정치를 하나 싶었다.
-나한테 조사 들어올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내가 내부 소식통으로 알아보니까 국세청에 있는 뭐시기가 작년에 여당 쪽 인사 날려 버린 놈이라며. 걸릴 일은 없어도 발밑에서 깝죽대면 귀찮아져.
“의원님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작년 류석호 의원은 너무 나댔습니다. 과거도 깔끔하게 세탁 못 한 사람이 난데없이 표몰이 좀 해 보겠다고 세무서를 찾아가니 그렇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크흠. 어찌 되었든 이번 건은 잘못하면 크게 번질 수도 있어. 그 전에 잘 마무리지어야 해.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쌓은 것이 많은 사람은 잃었을 때의 두려움도 큰 법이다.
작년의 사례도 있다 보니 뒤가 구린 인간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유진환은 한숨과 함께 전화를 끊은 후 기억을 뒤졌다.
“분명 다음 타겟을 잡았을 텐데.”
갤러리를 통해서 거래한 인사가 누구누구였더라.
유진환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젊은 공무원이 눈앞에 그린 듯이 떠올랐다.
작년 있었던 기자회견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봐도 훌륭한 세팅이다.
자신이 해도 그렇게 깔끔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동안 하동문 의원을 모시며 보좌관으로서 많은 설계를 해왔다.
기어오르는 정치인은 약점을 잡고 협박해 하동문의 밑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접근해온 재계 인사는 당근을 쥐여 주며 포섭했다.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야 재밌었지만, 너무 쉽게 풀리니 따분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신이 물을 먹었다.
하동문 의원조차 재차 전화해서 ‘정말 신경 안 써도 되겠냐’며 물어올 정도였으니까.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마저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일개 7급 공무원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궁금하면서도 문득 포섭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런 머리를 뭐 하러 아깝게 공무원 하는 데 쓴단 말인가.
“여지가 있을까…….”
유진환은 입맛을 다셨다.
현재까지의 행보로 보면 어려워 보이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다.
사람은 누구든 약점이 있는 법이니까.
생각을 마친 유진환은 전화기를 들었다.
“아, 부탁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마친 전화 잘 주셨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신 건부터 보고 드리겠습니다.
하동문 의원의 비서실은 역시 유능했다.
유진환은 우선 비서실의 보고부터 들었다.
-이례적으로 7급 공무원이 팀장이 되었다는 것과, 지난번 대대적인 세무조사 건으로 국장급의 불만이 표출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조사국의 경우 자존심이 강하니까요. 그쪽으로 공략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세부 사항은 메일로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확인해 보죠.”
-더 시키실 일은 어떤 건입니까?
“신재현 개인에 대한 조사입니다. 가족 사항부터 이력까지 가능한 건 모두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유진환은 메일을 열었다.
이름과 이력, 그리고 그간 다뤄 온 건들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판사는 그간 맡은 건과 판결을 보면 성향을 알 수 있고, 검사는 수사 결과를 보면 성향을 알 수 있다.
국세청도 마찬가지였다.
유진환은 마음에 드는 인물을 하나 발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서울지방국세청 조사2국 국장 김상민]
누군가에게 소개를 받는 거라면 몰라도 이렇게 다짜고짜 전화하는 거라면 신뢰를 쌓을 시간을 갖고 밑 작업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유진환은 망설임 없이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첫 마디는 가볍게 국회의원 하동문의 이름으로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김상민 국장님. 하동문 국회의원 정책연구소의 실장 유진환입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
-……하동문 의원이요? 야당 대표씩이나 되시는 분의 정책연구소에서 왜…….
역시 이름값은 잘 먹혔다.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의 이름은 함부로 무시할 만한 게 아니었다.
“저희 의원님께서 국세청의 활약에 주시하고 계셔서요. 다음 국세청장이 되실 분이 서울청장님이라는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이신가 봅니다. 지금 서울청이요.”
첫 대화에서 우위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름빨, 직급,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말투.
거기에 협박하는 어조까지 잘 섞어주면 완성이다.
“하지만 서울청에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하면 다음 국세청장 후보 청문회에서 큰 곤욕을 치르실 수도 있는데요.”
유진환이 현재 아는 것은 ‘서울청 내부에서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 유진환은 요리를 완성해 냈다.
“아니면 서울청장님은 다음 국세청장 자리를 이미 포기하셨습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중부청장님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긴 한데…… 서울청장님을 오랜 기간 모셔 오신 국장님께서는 어떻게 되시려나 모르겠군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뭘 원하는 거예요?
국장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동요하는 것이 느껴지자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남들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볼 때가 가장 즐거웠다.
“별거 아닌 이야기입니다. 국장님 은퇴하신 후에 공기업이나 하동문 의원님 정책 연구소에 자그마한 자리 하나 마련해 드리고 싶은데 관심이 있으신가 하는 얘기죠. 어떠십니까?”
협박 후엔 제안이다.
전화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즐거웠다.
***
“이번 상대는 문체부 장관이라고 합니다.”
유진환이 보고를 올리자 하동문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왜 저런 반응인지 이해는 갔다.
자신도 처음 들을 때 그랬으니까.
“팔다리가 몸통을 치는 격인데.”
하동문 의원은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이번에도 시선을 돌리는 것 아닌가? 국세청 내부 인사에게서 얻은 정보라고 하지 않았나.”
“저 역시 그 정보는 가짜라고 봅니다.”
국장이 자신을 믿지 못하고 가짜 정보를 줬거나 아니면 국장 역시 속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극비로 조사하는 거라면 아무리 국장이라도 알 수 없을 테니.
“문체부 장관을 손댈 수 있을 리 없을뿐더러, 실제로 손댄다 해도 우리의 이득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지켜보아야 한다, 유진환은 그런 뜻으로 말했다.
서롱 갤러리에 연관된 수많은 인간 중에 하동문 의원 측의 사람도 많았다.
그런 작자들이 털리면 몰라도 문체부 장관이라니.
“정부 기관끼리 싸우는 것도 재밌겠군.”
하동문은 기대하는 듯 말했다.
유진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부 기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기관을 쳐내는 깡과 머리.
더군다나 정부의 실책은 야당인 하동문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 문체부가 아니면 어딜 칠 거라 보나?”
“갤러리와 거래한 자들 중에는 다른 의원님들도 계셨습니다만 2선까지는 몰라도 그 이상은 힘들 겁니다. 마침 국세청장이 곧 바뀔 때가 되었으니까요.”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시기적으로 민감했다.
국세청장 청문회 직전에 국세청이 국회를 물어뜯는다?
딱 봐도 구도가 심상치 않았다.
음모론자들이 보면 책을 한 권 써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부는 국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할 테고, 당사자인 국세청은 꼬리를 말 것이다.
물론 임명에 동의하지 않아도 국세청장 임명은 가능하다.
하지만 여론은 나빠지겠지.
하동문은 이번 기회에 어떻게 물어뜯고 무엇을 얻어낼까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재벌도 어렵습니다. 재벌 한 번 건드리려면 국세청이 작정하고 덤벼야 하니까요.”
“남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떨거지들이겠군.”
“네.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으니까요. 적당히 날뛰다 알아서 조용해질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상황을 봐서 쓸모없어진 놈 한 두 명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협상이라도 할까 생각 중이었다.
“그쪽 건은 자네에게 일임하지. 알아서 처리해.”
“예, 선생님.”
이제 걱정거리는 없었다.
평온함과 차향이 감돌던 때, 유진환의 핸드폰이 울렸다.
[문체부 장관의 자택에 세무조사가 들어갔습니다.]
유진환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몇 번을 감았다 떠도 핸드폰에 찍힌 글자는 똑같았다.
‘정말로 미쳤나?’
유진환이 그답지 않게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자 하동문이 물었다.
“무슨 일 있나?”
유진환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하동문의 핸드폰도 울렸다.
유진환이 받은 것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동문은 비서에게서 전화로 보고를 받았다는 점이다.
“오보 아닌가? 정말이야?”
하동문이 큰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알겠네.”
하동문은 전화를 끊고 난 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TV를 가리켰다.
“속보 나온다는데.”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유진환은 사무실 안에 설치되어 있는 TV의 전원을 켰다.
그 말대로 속보 화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 국세청이 최명운 문체부 장관의 집에 기습적인 현장 세무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예고 없이 벌어진 이 조사에 장관 본인은 물론 문체부까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요. 일각에서는 국세청이 아무 증거도 없이 현직 장관의 집을 급습할 리가 없다며 무언가 증거를 잡은 것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기자가 비춘 단독 주택 앞에는 승합차에서 직원들이 내리고 있었다.
국세청 직원의 도착 장면부터 찍은 것을 보아하니 사전에 언론에 알린 것이 분명했다.
언론에 알렸다면 장관이나 자신의 귀에도 들어왔어야 맞다.
언론에도 소식통은 있으니까.
그런데도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은 신재현이 언론을 아주 잘 구워삶았다는 뜻이다.
“생각할수록 대단한 놈이네요. 그 입 싼 놈들을 어떻게 막았지?”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다.
‘딱 세무조사 갈 때까지만 엠바고다. 그러면 왜 현직 장관을 조사했는지 후속 취재 때 좋은 정보를 주겠다. 만약 흘러나가면 그 언론사는 제외하고 브리핑하겠다.’
자신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저런 머리를 굴릴 수 있는지,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희열이 솟구쳤다.
“정치인 생활 수십 년간 저런 미친놈은 처음 보는군. 대체 어떤 작자가 국세청에 끌어들인 거야?”
하동문의 주름진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유진환이 소리 질렀다.
“선생님, 만나봐야겠습니다! 어떤 놈인지 제 눈으로 보고 와야겠어요!”
뉴스를 보며 놀란 눈을 한 하동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문체부 장관을 치는 미친놈이 나올 줄은 몰랐군. 우리에게 있어서는 나쁘지 않은 형국이야.”
둘이 바라보는 관점은 전혀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아까 말했듯 자네에게 일임하지. 회유할 수 있으면 하게.”
“예, 선생님!”
유진환의 눈이 기대감으로 불타올랐다.